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0년 말씀

서로 받아들이며 삽시다.(롬 15:01~0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0. 5. 1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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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집사 부부가 부부 싸움을 하고는 저녁을 먹을 시간인데 부인이 화가 나서 그만 밥도 안 짓고 건넛방으로 가서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저녁을 못 얻어먹은 남편과 아이들이 문 앞에 가서 문 좀 열어 달라고 사정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문득 자기 아내가 교회에서 제자 훈련받으며 성경 구절 암송하던 것에 착안하여 문 앞에서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낭독했습니다.

 

0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잠시 후 이 말씀에 대한 답신이 방 안에서 나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05). 결국, 이 부부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는 나와서 밥을 지으면서 일상의 생활을 잘 누리게 되었습니다.

말로서는 쉽지만, 행동으로는 쉽지 않은 갈등 요인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간에 받아들이느냐? 않느냐의 일입니다. 겉으로 표시는 내지 않지만, 은연중에 상대방을 냉대하고 비판하는 일은 그 느낌이 상대에게 전달됩니다. 그때 상대방은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하여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받아들이기 쉬우나 까다롭게 여겨지는 이웃이나 의견 차이가 심한 동료들, 혹은 삶의 모습이 전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사람의 노력으로 극복하기 힘든 문제가 더러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만날 때에 우리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하여 안내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서로 받아들이며 삽시다. 로 정했습니다.

 

 

 1.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여야 합니다.

 

0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친히 담당해 주신 주님처럼 우리도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권합니다. 그렇다고 불의를 못 본 체하거나 잘못을 덮어 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를 한 번도 용납하신 적이 없으시되 죄인은 용납하셨으며, 죄인에게는 위로하고 격려하여 죄에서 떠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적절한 충고는 사람을 격려하고, 도와주고, 살려 주지만 독선을 일삼는 비판은 사람을 죽이고 파괴하는 독침(毒針)과도 같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어떤 약점까지 담당하셨습니까?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여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내가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한다는 말에는 상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까지 들어있습니다.

남에게 말 못 할 고민과 허물로 고통받는 사람이 주변에 있습니까? 비판하기보다 치유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회복의 자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비판은 나와 상대방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커버한다는 말은 상대방을 회복의 자리에까지 세우는 수고를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의 잘못을 하나 찾았다 싶으면, 좋다 싶어서 마음대로 요리하여 정죄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믿음은 병든 믿음이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말을 잘 안 합니다. 상대방의 허점이나 실수만을 꼬집는 사람은 스스로 의로운 채 끊임없이 자기방어는 능숙합니다. 사실 이웃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보다 재미있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미있는 일을 주님은 원하지 않습니다.

비판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잘못을 놓고 비판한다고 합시다. 그 비판이 어떤 유익을 가져오겠습니까? 상대방에게도, 자신에게도 해가 될 뿐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비판하는 사람과 비판받는 사람의 관계는 계속 멀어지는 사이입니다. 우리는 비판의 안목이 아니라 치료의 자세를 가지고 상대방의 약한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어떤 허물이라도 그 약점을 내가 담당하겠다는 각오로 나아가면 그 사람을 얼마든지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기는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의로운 척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가 단절될 수 있습니다.

 

 

 2. 인간관계를 푸는 열쇠는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0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05절을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서라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특성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특성이 뭡니까? 17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무슨 말입니까? 제자들이 하나로서 뜻을 맞추어야 할 것을 특별히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05절을 다시 보십시오. 서로 뜻이 같게 해 달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뜻을 따라 서로 일치된 정신, 같은 확신과 같은 생각으로 살라는 권면입니다

죄의 문제가 아닌 일에 대해서는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뜻을 맞추라는 말입니다. 뜻을 맞춘다는 것은 죄의 문제가 아닌 다른 사소한 모든 문제에 관해서는 내가 넓은 마음으로 관용하고 용납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02:0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우리가 이웃을 대할 때 결정적으로 죄와 관련되지 않은 문제라면 상대방을 너그러이 용납하고 뜻을 맞출 줄 아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인들, 어쩌면 우리 김삼일 가족들이 오히려 용납을 잘못하는 것 같고 뜻도 잘 맞추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우리 김삼일 가족은 양보도 하시고, 관용도 하십시오. 또 뜻도 맞추며 살기를 바랍니다.

 

성 어거스틴. 본질에 관해서는 항상 일치를, 그러나 비본질에 관해서는 항상 관용을,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우리가 믿는 교리는 본질 요소가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교리들 예를 들자면 삼위일체,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돌아가심, 부활, 재림, 그리스도의 신성 등입니다 이런 것은 항상 일치해야 할 본질 교리이며 이외의 것은 상황에 따라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탄력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는 교인이 술 담배 하는 일로서 주초(酒草)가 몸에 나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인이 술 담배를 했다고 그 사람을 아주 신앙이 안 좋은 사람으로 욕하지 마십시오.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술 담배 하는 자는 구원 못 받는다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술 담배를 해도 좋다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본질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잘 못 알아듣고 오해를 할까 봐 제가 심히 마음에 부담됩니다. 더욱 용기를 낼까 말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초점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모여 예배드릴 때 가끔은 악기를 연주하며 찬양하고 율동을 할 때 나이 든 세대 소위 경건 파에서는 이해 못 할 부분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대 차이, 문화 차이가 나는 것뿐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이런 것들은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죄의 문제가 아닌 신앙의 본질과 상관없는 일은 관용하면서 오직 주님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거기에 관심을 두자는 말입니다.

 

 

 3. 공동체는 상대방을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0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예수님은 우리의 인격을 그대로 존중해 주시면서 우리의 온갖 죄와 허물이 가득함에도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인 나를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셨음은 그만큼 나를 소중한 대상으로 인정해 주신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심은 우리가 대단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우리를 조건 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용납하셨다는 것이 중요함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일명 탕자의 비유(15:11~24) 잘 아시지요


아버지가 돌아온 작은 아들 탕자에게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너를 받아들일 수 없다. 당장 잘못했다고 빌지 못할까? 하며 큰소리를 쳤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조건 없이 미리 용서해 놓고 기다렸기 때문에,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러자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용서해 주셨음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이렇게 죄를 고백합니다.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림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한 아들의 자세를 보십시오.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 그런 데도 있는 모습 그대로 조건 없이 아들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여기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탕자는 집에 돌아가서 아들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어디 생각이나 했습니까? 그저 아버지가 품꾼의 하나로만 써 주셔도 좋겠다는 실낱같은 희망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마자 달려 나와 입 맞추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라며 새 옷에다 새 신발로 단장을 시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고 그것도 모자라 살찐 송아지까지 잡아 잔치를 열어 주셨습니다(22). 이런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 조건 없는 용납이라고 말합니다.

 

인간관계는 내 마음이 날카로운 칼이면 상대방은 철판으로 방어를 할 터이고 내 마음이 날아가는 화살이라면 상대방은 방패로 응수할 겁니다.  내 마음이 햇살처럼 부드러우면 상대방은 가슴을 열고 햇볕을 쬐겠지만 내 마음이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이라면 상대방은 추워서 마음의 문을 꽁꽁 닫을 것입니다.

내 마음 쓰기에 따라 상대방의 마음도 조절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무조건으로 받아 주셨으니 우리도 이웃을 대할 때 역시 아무 무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웃과 좀 껄끄러운 관계에 있어도, 다른 점이 있어도, 하는 짓이 괘씸해도 그들을 받아 주어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나와 같은 사람, 주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행동과 혀는 간사하여서 금방 좋아한다고 말하고서 돌아서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03:0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0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사람의 혀는 참으로 위험한 물건이지 않습니까?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사람을 저주하기도 하는 야누스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혀에 들어있는 독소가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상대방을 어떻게 피곤하게 할지 모릅니다. 살다 보면 마음에 안 드는 사람, 괴로운 사람이 혹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저 사람도 하나님이 지으신 분이야 하는 긍정의 생각을 가집시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그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조건 없이 받아들인 사람을 우리도 편견 없이 받아들이며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해서는 아니 될 일이지만 그만 어느 장로가 부부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 싸움을 하고 난 뒤의 일이 상당히 멋있습니다. 부부 싸움을 하고 난 뒤 남편이 화가 나서 집을 나가자 부인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어서 돌아오오. 하면서 찬송가 527장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밖에 나가서 화를 다 푼 남편이 멀리멀리 갔더니(387) 를 부르면서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면 아내는 처량하고 곤하며 이렇게 답송을 부르고 문을 열어 줍니다.

 

0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심 같이 주변의 많은 사람이 나를 무시하고 거절하고 밀어내고 소외시켰을지라도 나는 외롭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다는 용기와 힘을 얻읍시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받은 것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지는 체험을 했다면 이 사실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우리도 있는 모습 그대로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