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20일 정부는 천안함 침몰사건을 북한 소행이라고 소상히 밝혔습니다. 다음날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한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함 사태를 북한의 군사도발로 규정하고 정부의 단호한 대응을 지시했습니다(5월 21일). 국제공조 강화방안과 군 대비태세, 그리고 남북관계와 국가 신인도 관리, 사이버 테러를 포함한 북한의 비대칭 위협에 대비한 국가 대비태세 등이 집중 논의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국민들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정밀타격의 보복이라도 해주면 스트레스가 확 풀릴 것 같은 그런 상황에 직면에 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천안함 침몰이 북 소행이라도 한국정부가 같은 방식의 보복을 하는 걸 원치는 않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자국 군인들이 희생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만 큰 소리를 뻥뻥 쳐 대는데 이는 액션이라도 취해야만 한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에서 살려는 것은 인류의 영원한 소망입니다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전쟁의 위협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에 의해 무기는 계속 발전되어 왔고 현대의 최첨단 과학이 뒷받침한 전쟁 상황은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차원에까지 도달해 있습니다.
우리는 폭력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먼저 인도의 큰 혼(魂)으로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1869,10,2~1948,1,30)의 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간디는 대영 제국의 식민지 정책으로부터 인도를 독립시키려 할 때 폭력을 배제하고 사랑과 진리로 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칼을 가진 사람에 대항하여 진리와 사랑으로 싸우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받은 간디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했습니다. 폭력으로 얻은 승리는 폭력으로 망할 따름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조국 인도에 영혼의 승리를 안겨 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힘을 믿어야만 합니다.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의 섭리에 근거한 거룩한 전쟁을 제외하고는 어떤 유형의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일부 진보적 신학자들의 성경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사상을 대할 때는 심히도 우려가 됩니다.우리는 우리나라의 현 시점과 세계전쟁 속에서 비폭력 운동의 근원이며 간디의 근본정신이기도 했던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1. 극한 상황일수록 한 발자국 물러서서 보아야 합니다. |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노예 한 사람의 가격에 해당하는 은 30에 팔기로 작정한 후 무리를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왔습니다. 이때 위기의식을 느낀 베드로가 주님을 위한 충정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리자 예수님께서 그의 귀를 만져 붙여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체포하러 온 병정의 귀를 쳐서 떨어뜨린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타이르신 말씀을 평행본문 누가복음으로 제가 읽어드립니다.
눅 22: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은 아무래도 자기 목숨 아니겠습니까?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비폭력만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사실 비폭력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의미는 대단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면을 상기시키지 않습니까? 주님은 본문 말씀을 통해 칼을 쓰지 않는 중요성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어떻게 따라가야 할 것인지를 일러주시고 하십니다.
히 12:0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히브리서 기자처럼 우리는 목숨이 위태로운 현장을 만날 때 그리스도인답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스타일대로 한 발자국 물러서서 상황을 직시한다면 이 또한 삶의 지혜 아닐까요?
한국인의 여러 기질 가운데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특성 하나가 참지 못하는 성급함입니다. 빨리 빨리, 급하다 급해, 물론 바쁜 세상에 빨리 빨리 행동해야죠? 그러나 물러설 때는 물러서야 하고, 기다려야 할 때는 참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하며, 이것까지 참으라 하신 말씀 앞에서는 조급해 말고 참아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세계의 인종들이 다 모여 사는 곳이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그 수많은 인종들 가운데서 한국 사람을 구별해 내는 일은 무척이나 쉽다고 합니다. 어떻게 구별하느냐고요? 얼굴에 한국인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지는 않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 가운데 참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는 사람을 찾으면 틀림없다고 합니다. 인내가 부족한 사람을 찾으면 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항상 조급하여 인내가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에게 지금 즉시 인내를 주십시오. 좋은 기도같이 여겨집니까? 하나님께서 인내를 주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기도하면서도 지금 당장 인내심을 달라는 것인데 그런다고 즉시 됩니까?
그만한 노력과 각오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쉽게 출세하고 성공하기를 원하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은 일절 무시하고 좋은 결과만을 기대합니다. 이런 의식들 덕분에 오늘날 한국 경제가 초고속으로 성장을 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서 우리의 인격은 파괴당하고 올바른 삶의 태도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의 진행과 과정을 중요시해야 하는데 우리는 계속 그 과정을 무시한 대가로 어쩌면 오늘날 발전하고도 부끄러운 모습의 민족이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은 사랑을 본으로 보여주십니다. |
눅 22: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예수님은 자기를 체포하러 온 사람 앞에서도 참고 인내하시며, 베드로에겐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면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낫게 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적이었음에도 사랑하여 주셨고, 말로만 원수를 사랑하라고 않으시고 직접 행동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원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일러 주신 아가페라는 사랑의 단어를 익히고 실천하여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아가페의 의미는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의 이익을 구한다는 의미이죠? 사랑은 구체적인 친절과 수고이어야 하며, 나를 박해하며 못살게 굴고, 나에게 심각한 손해나 피해를 입힌 사람에 대해서도 조건 없이 구체적인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있어야 합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는 사실 사랑이 부족합니다. 원수가 생존의 위협을 당할 때 그를 도와주는 것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참 사랑일진대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원수 같은 자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김해삼일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도전의 메시지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인 관심과 친절과 수고가 따라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타인을 위해 공생애를 사신 분으로 자신을 체포하려는 대제사장의 종에게까지 자상한 관심을 가져 주셨습니다. 그 종이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어서 입니까? 아닙니다. 보잘 것 없는 종, 사람들의 관심권 밖에 있는 그저 종이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시고 자비를 베푸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십자가에서도 이러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고, 야유하고, 침을 뱉는 무리를 보시면서 기도하시기를,
눅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한 강도가 회개하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시며 최후의 순간까지 영혼 구원에 힘쓰셨고 마지막 피 한 방울을 흘리시면서 까지 자기 자신이 아닌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영국의 목사님 한 분이 불치의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신(化身)이라면서 헌금을 하면 고쳐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그 존경받는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예수님의 화신이라고요? 그렇다면 당신의 손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 당신의 손에 못 자국이 있나 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옆구리에 창에 찔린 상처가 있나 보고 싶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은 나를 위해 못 자국을 남기셨으며 나를 위해 상처받은 그 주님이 아니고는 아무도 나를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어야지 어떤 명목의 대가를 바란다면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사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전 13:0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3. 사람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합니다. |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한 군단은 약 육천 명으로 구성된 로마 군대의 편성 단위로서 예수님께서 살려고 하셨다면 최소한 7만 2천 이상의 천사를 동원해서 얼마든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칼을 쓰지 않으시고 순순히 십자가로 가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음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십자가의 죽음은 본래 하나님의 구원사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당연히 져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구약의 엘리야처럼(왕하 01:09~12) 하늘의 불을 내려 다 태워 없애 버린다면 이것은 얼마나 멋진 힘의 과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의 힘을 과시할 것인가? 나를 욕되게 하고 있는 저 사람들을 어떻게 벌을 줄 것인가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여야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는 말입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때로는 욕을 먹고 손해를 볼 때 분노와 앙갚음 할 생각을 하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엎드리고 순종할 마음을 갖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영국의 유명한 장군이며 정치가이고 수상까지 역임한 바 있는 크롬웰은 인기와 권력의 정상에서 하루아침에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나는 이제 내 시골 교회당에 돌아가서 말씀을 가리키며 주님을 섬기고 싶습니다.
아니 수상 각하! 각하는 아직도 힘이 있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왜 떠나려고 하십니까? 나는 환상을 좇지 않고 주님의 뜻을 좇고자 합니다.
권력을 붙들고 있는 것,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 그것은 크롬웰에게 환상 같은 것으로 보였기에 모두 떨쳐버리고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찾았던 겁니다. 혹 여러분이 추구하고 있는 권력과, 야망과, 성공 바로 건너편에 어쩌면 우리 인격을 깨뜨리는 영혼의 파멸이라는 절벽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 환상을 좇다가 정말 중요한 삶의 자세를 잃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환상을 좇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까?
요일 0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성도 여러분은 어떤 상황 가운데 살고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고민하게 만듭니까? 현재 이 상황에서 내가 받는 상처를 중심으로 고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간구하십시오. 이것이 십자가의 본래 뜻입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길목에 서 있을 때 우리의 삶은 넘치는 기쁨과 넘치는 은혜와 큰 변화를 맛볼 것입니다.
김해삼일교회에 소속한 성도 여러분은 오늘이라는 역사의 현장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까이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웃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맨해튼에 위치한 국제 연합 본부 랄프 분체(Ralph Bunche) 공원의 비문에 이런 성경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 02:0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요즘은 폭력이라는 말이 다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가정 폭력, 학교 폭력, 성 폭력, 심리적 폭력, 인터넷 폭력, 사이버테러 등 폭력의 종류가 수도 없이 많은데 이러한 폭력들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사회악에 해당하는 범죄의 일은 단호히 대처하되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된 프로그램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대로 순종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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