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미국의 어떤 믿음의 부부가 아들과 함께 서커스 구경을 갔습니다. 아주 어려운 시절인지라 큰 맘 먹지 않고는 갈수 없는 때였습니다. 줄을 서서 표를 사려고 하는데 마침 줄 앞에 8명의 자녀를 데리고 와서 줄을 선 어느 흑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가족들도 모처럼 온 가족이 서커스 구경을 왔는지 아버지 어머니는 자식들 앞에 당당히 서 있었고 자식들은 서커스 구경을 할 것에 대해 흥분해 있었습니다. 이제 순서가 되어 앞에 있는 그 가정의 남편이 표를 사려는데 갑자기 얼굴이 굳어집니다.
돈이 모자라는 겁니다. 입장권이 이렇게 비싼 줄은 생각 못한 것이죠. 그때 뒤에 서있던 믿음의 부부 남편이 눈치를 채고는 얼른 호주머니에서 20달러짜리를 꺼내 그 당황해 하는 아버지 앞에 가서 땅에서 줍는 것처럼 말합니다.
선생님 이 돈이 여기 떨어져 있군요. 선생님 돈을 이렇게 흘리시면 어쩝니까? 하면서 그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때 앞에 선 흑인 아빠는 눈치를 채고는, 고맙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표를 사서 서커스 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날 그 뒤에 섰던 믿음의 부부는 서커스 구경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서커스를 본 것 보다는 더 기쁨이 차고 넘쳤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이 시간이든지, 물질이든지, 힘이든지, 재능이든지, 기술이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섬기는 자세로 활용할 때 비로소 성숙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것 보다 섬김 받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혹 밤이나 낮이나 계속적으로 섬김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성숙하지 못한 바로 갓난아기입니다.
이 갓난아기는 늘 섬겨 주어야 하는데 엄마의 섬김, 아빠의 섬김, 언니의 섬김, 할머니의 섬김 등 항상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날마다 꼼짝도 못하고 드러누워서 먹여 달라, 입혀 달라, 기저귀 갈아 달라, 심지어는 자다가 깨어서도 어머니의 섬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데 비해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숙한 성도들은 섬김 받기보다는 섬기는 생활을 합니다.
1. 섬기는 자가 큰 사람입니다. |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크고자 하는 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44). 일종의 히브리인들의 용법으로서 같은 내용을 반복함으로 그 뜻을 강조합니다. 크다, 으뜸이 되다, 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사람들 속에서 좀 돋보이고자 한다는 뜻이겠지요. 이 말씀은 제자들 사이에 서로 누가 크냐? 하며 논쟁과 다툼이 일어났을 때 이미 주셨습니다.
막 0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43절에서 섬기는 자는 집사로 번역되었고(딤전 03:08), 44절의 종은 당시의 노예제도에서 이해되어야 할 용어입니다. 즉 큰 사람, 으뜸이 되는 사람이란 노예의 위치에서 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42절에서 집권자들을 말씀하셨는데 이들은 섬김을 받는 사람들로서 바깥 사회에서 언제나 나를 섬기라고 호령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데리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을 섬겨 주는가를 기준으로 해서 그 사람의 높음을 대개 결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높임을 받는 사람은 자기를 섬기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데리고 있는가? 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합니다.
어떤 사람이 위대한 사업가입니까? 아무래도 많은 손님을 섬기는 사람일 것이며, 또 누가 성공한 사람입니까? 역시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에도 낮아진 마음과 섬기는 자세로 일을 한다면 그 일은 대단한 가치가 있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래 전에 서울 할렐루야교회 성도 가운데 양복을 만드는 집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상당히 성공한 분으로서 많은 사람이 애용을 하였는데 그분이 쓴 간증집에 보면, 손님의 옷을 주문 받아 맞출 때 항상 예수님의 옷을 맞추듯이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태도를 배운 사람과 안 배운 사람은 삶의 질이 다릅니다. 섬긴다는 것이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성숙하고 고상한 삶이라면, 성도 여러분은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섬김을 받으면서 살아 왔습니까? 아니면 여러 사람을 섬기면서 살아 왔습니까? 섬김을 받는 사람은 조금만 서비스가 모자라면 불평을 하지만 종의 위치에서 섬기는 사람은 좀 잘 못 되어도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법칙에서 가능한 역설적 축복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볼까요? 크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라. 으뜸 되고자 하면 종의 자리에 들어가라. 받으려고 하면 먼저 주어라. 낮아지면 높아지리라. 죽으면 살리라. 신앙인의 삶은 높아도 낮은 자같이 있어도 없는 자같이 부해도 겸손한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섬김을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을 섬기러 오신 일이며, 섬김의 최고봉은 자신의 몸을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표가 그러할진대 그 섬김은 우리에게 얼마나 고상한 삶의 목표가 되겠습니까?
사업을 해도 손님을 잘 섬기고, 선생님을 해도 학생들을 잘 섬기고, 다른 어떤 일을 해도 섬기는 태도로 한다면 아마 좋은 일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선한 일을 하는 데는 끝이 없으며 얼마든지 일을 찾아서 유익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만 없으면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선행을 하지 않습니까? 선행을 하고 나팔을 불어도 누가 잘 알아주지 않거나 칭찬을 해 주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섬김이 나타나겠습니까? 섬김은 가장 고상한 삶이며 예수님의 삶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갈 0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바울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했는데 좀 고상하게 표현해서 섬긴다는 의미이지 사실은 종노릇을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이라는 말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체통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종으로서 섬기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아십니까? 성경은 종이라는 단어로 가득 차 있는데 모세, 사무엘, 바울은 자신을 놓고 종이라고 했으며 주님 자신도 45절에서 내가 섬기러 왔노라고 종의 자리를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은 앉아서 섬김을 받는 사람들을 크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다니면서 섬기는 그 사람을 크게 보십니다. 알고 보면 신앙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만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사람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요.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고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 거기에 맞게 섬겨 주는 사람은 언제든지 만나고 싶지만, 항상 목을 곧게 하여 섬김을 받으려 하는 사람은 기피 대상입니다. 한쪽만 계속해서 섬기면 결국은 피곤의 자리에 들잖습니까? 그래서 서로 서로 섬기는 겁니다.
남편들께서 부엌에 들어가서 설거지를 합니까? 요즘은 누구나 하겠지만(?) 한 삼십 년 전만 해도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일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여자 분들이 놀랠 정도로 한 번 섬겨 보십시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늘 섬김을 받는 사람은 아이들이고 어른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서로서로 섬기라고 했으니 믿는 우리는 남자들도, 어른들도, 아이들도 모두가 섬기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특히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기는 모습도 보여야 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어느날 한 어린이의 상처를 지극한 정성으로 치료해 주고 있을 때였습니다. 인근에 살던 주민이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십니까? 이런 삶에 만족하십니까? 이때 테레사 수녀가 답하기를,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옆이나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
3. 섬기는 자는 자기만이 누리는 복이 있습니다. |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주님은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그 현장에 축복이 열린다고 말씀합니다. 섬기는 사람이 계속 섬기는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섬김으로 오는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며, 섬기는 일이야말로 예수님의 뜻을 받드는 삶입니다.
주님을 섬기듯 성도를 섬기고, 가족도 섬기고, 이웃도 섬긴다면 그 곳엔 삶의 기쁨이 넘치겠지만 섬김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섬긴다면 때로는 그 섬김 때문에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무 때문이 아니라 내가 자원해서 섬기는 일을 할 때 얼마나 마음이 즐겁습니까?
섬기는 사람은 자기만이 누리는 은혜와 복이 따릅니다. 자기의 몸도, 마음도, 시간도, 재능도, 물질도 남을 섬기는 마음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모르는 하늘의 기쁨을 맛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섬기고 나누는 것에 인색합니다. 왜 일까요? 나눔을 물질의 손실로 보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말을 나눈다든지, 온유한 눈길을 나눈다든지, 함께 기쁨을 나누거나 함께 아픔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섬김 아닙니까?
직장에서도 나에게 맡겨진 일만 겨우 해 놓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손대지 못하는 것들을 동료들을 위해 섬기는 태도로 일 할 때 모두가 나에게 호감을 가질 겁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풍족케 해 주고 돌보아 주는 직장인이 되어질 때 여러분은 직장에서 인정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학교, 학신회 교사로 지원해 보십시오. 얼마든지 어린 후배들을 섬길 일이 될 것이며 그 섬김에는 자신만이 누리는 기쁨이 따릅니다. 성도 여러분, 섬김이 너무도 격조 높은 것이라 여겨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섬기는 자는 특별한 사람, 이를 테면 중직자 같은 분들이나 하는 것이라 여깁니까? 우리 모두는 섬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굳게 작정하십시오. 섬김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상대방을 위하여 행동하는 의지(Will)와 수고(Working) 행동(Doing)입니다. 자신의 물질, 재능, 건강, 시간 등을 가지고 상대방을 위하여 사용하는 거룩한 희생 이것이 진정한 섬김이며 삶의 의미이며 더없는 가치입니다.
우리 교회도 섬김의 멋을 아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감격함으로,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자원하여 주님이 힘을 주셔서 하는 것으로 알고 섬겨나가는 생활이야말로 진정한 섬김(디아코니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벧전 05:0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비바람이 몹시 치던 어느날 새벽 1시경에 필라델피아의 조그마한 호텔 로비에 한 노부부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여기 방 하나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웨이터가 객실은 다 차 있습니다. 이 도시 어느 곳에 가도 숙박할 곳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 방을 비워드리겠습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다음날 아침 노부부는 숙박비를 지불하면서 당신은 미국에서 제일 좋은 호텔 사장이 되어야 할 경영자로군요. 언젠가는 당신을 위해서 호텔을 하나 지어드리지요. 이 말을 듣고 웨이터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어느날 이 사람에게 뉴욕으로 와 달라는 편지와 함께 비행기 티켓이 배달되었습니다. 그는 곧 뉴욕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대리석으로 거대하게 지어진 시내의 한 호텔로 인도되자 그 곳에는 2년 전에 그가 친절하게 맞이했던 노인이 서 있습니다. 그 노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저것은 당신이 경영하도록 내가 지은 호텔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 노인은 월리엄 왈돌프 아스토였습니다. 호텔 이름 역시 당대에 유명한 왈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입니다. 그리고 이 호텔의 경영자로 초대되어 온 이 사람은 조지 C. 볼트입니다. 한 번 베푼 그 섬김이 성공의 길을 가게 합니다.
내가 편할 때, 그 누군가가 불편함을 견디고 있으며, 내가 조금 불편할 때 누군가는 편안할 것 아닐까요? 섬김과 사랑은 언제나 함께 를 앞세웁니다. 함께 대화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희망을 공유하고, 함께 슬픔을 나누고, 함께 행복을 누립니다.
선글라스가 필요한 계절입니다. 검정색을 사용하면 온 세상이 검게 보이고, 밤색을 사용하면 밤색으로, 푸른색을 사용하면 파랗게 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바로 예수님 안경입니다. 예수님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아야 섬김의 현장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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