세기의 성녀로 일컬어지는 마더 테레사(유고, 1910,8,27~1997,9,5)가 1979년 12월 11일 노벨 평화상 수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중에도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주고받는 미소 중에도 계십니다.
마더 테레사가 이 유명한 연설을 하기 3개월 전인 9월에 그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인 고해 신부 마이클 반 데르 피트(Michael van der Peet)에게 편지로 이런 고백을 남깁니다.
예수님은 신부님에게 특별한 사랑을 갖고 계신 듯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지금 침묵과 공허함만이 가득합니다. 저는 눈을 뜨고도 (그분을) 보지 못하고 귀를 열어 듣고자 하나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으며, 기도하고자 혀를 움직이지만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 믿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제 마음 깊은 곳 거기엔 온통 공허와 어둠뿐입니다. 제안에는 해답 없는 의문이 너무나 많이 살고 있습니다. 제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마더 테레사의 이 두 가지의 모습이 어쩌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삶을 사는 성자에게도 깊은 회의와 싸워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영성가들은 이런 경험을 영혼의 어둔 밤(dark night of the soul)이라고 말합니다. 진지한 성도들은 이런 어둔 밤을 어떻게 잘 지날 수 있느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믿음의 슬럼프를 만난 글로바와 그의 친구가 예루살렘을 뒤로 하고 석양에 엠마오를 향하여 길을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 입니다.
1. 글로바와 그의 친구의 낙향하는 모습입니다. |
13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이름은 18절에 글로바라고 나옵니다. 또 한 사람은 명기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으로 짐작됩니다.
13절을 보면 그날에 라고 했는데 그 뜻은 부활하신 그날에 사도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던 신앙의 센터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들의 고향 엠마오로 내려갔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현장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조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한 달 이상 예루살렘에서 지내다 심령의 고통을 받아 떠났다면 이해가 되지만 그날은 부활의 소식이 서서히 퍼져나가는 때입니다.
그럼에도 부활의 현장인 예루살렘을 떠난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무너졌다는 말이요,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산다는 의미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글로바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형제였고, 또 한 사람은 그의 아들 시므온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사촌 형 야보고보에 이어 예루살렘교회 제 2대 감독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런 전승은 성경의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듣고 넘어가면 됩니다.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사람에게 주님이 곁에 다가오셨음에도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뇌에 충격을 받거나 손상을 입으면 기억상실증에 걸려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경우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얼굴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 옆에 다가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만 생각했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그들 곁에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과 신령한 세계에 대한 눈이 가려졌다는 뜻입니다. 안과 의사들은 사람 눈에 발생할 수 있는 질환이 수십 가지라고 말을 하나 그보다 더 심각한 질환이라면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사람에겐 최소한 세 가지의 눈이 필요합니다.
①사물을 보는 눈입니다. 산을 보고, 사람을 보고, 하늘을 보는 눈이 필요한데 때로는 보조 장치를 이용하면 아메바도 볼 수 있고, 사람의 장기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②이웃을 보는 눈입니다. 이 눈은 정신의 눈이며, 연민의 눈이며, 사랑의 눈인데 그런데 이 눈도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웃은 보이지 않고 나만 보는 눈으로 병들었으며, 남의 좋은 점은 보이지 않고 허물과 약점만 보는 눈으로 병들어 있습니다.③신령한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이 눈은 믿음이라는 코스를 거치지 않고는 볼 수 없으며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의 이 신령한 눈이 점점 어두워가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과학문명이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경우도 신령한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곁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과 더불어 자세히 풀어주는 성경공부도 하였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깨닫지 못합니까?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수없이 예언하였음에도 그 예언을 믿지 못한 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라고 지적을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지식적 예수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만일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확실했더라면 어떻게 말했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진 못했지만 그 분은 반드시 사흘 만에 살아나셨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22~24절에서 꼭 남의 이야기처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남처럼 여긴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며, 내가 다니고 은혜 받는 교회를 남의 교회처럼 생각하며 주인의식이 없다면 이 또한 큰 잘못 아닙니까?
2. 두 사람의 변화된 신앙모습입니다. |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 지라.
①시각이 변했습니다. 영의 눈이 밝아짐으로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신령한 눈이 밝아지면 믿음의 길이 보이고, 영원한 세계가 보이는 법입니다.
반대로 죄의 눈이 밝아지면 세상에 속한 것들 즉 쾌락이 보이고, 죄짓는 법이 보이고, 불의한 길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눈이 언제 밝아졌느냐? 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식사 기도를 하시고 난 이후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그들의 신령한 눈이 열렸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과 만나고 교제함으로 인해 신령한 눈이 밝아지고 신령한 마음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악한 사람과 교제하면서 먹고 마시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즉시 악을 본받게 될 것입니다.
②심령(마음)이 변했습니다.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성령님의 은혜를 받은 것을 의미하잖습니까? 이제 회의적인 신앙이 뜨거운 신앙으로, 침체되었던 신앙이 되살아나는 신앙으로, 탈진했던 신앙이 활기가 넘치는 신앙으로 회복되었습니다.이날 두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들었던 그 말씀은 바로 성경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 해석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심령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사도행전 10장을 보십시오.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말씀을 들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날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었는데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님이 임하시므로 고넬료를 비롯하여 가족들이 방언을 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③행동이 변했습니다.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곧 그 때로. 29절을 보면 그 때는 이미 저물었을 때이며 예루살렘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면 약 11.2km의 거리니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 돌아와도 되겠지만 그들은 즉시 돌아왔습니다. 만일 이때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시기를 놓치면 사탄이 틈을 타서 혹 못 돌아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차차, 천천히 미루다 보면 믿음도 약해지고, 의지도 약해져서 신앙의 미아로 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 진정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깨닫고 예루살렘 신앙의 센터로 돌아왔습니다. 행동 없는 변화는 참 변화가 아닙니다. 믿음이 무너지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나, 믿음이 회복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오는 데는 망설이거나 미룰 필요도 없고 늦출 필요도 없습니다. 떠났던 예루살렘으로, 떠났던 하나님께로, 떠났던 믿음의 자리로 그저 돌아오면 되는 겁니다.
3. 주님을 만난 자는 은혜의 자리로 올라옵니다. |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 지라.
이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열 한 제자 외에 다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누구인 것 같습니까? 빈 무덤 속에서 천사들의 이야기를 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성모 마리아 일 것 같습니다(눅 24:10),이들의 이야기 주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빈 무덤 속에서 천사들의 이야기를 들은 여자들과, 예수님의 빈 무덤을 목격하고 돌아온 베드로가 열띤 토론 속에 최종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주님은 확실히 살아나셨습니다(34절). 35절 말씀을 같이 읽읍시다.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이들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났을 때엔 얼굴에 슬픈 빛에 쌓여있었고(17) 부활하신 주님께서 곁에 다가 왔을 때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31절을 보면 한 순간 그들의 눈이 열려서 주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런 경우를 가르쳐 눈이 열리는 체험이라고 부르죠.
이런 눈이 열리는 순간이 기도하는 순간이 아니라 일상의 식탁에서이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합니다. 여러분은 기적은 꼭 기도시간이나 예배시간에만 일어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좁게만 이해합니까? 기적은 밥 먹는 식탁에서도 일어나고,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내 집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상의 식택에서 주님을 만난 이들을 주제로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상당히 많습니다. 제가 몇점을 비쳐보겠습니다. 왼쪽으로부터 ①첫째가 이탈리아의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1576.8.27.)가 그린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라는 유명한 작품(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소장).
②둘째가 스페인의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zquez, 1599. 6,6~1576. 8.27.)가 그린 엠마오의 식사. ③셋째는 우표로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함께 가시는 모습인데 이때는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합니다.
④넷째도 우표로서 엠마오 가까이 이르자 날이 저물어 제자들이 강권하여 함께 유하며 식사를 같이하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 그림인데 유표로 발매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예배의 자리만 아니라 식탁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16세기 후반, 영국 국교회에 반항하여 생긴 금욕주의자)은 그들의 식탁 벽에 이런 인상 깊은 글자판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식탁의 손님이시고 모든 대화를 듣는 분이시다. 예, 그렇습니다. 주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행복하게 식사하는 경건한 가정의 식탁에 임재하심을 믿으십시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 두 사람은 주님을 만난 그 체험을 따라 사도들과 여러 사람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은혜 받은 이야기를 간증합니다. 이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뭐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36).
이 인사는 요 20:19,20절에서 두 번 거듭되는데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어야 한다는 축복의 말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며 우리 모두가 가장 필요로 하는 말 당신에게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축원을 해 봅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옛 소련에서 신병들에게 신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무신론 교육을 시켰습니다. 한 장교가 나와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합니다. 신병들, 저기 하늘을 보라. 신이 보이나? 안 보이나? 신병들이 일제히 안 보입니다. 라고 하자 장교는 그렇다. 신은 없다. 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신을 믿는 한 사병이 벌떡 일어나서 손가락으로 무신론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장교의 머리를 가리키며 묻습니다. 여러분, 장교님의 머릿속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라고 외쳤습니다. 신병들이 안 보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그 사병은 그렇습니다. 우리 장교님은 골빈 장교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만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하는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을 보는 자가 천국을 바라보면서 미래의 소망을 가꾸어 가는 법입니다. 글로바와 그의 친구가 해질 녘에 가고 있는 곳이 엠마오 아닙니까?
그런데 묘하게도 엠마오란 단어의 의미가 알지 못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지금 가고 있는 엠마오 길은 낙심의 길이요, 절망의 길이요,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불확실한 길이었습니다.
이 시간 혹 여러분 가운데도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분이 있습니까? 지금 인생의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인생의 희망이 보이지 않아 절망하는 분은 없습니까? 어떻게? 어디에다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살아야 될지 몰라서 방황하는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나고, 인생의 방황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끝이 납니다. 얼마나 교회를 오래 다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내가 만나서 어떻게 믿음으로 교제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만이 가지는 자랑거리요 온 인류의 소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머물러 있는 곳을 더욱 사랑하십시오. 남보다 잘하려 말고 전보다 잘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위대한 경쟁일수록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경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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