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0년 말씀

나는 세상의 소금입니다.(마 05:013)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0. 9. 11.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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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소금입니다. 왜냐하면 사해(死海)가 있기 때문인데 이 사해는 염분으로 가득 차 있어서 생물이 전혀 살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 들어가면 헤엄을 치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둥둥 뜹니다. 수영을 배우려는 분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겠죠? 몸이 물위로 뜨니까요? 그런데 수영을 하려하면 몸이 물위로 완전히 뜨기 때문에 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헛수고만 한다고 할까요? 그런 염분 기를 가득 머금은 이 사해의 가장 자리에는 소금덩어리가 둥둥 떠다니기 때문에 염분이 많은 사해를 옆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흔하고 값싼 소금에 관하여는 감동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사해 근처에서는 누구든지 소금이 필요하면 그것을 만들기 위한 수고를 할 것도 없이 아무데서나 한 바가지 퍼다가 쓰면 그것으로 족할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산상보훈에서 그 흔한 소금을 비유로 들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크게 웃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비교하기를, 세상의 다이아몬드요, 혹은 세상의 금이요, 혹은 세상의 은이요 하면 몰라도 그렇게도 흔하고 값싼 소금에 비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소금의 기능을 화학적으로 깊게 분석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일반인과 가정주부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상식선 안에서 말씀하셨습니다.주님께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씀을 하셨지만 그런 상식 정도를 교훈하고자 함보다는 이 일반 상식을 영적인 의미로 적용하는 차원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1. 부패 세상에서 방부제 역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군중들은 대부분 갈릴리지역 사람으로서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생활 터전을 일구면서 그 잡은 고기를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소금에 절이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어부들이기도 합니다. 이곳 갈릴리에서 절인 생선은 로마 제국 전체에서도 유명했는데 예수님의 지극히 평범한 이 비유를 들은 사람들은 그 뜻의 일반적인 의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소금이 우리에게 주는 많은 유익 중에서 먼저 부패를 막는 역할을 살펴봅시다. 전기가 발명되지 않은 시절인지라 당연히 냉장고가 없지 않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소금에 절인 물고기가 식용으로 애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소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생선이나 고기에 약간만 뿌려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하는 물질 아닙니까?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 바로 소금이었고 이것이 없이는 생활 자체가 힘들었어요. 이 말씀을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로 옮겨 와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없는 사회, 소금과 같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사라져 버리는 사회, 복음의 빚이 완전히 사라진 현장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스러운 일입니까?

우리나라의 정치 행태로서 여의도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부패지수를 짐작하지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저들이 이제는 소금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부패를 조장하는 사람이 있고 썩는 것을 막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나 물질이 남을 썩게 만드는가 하면 학문이나, 사상이나, 예술도 썩게 합니다.

 

외형적으로는 세상을 부패케 하는 자들이 인기가 있고 썩게 하는 자들이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경우도 더러는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오늘 우리 자신은 과연 썩어 가는 것을 막는 방부제인가? 아니면 썩게 하는 누룩인가를 현재 자기의 위치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믿을 만한 사람, 그 인격이 진실하고 하나님을 향한 자세에 있어서 변질되지 않는 무균질 같은 사람을 가리켜 소금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약속을 할 때 그 약속이 변치 않기를 바랄 때는 소금 언약이라고도 했고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변질되기 쉬운 이 시대에 신실한 약속에 의해 살아가는 소금과 같은 존재를 요구하실 때 아멘으로 말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인격과 됨됨이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을 하나님은 복되다고 말씀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공동체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참여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입니다. 오늘의 현실, 이 시대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암담하면 암담할수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생각하여야 할 때 인줄 아십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로 인해 이 사회가 썩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2. 조미료 역할을 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소금의 역할은 영적 차원에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 신앙인들이 방부제 역할 다음으로 조미료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소금이란 그 자체가 녹아 스며듦으로 맛을 내듯이 성도의 삶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복음의 희생과 수고를 함으로 맛 갈 있는 사회로 만들어 갑니다.

교회 밖에 사람들을 보십시오. 삶의 의미를 잃고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인생의 행복을 모르고 허무와 허탈 속에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성도 여러분! 소금으로서의 가치를 나타내는 조미료와 같은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사랑을 가지고 살며, 선을 가지고 살며, 정의를 가지고 살며, 진리를 가지고 살며, 부지런함을 가지고 살며, 희생함으로 곳곳에 녹아 들어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녹지 않으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요? 자신은 기어코 녹아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분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자기 이름, 자기 견해, 자기주장, 자기 생각 속에 항상 꽁꽁 묶여 있으면서 정말 녹지 않으려 합니다.

내가 신앙인으로서 음식에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이 생활하면서 진정 이웃에게 인정받는 삶, 맛을 내는 삶인가를 확인하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소속한 기관이나 공적인 단체에서 빠져 버릴 때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 가를 살펴보시면 됩니다.

나는 꼭 요구되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없어도 에이, 그 사람 잘 없어 졌어 하면서 기피하는 인물이거나 혹 무관심의 인물이 아닌가로 말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살맛을 나게 해 주십시오. 야! 저 사람 매력 있다, 저 사람 보면 생기가 돋는다, 정말 멋있는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말을 계속 들으면서 삽니까?
그리고 내가 만나고 접촉하는 사람들로부터 혹 이런 말을 직접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 이 믿는 예수님을 나도 믿고 싶습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님, 당신의 삶을 그렇게 생동감 있게 만드는 그 예수님을 이제 나도 믿고 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는 사람이 바로 소금으로서의 가치를 나타내는 사람 아닙니까?

또 누군가가 내게 찾아와서 당신이 믿는 그 예수님을 나도 알고 싶은데 내게 그 분을 좀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는 현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부러 자신의 삶을 다르게 살려고 애써서 꾸미는 가식적인 모습은 불신자들의 눈에 비칠 때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행동인 만큼 그렇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면 됩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것처럼 인생을 사십시오.
그러면서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 삶을 관찰할 때에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어떠한 매력과 향기, 아름다움과 삶의 독특한 맛이 내 삶을 형성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여기서 주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어떤 행위를 통해서, 혹은 삶을 통해서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우리가 신앙의 참 맛을 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라면 내 도덕적 형편과 내 신앙의 상태가 어떤 자리에 놓여 있든지 간에 이미 소금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나는 얼마만큼 더 소금다운 소금인가? 나는 어떠한 종류의 그리스도인인가? 맛을 발하는 그리스도인인가? 맛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인가? 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내가 맛 갈 나는 사람, 맛 갈 나는 인생, 맛 갈 나는 신앙인이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 때문에 남편이 살맛이 난다고 합니까? 여러분이 있음으로 아내가 살맛을 느끼며, 여러분이 있음으로 부모님이 살맛나고, 여러분이 있음으로 자녀가 살맛난다고 합니까?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도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살맛나게 해야지 다른 사람으로 인해 즐거움을 찾고 누리려 마세요. 그러면 시험에 듭니다.

 

목회자가 찾는 소금 같은 일꾼이 되면 어떨까요? 저는 매년 각 기관 총회를 마친 후에 신임 임원을 보고 받을 때 그 명단에서 소금 같은 사람이 있는가를 유심히 봅니다. 그런데 때로는 염려될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분이 과연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진정 소금 같은 일꾼인가? 하는 의문점이 생기기 때문이에요. 소금은 그 맛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3. 소금의 가치를 잃어버리면 밖에 버려집니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
쓰던 대부분의 소금은 전남 신안군의 천일염처럼 바닷물을 증발시켜 얻은 것이 아니라 바위소금(암염) 즉 캐는 소금이거나 혹은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소금입니다.
그러다 보니 불순물이 더러 혼합되어 있기도 했고, 또 여러 가지 광물질이 섞여 있어서 빗방울이 떨어져 빗물과 섞이면 소금 맛이 없어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바람에 노출이 되고 태양 빛을 받으면 소금의 짠맛이 사라지는 경우도 흔히 있었습니다. 이렇게 변질 된 소금,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리 많이 있어도 사용처가 없어서 길거리나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졌습니다.

혹 지붕에 뿌리게 되면 이 맛 잃은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누수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죠? 그리고 지붕은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소금은 결국 사람에게 짓밟히는 경우가 되는 것처럼 맛 잃은 신앙인도 이렇게 밟히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말입니다. 혹 내가 그 맛을 잃어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 당하는 불쌍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아닙니까? 이제라도 회개하고 소금의 맛을 회복합시다. 그러면 이 세상은 조용히, 그리고 분명 새롭게 변화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바닷물에는 약 3.5%의 소금이 들어있습니다. 이 3.5%의 소금으로 인해 지구상의 모든 바다가 썩지 않고 각종 어류와 해초가 살아가는 터전이 됩니다. 거기 비하면 우리나라는 전 국민의 15% 정도가 기독교인입니다. 놀라운 일이죠?
엄청난 영향력을 우리 사회에 끼치고도 남을 비율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연, 기독교인들이 우리 사회에 신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이 사회의 부패를 방지하는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옛날 유대교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습관이 있었습니다. 신앙을 버리고 타락했던 사람이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로 하여금 회당문 앞에 엎드리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위를 밟고 지나가게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큰 소리로 이렇게 소리를 외칩니다.
나는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나를 밟고 지나가십시오. 우리 가운데 이렇게 소리쳐야 할 사람은 없는지요. 함께 점검해 봅시다. 이런 일은 사명을 망각하는 자에 대한 실제적이고도 심각한 경계를 주는 의식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일부러 자신의 삶을 다르게 살려고 애써서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평범한 인생으로 사십시오. 소금 고유의 그 맛을 잃지 않고서 말입니다.

 

소금은 본래 고대의 종교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02:13), 하나님과의 영원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는 것이었습니다(민 18:19).

민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직장인은 월 중에 월급을 받게
되는데 월급 때마다 그 감격이 얼마나 큽니까? 그 월급을 영어로는 샐러리(salary)라고 하고 월급 받는 사람을 샐러리맨(salary man)이라 합니다. 샐러리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솔트 머니(salt money) 곧 소금 돈이라는 말인데 한 달을 일하면서 이런 일도 보고, 저런 일도 겪고,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있고 일하는 것이 지겨울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고생 끝에 받는 월급이기에 가치 있는 소금 돈이라는 말입니다.

 

그 월급이 귀하다는 말이죠? 성도의 사회적인 생활도 소금처럼 귀하게 그리고 가치 있게 또 품위 있게 하여야 됩니다. 선한 것, 선해지는 것은 참 쉽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고, 남의 마음 아프지 않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내가 상처 안주고 상처 안 받는 것으로 족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싸매면서 소금의 역할을 능히 감당하는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교회 장로이고, 현역 국회의원 가운데 약 35% 정도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사회가 이처럼 부패한 것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는 말씀 앞에 자신을 점검하면서 세상에서 영적 차원의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