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레토(Vilfredo Pareto, 1848.8.20~1923.7.15)에 주장 된 유명한 파레토의 법칙이 있습니다. 결과물의 80%는 조직의 20%에 의해 생산되어 진다는 법칙인데 이 원리는 이렇습니다.
하루는 파레토가 땅을 보며 개미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보니 모든 개미가 다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세히 보니 열심히 일하지 않는 개미가 하나둘씩 눈에 띄더니 더욱 자세히 보니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개미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아서 그 비율이 약 20:80정도 되었습니다.
그 후 파레토는 그 개미들 중 열심히 일을 하는 개미(20%)만 따로 모아서 일을 시켜보았더니 처음에는 그 20%의 개미가 모두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 20%의 개미 중에서도 일을 하지 않는 개미가 또 생기기 시작합니다.
한참이 지난 결과 그 20%의 개미도 20:80의 비율에 맞춰 일하는 개미와 노는 개미로 나누어졌습니다. 이어서 게으른 개미 80%를 관찰해 뵈니 처음에는 막 놀기만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일을 하더니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역시 20:80의 비율대로 일하는 개미가 되었습니다.
파레토는 자연에서 무슨 법칙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궁금증이 생기자 이번엔 벌통으로 가서 벌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하였더니 그때도 역시 20:80의 비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파레토는 이런 법칙이 사람에게도 일어나는가 하고 확인을 해보았습니다. 우선 풍년이 났을 때 마을에 가보니 정말 풍년이 들어서 곡식이 그득그득한 집은 전체의 약 20%정도였고 나머지 80%는 그럭저럭 잘 거둬드린 편입니다. 또한 흉년이 났을 때도 마을에 가보니, 흉년 때문에 엄청 손해를 본 집은 약 80%였고 거의 영향이 없고 약간 부족하다 싶을 정도의 집이 20%였습니다.
파레토는 이 20:80이라는 비율이 비단 자연세상 뿐 아니라 인간 세상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연구를 하게 되었고 결국 파레토의 법칙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즉 구성원의 20%가 80%의 업무를 하고 있으며, 상위 20%가 전체 80%의 부를 축적하고 있고, 상품 중 20%가 전체의 80% 매출을 올립니다.
이 원리는 교회 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합니다. 전체 중 약 20% 정도만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고 나머지는 그저 그런 대로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이런 법칙이 우리 교회에는 적용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다 믿음의 성숙한 성도가 되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하찮은 동물 나귀가 주님의 일에 쓰임 받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쓰시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주님께서 나귀를 쓰시고자 합니다. |
0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주님은 지금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동시에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3차에 걸쳐 자신이 이미 예고하신 수난과 죽음을 당하기 위해 여리고에서 약 24km의 거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도중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 약 2km정도 떨어진 곳 베다니에서 하루 밤을 보내신 후 다음날 아침 감람산 남동쪽에 위치한 벳바게에 도착하셨습니다. 이 벳바게는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한 마을로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인근 마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주님의 구속 사역의 영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01절을 보면 예수님은 두 제자를 벳바게로 보내지 않습니까? 이는,
①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를 가지러 갔을 때 이미 준비된 나귀를 쉽게 가져옴으로 인해 장래 일을 예견하시는 주님의 신성을 보게 하며,
②예루살렘 성을 평소에는 걸어서 들어가셨던 주님께서 이번에는 나귀를 타고 들어가심으로 인해 슥 09:09절의 예언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바로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하려 하며,
③지금까지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임을 숨겨왔던 것과는 달리 이제 그 사실을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공개하시면서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깨닫게 하고자 함입니다.
0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주가 쓰시겠다 하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주라고 칭하신 것은 성경에 한 번 나오는데 이 칭호는 메시야로서의 신적 속성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한 호칭입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는 이 말씀은 나귀가 메시야이신 주님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소유주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명령어입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 되신 주님의 말씀 앞에 인간이 순복해야 함을 알리기 위해서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제자들에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아마 이 나귀의 주인도 주님의 숨은 제자로서 주님께서 나귀를 쓰시려는 용도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믿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적 차원에서 주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것 아닙니까? 이 나귀 임자 보세요.
이 후의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하니 그저 조건 없이 허락을 합니다. 이런 일은 믿음의 차원, 구원의 감격이 살아있는 영적 차원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어디 세상의 방법, 사람의 생각으로야 가능키나 한 일입니까?
2. 사람은 누구에게 쓰임을 받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
0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누구 밑에서 일하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 에 따라 그 사람의 세상적 가치 기준이 결정되거나 달라지기도 합니다. 의사도 일반 의사보다 대통령의 주치의가 되면 상당한 권한이 부여되어 웬만한 장관 권력 부럽지 않고, 심지어는 운전기사도 대통령을 모시면 목에 상당한 힘을 준다고 하죠.
사람이나 물건은 다 누가 그 사람을 써느냐? 누가 그것을 사용하느냐? 에 따라 그 값이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하찮은 동물 나귀가 주님의 일에 쓰임 받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낍니까? 나도 나귀처럼 주님의 일에 쓰임을 받았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안 듭니까?
교회에서 직분자로 수고하시는 분들 가운데 혹은 에이 그 까짓 것 하면서 그 직분을 시시하게 여기는 분은 안 계십니까? 금년 한 해도 저물고 있습니다. 곧 각 분야에서 일하면서 주님의 일에 온전히 쓰임을 받았습니까? 직분자로서 적어도 하나님, 제가 김해삼일교회에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겠습니다. 라는 굳은 결심 정도는 늘 하고 있어야 합니다.
0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여기 나귀는 벳바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나귀일 겁니다. 뭐 잘생겼다거나 그렇다고 다른 나귀보다 더 큰 것도 아닌 그저 보통 나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나귀가 유명해진 것은 주님에게 쓰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주님께 바로 쓰임을 받는다면 잘난 것 없고,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쓰임을 받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귀한 존재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들이 전에도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신 분들 아닙니까? 그러나 교회에서 쓰임을 받았다 해도 충성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는 세 종류의 꾼이 항상 존재합니다. ①꼭 있어야 할 일꾼 ②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구경꾼 ③교회에 해를 주는 말썽꾸러기 방해꾼입니다.(일꾼, 구경꾼, 방해꾼)
지금까지 믿음생활 하면서 교회에서 나는 어떤 종류의 꾼이었는지를 살펴본다면 믿음 관리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혹시 아니 누가 임명하랬니? 자기들이 마음대로 정해놓고는, 이렇게 말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직분자의 임명은 외적으로는 당회가 결정하고 당회장이 발표를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용하기 위해 저를 통하여 임명한 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므로 따라서 좀 자기 마음에 안 들어도 순종하면서 따라야만 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래서 엡 05: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 복종하라는 말은 얼마나 기분 나쁜 말인지 모릅니다. 누가 감히 귀한 여러분을 함부로 복종하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신앙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에요..
3. 나 자신을 풀어서 주님께 가져와야 합니다. |
0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0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이미 02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고 했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그 나귀를 풀기 위해 갔는데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왜 푸느냐고?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시겠다고 했더니 그대로 허락을 합니다. 얽매여 있는 나귀를 나 자신에 비교하면 어떻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가 얽매어 있습니다. 가정에 얽매어 있고, 직장에 얽매어 있고, 환경에 얽매어 있고, 세상의 여러 고민들에 얽매여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처지를 본다면 교회 일을 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별로 없고,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따른다면 자신을 위한 시간도 모자라 오히려 먹고살기도 바쁜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생명의 주님을 위하여 살려면 자신을 먼저 풀어서 주님께로 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풀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①죄악의 끈을 풀고 ②세상의 끈을 풀고 ③이기주의의 끈을 풀고 ④고집의 끈을 풀어야지 여러 가지의 끈에 꽁 꽁 묶여서는 주님께로 올 수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냥은 안 끊김을 아십시오. 성령님의 검으로 끊어야 비로소 끊기고, 말씀의 검으로 끊어야만 이 단단하고 두꺼운 줄이 끊깁니다. 때로는 구레네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간 것처럼(막 15:21) 우리도 자신을 억지로라도 주님께로 끌고 와야 합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 하면 좀 고집을 꺾을 줄 알고, 양보할 줄도 알며, 자신을 죽일 줄도 알아야지 계속 살아있어서 버티기만 해서야 어디 일이 되겠습니까? 일하는 동기가 주님을 위해서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주장대로 하려는 자세를 버리고 나를 쓰시고자 하는 주님의 뜻대로 따라야만 합니다.
03절 이후를 보면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나귀의 주인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 보내어 줍니다. 왜 보내 줍니까? 사용하고자 하는 분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시간을 두고 심사숙고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사람은 실수 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주님의 일에 사용하시고자 한다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이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시간을 끌다보면 그 틈새에 사탄이 찾아 와서 주님을 향한 나의 생각이나 계획들을 미혹하고 혼동 시켜 일을 그르치게 합니다. 주님의 뜻을 알고도 미루면 손해가 오기 마련입니다.
복음송.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0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여기서 우리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나귀가 주님께 쓰임을 받는데 있어서 핵심 부분은 무리들이 자기들의 옷을 벗어서 나귀의 안장으로 삼고 그 위에 주님께서 타셔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는 겁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하이라이트는 주님을 등에 업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여러분도 주님께 붙잡힌바 되고 쓰임 받기를 원합니까? 주님을 내 등에 모십시오.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오래 전 일입니다. 평안북도 한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부임하여 왔습니다. 온 교인들이 새 목사님이 왔다고 즐거워하며 교회를 섬기고 교회는 활기가 넘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청년들이 교회 마당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한 청년이 볼일이 급하여 화장실에 노크도 안 하고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던 분은 다름 아닌 본 교회 목사님인데 담배를 피며 볼 일을 보는 것이 아닙니까? 안에서도 놀라고 밖에서도 놀랐습니다. 소문이 곧 바로 온 교회에 퍼지면서 교회가 왈칵 뒤집힙니다.
이럴 수가, 목사님이 담배를 피다니, 그러면서 강단에서 설교를 해, 거짓목사, 위선자, 당장 쫓아 보내야 한다고 하면서 그 일로 즉각 제직회가 열렸습니다. 온 제직들이 한 목소리로 저런 가짜목사, 삯꾼목사 당장 보내자고 동의하고 재청하고 일사 천리로 회의가 진행되어 가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아무 말씀 없이 침묵만 지키던 장로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의 뜻을 저도 동의합니다. 목사님을 보냅시다. 담배를 피우는 목사 보내야지요. 하지만 목사님도 가족이 있으시고 집도 없는데 당장 어디로 가며 또 담배 피다 쫓겨난 목사를 어느 교회서 모셔 가겠습니까?
내 생각은 목사님을 담배 끊을 때 까지만 모시다 담배 끊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 합니다. 장로님의 이야기를 듣던 모든 제직들은 그 고고한 신앙과 인격에 감복되어 그렇게 담배 끊을 때 까지만 모시는 것으로 결의 하였습니다.
이제 공은 목사님에게 넘어갔습니다. 당장 쫓겨나지 않아 우선 살길은 얻었는데 다음 주일부터 설교할 일이 난감합니다. 목사님은 고민 끝에 교회에 가서 밤을 새며 기도를 하였는데 기도 하다가 놀라운 성령님의 불을 받으면서 밤새껏 회개하는 중에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일을 맞아 강단에 섰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회개부터 시작 합니다. 여러분, 저는 가짜 목사입니다. 먹고 살기위하여 목사가 된 삯군목사입니다. 그리고 내 죄는 담배 피는 죄뿐 아닌 얼마나 많은 죄를 숨어서 지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중인격자요 위선자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강단을 모독한 죄인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용서해 주세요. 하면서 하는 설교가 아니라 통회를 하는 겁니다.
온 교인들도 감동을 받아 같이 울면서 회개하는 가운데 교회가 성령님의 역사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몇 달 후 장로님이 제직회에서 우리 목사님 이제 담배 끊었으니 결의 한데로 보냅시다. 하였더니 모두가 안 됩니다. 저런 훌륭한 목사님을 어디서 모셔 옵니까. 하면서 붙들기로 하여 그 목사님을 모시고 교회를 잘 섬겼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 쓰임을 받고, 주님께 붙잡힘 바가 되면 우선 교회를 살리고 평안하게 하는 일에 먼저 쓰임을 받게 됩니다. 나 자신을 풀어서 주님께로 가면 그때부터는 교회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쓰임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사용하실 때 온 무리들이 주님께 찬양을 돌렸지만 나귀에게 영광을 돌리지는 않았습니다. 영광을 받으실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0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우리도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사람들입니다. 나는 감추어지고 예수님이 나타나야지 내가 어떻게 주연이 될 수 있습니까? 나의 등에 계신 주님께서 주연이고 나는 그 분을 업고 다니는 엑스트라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니까 자기 때문에 그러는 줄로 착각하면 영 못 봐주는 꼴 볼견의 자리에 듭니다.
주님께서 나를 쓰시겠다고 하시면 언제든지 사용하실 수 있도록 준비된 일꾼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등에 태운 나귀가 성경에 기록되듯이 주님을 등에 태운 성도들은 영원한 생명록에 기록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상급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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