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1년 말씀

(종려주일)예수님의 십자가에 어떤 은혜가 임합니까?(마 26:56~68)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1. 4. 1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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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땅 인디언 부족마을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정의롭고 사랑 많은 추장이 다스리는 평화로운 인디언의 한 부족 마을에서 언제부터인가 밤마다 닭을 잃어버리는 도난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습니다. 이 부족의 추장은 범인이 잡히면 태형 열 대에 처할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공고했습니다만 그럼에도 그날 밤 닭을 또 도둑맞았습니다.

그러자 추장은 도둑에게 내릴 태형을 스무 대로 올렸습니다. 그래도 닭은 여전히 없어지자 화가 난 추장은 사형 받는 것이나 다름없는 태형 백 대를 선언하였습니다.마침내 그날 밤 범인이 잡혔습니다. 그러나 막상 범인을 잡게 된 추장은 곧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추장의 화난 엄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마다 닭을 훔친 도둑은 바로 추장의 어머니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고, 이곳저곳에서 과연 추장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놓고 수군거렸습니다. 추장이 부족들에게 한 약속을 과연 지킬 수 있을까평소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보아온 부족들은 추장이 절대 어머니를 처벌하지 못할 거야. 늘 정의롭게 부족을 이끌던 추장이었기에 정말 자기 어머니에게 태형 백 대를 내릴까를 궁금해 하였습니다.  

 

형장에 끌려와 아들에 대한 미안함에 조용히 흐느끼며 떨고 있는 어머니의 작은 어깨를 바라보던 추장의 마음은 과연어떠했을까요? 드디어 결심을 굳힌 듯 추장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를 기둥에 묶으라고 명령을 내렸고 사람들은 놀라움으로 입이 벌어졌습니다. 추장은 위엄 있게 깃털로 장식된 옷을 벗고 건장한 몸매를 드러내며 채찍을 들어서 자기 곁에 서 있던 젊고 용감한 사람에게 채찍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곤 추장은 천천히 자기 어머니가 묶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자신의 우람한 팔로 어머니의 몸을 꼭 껴안고는 채찍을 들고 서 있는 젊은이를 향하여 명령합니다. 태형 백 대를 치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21:01~11)로서 고난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의 당하신 고난, 인류를 죄악과 저주와 사망에서 건지려고 자원하셔서 당하신 그 고난과 십자가의 의미를 영적인 시각으로 조명해 보려 합니다.

 

 1. 제자들 모두가 주님을 떠나는 배신을 하였습니다.

 

56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3년간이나 양육을 했던 열 두 제자들, 가장 의협심이 강하고 민첩하였던 가룟 유다에게는 믿고 회계의 일까지 맡겼고, 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은 누구보다 주님의 신임을 받고 중요한 현장마다 동참했던 자들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잡히기 전날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14:31).


22: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주님께서 곤경에 처하자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을 갔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원수에게 배신당하는 일이야 있겠지만 자신이 사랑하고 돌보아 준 제자가 배신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틈만 있으면 헌금을 빼돌렸고 마지막엔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노예 한 사람의 가격에 지나지 않는 은 30에 팔아 넘겼습니다. 이런 배신과 고통은 당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극심한 아픔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이것은 중국 제()나라의 관중(管中)과 포숙아(鮑叔牙)의 우정에서 나온 고사 성어입니다.

관중과 포숙은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자란 죽마고우의 절친한 친구였는데 특히 포숙이 관중을 더 깊이 사랑했습니다. 젊었을 때 포숙은 자본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담당하는 생선 장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익금을 두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관중이 더 많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를 안 사람들은 관중을 더욱 욕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포숙은 관중을 변호하기를, 관중이 이익금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보다 집안이 더 가난하고 딸린 식구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함께 전쟁에 나가서도 포숙은 맨 앞에 서서 열심히 싸웠지만 관중은 언제나 뒷전에서 얼쩡거리다가 싸움이 끝나면 가장 먼저 걸어 나왔습니다. 또한 관중이 3번이나 도망을 가고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관중을 비겁자로 몰아붙일 때에도 포숙은 그를 비겁자라 생각지 않고 그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변호했습니다.

이렇게 포숙은 관중이 여러 가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지만 한결같이 우정을 지키면서 한 번도 배신하지 않고 의리를 지켜주었습니다. 관중이 나중에 포로로 잡혀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에도 포숙은 그를 구해서 높은 자리에 앉게 하였고 자기는 관중보다 낮은 자리에 머무르면서 친구가 잘되기를 빌었습니다.

결국 관중은 제나라의 유명한 재상이 되었는데 나중에 포숙의 눈물겨운 우정에 감동이 되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것은 포숙이었다. 관중이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포숙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주님의 신임을 얼마나 많이 받은 사람입니까? 그런 베드로가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겁니다(26:69~75).

거기에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의 언덕으로 걸어가실 때 평소에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병 고침을 받으며 은혜를 받은 사람들조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27:22~25).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 이보다 비열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대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자신의 체면을 위해 원수로 갚는 일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사랑을 베푸신 군중들이 돌이켜 그 사랑을 예수님께 원수로 갚으려 하니 그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높이 달리심이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버림받고 아래로는 모든 제자들과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2. 직접적인 육체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목요일 새벽에 제사장 가야바가 보낸 자객들에게 붙잡혀 심문과 폭행을 당했습니다.(26:47) 어느 정도의 폭행이냐고요?

제사장의 집 가속들까지도 예수님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수염을 뜯는 말로서는 표현할 수가 없는 모욕과 고통입니다. 창조주요 만왕의 왕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셔서(01:03) 그런 처참한 취급을 받으신 겁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이후 금요일 새벽 또 다시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을 받고 빌라도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어 빌라도의 군인들은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운 채 채찍으로 등을 치면서 온갖 희롱을 하는 모습이 본문 앞에 나옵니다(27:26~31).  

 

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을 받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시러 이 땅에 오셨다는 대속의 진리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채찍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이 어떠했는지 상상이나 됩니까?

유대의 율법은 채찍질을 40대로 제한하였습니다(25:03; 고후 11:24). 왜냐하면 너무 잔인한 매질이요, 사람이 견디어 낼 수 없는 정도의 형벌이니까요? 여기 매질에 사용 된 채찍은 막대기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된 동물의 가죽 끝에 뼛조각이나 납덩이를 붙여 만든 손잡이가 짧은 형태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형틀에 묶어 매질을 할 때 때로는 얼마나 심하였든지 그 매질이 가해지는 동안 몸에서는 회가 분수같이 뿜어 나오고, 뼈가 드러나 보일 뿐 아니라 장기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후 주님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갈보리산을 향해 걸어가면서 수도 없이 넘어졌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갈보리 언덕에서 벗겨진 채 십자가에 높이 달렸는데 이때 시간이 금요일 오전 9시이며 6시간 만인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이내 안식일 다 되어가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인수하여 장례를 치르려고 십자가에서 내리던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심장을 꿰뚫자 피와 물이 흘러 내렸습니다(19:33, 34).

물이 왜 나옵니까? 예수님의 심장이 안에서 터졌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버림받은 극한 고통과 정신적으로 배신당한 괴로움, 그리고 육체의 고통이 예수님을 짓눌러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어서 심장이 터진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숨 막히는 일을 만날 때 심장이 터진다고 말을 하는데 과연 심장이 터질 만한 일입니까? 터질 만한 일이라면 주님의 일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세상에 관한 일입니까? 

 

 

 

3.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나의 구원입니다.

 

53:0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께서 살인자, 반역자의 취급을 받으면서 채찍질을 당한 그 고난과 십자가에 달림은 우리의 죄를 사하는 능력과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피는 죄를 알게 할 뿐 아니라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09:22).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속죄양으로 이 땅에 대속의 죽음을 위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10:45).  

 

0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탈리아 아시시(Assisi)에서 출생한 성자 프란체스코(Francesco, 1182 ~1226, 10, 03)는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뒤 어느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 주님! 제가 죽기 전에 꼭 두 가지의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먼저 저로 하여금 저의 육체와 영혼이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하게 하시고,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을 사랑하신 뜨거운 사랑을 저의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다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 주위에 십자가는 많이 있지만 진정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의미를 잊어버린 채 사는 것은 아닙니까?십자가 없는 교회는 없지만 진정 십자가 사랑이 살아있는 교회는 얼마나 되겠는지요

교회 종탑이나 제단에 십자가 마크가 선명하지만 나의 마음, 나의 가정, 나의 교회 생활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진정 숨 쉬고 있습니까? 이 시간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뜻을 새롭게 깨달아야만 합니다.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그 사랑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알아야 하며, 동시에 나의 죄악이 얼마나 무섭고 치명적인가를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으니(06:23) 그 십자가에 내가 지은 죄로 인해 내가 달려야 하는 처지였음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고난의 주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깊이 생각하면서 경건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 뉴욕 리버사이드교회에 커다란 종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평소에는 종탑이 높아서 그런지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날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서 교회당 종탑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궁금하여 묻습니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저 십자가를 보십시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았더니 십자가 종탑을 수리하는 사람이 그 십자가에 매달려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십자가를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들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십자가에 매달리는 사람이 있어야 많은 사람이 쳐다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누군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을 때 모두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라벤스부르크에 존재했던 수용소가 있습니다. 잔인한 경비병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친 중노동으로 인해 몸이 허약한 자,  말을 잘 듣지 않는 죄수들을 처형하는 가스실이 있던 곳입니다.

모두 96천여 명의 어린이와 여성이 이곳에서 희생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곳에서 전해지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새겨들을 만한 기도문입니다.주님,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만 기억하지 마시고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들도 기억하소서.

하지만, 그들이 저희에게 준 고통만을 기억하지 마시고, 그 고통으로 인해 저희들이 얻게 된 열매인 우정과 충성심, 겸손함과 용기, 관대함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을 통해 성장한 저희들 마음의 위대함도 생각하소서. 그리하여 마지막 심판 날에 저희가 맺은 이 모든 열매들이 저희에게 고통을 준 그 사람들을 위한용서의 제물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희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자신만 생각하셨다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었으며 고난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었지만 죄인 된 우리를 구원키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생활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을 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