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막바지 미국이 「일본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당신 본인이나 친형제 혹은 친구의 목숨을 보전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도움을 바란다면 이 전단지를 읽으십시오. 수일 내로 이 전단지에 적힌 12개 도시의 군사 표적과 군용품을 생산하는 공장에 미군 비행기가 날아와 폭격할 것입니다.
폭탄에는 눈이 없으므로 어디로 떨어질지 모릅니다. 이렇게 해서 민군은 폭격을 감행하기 몇 달 전부터 총 6,300만 장의 전단지입니다.
조금만 눈여겨봐도 이해될 정도로 어디 어디에서 퇴각하라는 말도 자세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미군은 원자폭탄의 위력에 대하여 설명한 장문의 전단지도 따로 제작해서 1945년 8월 3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뿌렸습니다.
그 위력은 모든 것을 태우고 건물들도 날려 버릴 것입니다. 시민들은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빨리 오십 리 밖으로 몸을 피하십시오. 라는 경고입니다.
그러자 시민들은 미국이 떨어뜨린다는 원자폭탄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 큰 도시의 모든 것을 태우고 날려 보낸단 말인가? 하며 논쟁하였습니다. 전단지의 글대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사람과 이곳에 그냥 남겠다는 사람들도 나누어졌습니다.
그 후 약속된 날짜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자 폭발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1.6㎞ 이내 모든 것이 완벽히 파괴되고 시민 7만 명이 초기 폭발로 사망했습니다.
사흘 후에 다시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됨으로 반경 1.8㎞ 이내 모든 것이 완벽히 파괴되고 시민 3만 5천 명이 초기 폭발로 사망하였습니다.
그 외에 원폭이 터질 때 태양만큼 뜨거운 열이 발생하여 반경 수 킬로미터 안의 것들은 열기로 인하여 녹았습니다. 또 초속 70미터 이상 강한 바람이 불면서 건물이 다 무너져 내리고 곧 하늘에서 위험한 방사능 낙진을 포함한 재앙의 비가 내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원폭보다 더 강한 말씀의 능력으로 구브로의 총독 서기오 바울까지 회심시키는 전도를 마쳤습니다. 이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왔습니다(행 13:04~12).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자유 도시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던 수리아의 안디옥과는 다른 지명의 안디옥입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이 사는 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생명의 복음, 능력의 복음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바울의 종횡무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의 이런 전도의 열정을 본받기 위해 제목을 「나도 복음의 폭발력이 있습니까?」로 정했습니다.
1.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을 전도의 장으로 활용합니다. |
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우선 유대교의 회당을 먼저 찾았습니다. 회당을 활용하여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행 14:01). 왜냐하면,
①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그의 이해.
②유대인의 회당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있기 때문.
③구약의 낭독과 그것에 대한 해설 등 설교하기에 알맞은 장소와 규칙적인 시간 엄수 등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회당에는 설교할 자가 거의 없으므로 회당장(장로들)이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간혹 회당을 방문한 사람 중에 설교할 만한 자가 오면 부탁하였습니다.
마침 바울 선교팀이 회당을 방문하자 바울의 의상(衣裳)과 말씨를 통해 바로 유대인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에 회당장이 설교를 요청하자 바울은 회당에서 마음껏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회당에서 유대인을 상대로 마음껏 설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흩어져 살아가는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이 본토인보다 더 간절하였습니다.
그 예로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4식구가 식사를 하면 5개의 의자를 놓습니다. 한 의자는 메시아가 오셔서 앉을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설교는 바나바보다 바울이 주로 담당하였습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성경을 봉독한 후 내가 믿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를 그곳에 모인 자들에게 전했습니다.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①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전하는 메시아의 성취자로 오셨다는 메시지입니다(16~25). 바울은 설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사상(창 03:15)의 성취자이고 다윗의 자손으로서 약속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는 실제 목적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셨습니까?
바울은 아브라함부터 다윗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역사는 단순히 육신의 후손에 대한 예언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스라엘은 약속된 메시아가 오시는 통로라고 설명합니다.
②예수님은 구속 사업을 완성하신 분이라는 메시지입니다(26~38). 바울은 26절부터 당시 예루살렘 시민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죄를 지적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뜻을 거슬렀다고 지적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잘못된 일에 대해 회당에서 공적으로 지적합니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하였으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큰 죄를 지었지만, 이 일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인류를 향해 진행된 구속 사업의 방편이었음을 밝힙니다. 그러나 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고 전합니다(30).
③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以信得義) 메시지를 제시합니다(39).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유대인은 율법을 지켜 구원을 이루는 줄 생각했으므로 많은 사람이 유대교를 외부와 단절된 폐쇄 종교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이런 유대교의 난점을 이용하여 기독교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생명의 종교라고 밝힙니다.
이 복음을 등한히 하거나 무시하면 멸망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까지 곁들입니다(40, 41).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은 법정 용어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복음을 믿어 의롭다고 여김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분이 되었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의롭다고 하셔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위해 오셨습니다.
2. 바울의 설교 후 나타나는 좋은 반응을 보겠습니다. |
42 그들이 나갈 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한 사람에 의해 여러 사람이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심령의 문을 열고 들은 사람과 닫고 들은 사람의 반응은 각기 달랐습니다.
영생에 관한 진리를 처음 들은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다시 설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바울을 예우한다고 체면치레로 하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말씀 듣고 은혜와 감동이 되어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바울의 메시지는 대단히 은혜로운 메시지입니다. 말씀 성공입니다.
사실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다음 주일에 또 오게 되고, 은혜를 받으면 그 모임에 또 가게 됩니다.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전하는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감동하게 하며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난 이후 많은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릅니다. 그러자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라고만 지도합니다. 은혜받았으니 자기 자리를 지키라는 권면입니다.
43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3절의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나오죠. 이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유대인과 같이 모세 율법을 준수할 의무를 지닌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은 할례까지 받았지만 믿음으로 의롭다고 함을 받는 진리에 감동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한 주일이 지나자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안디옥 시민이 거의 왔다는 말입니다. 지난주일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은혜받으러 왔습니다.
어디 나도 한번 가서 들어 볼까 하며 시민이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도 이렇게 복음을 깨닫고 예배에 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식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주는 통로입니다.
복음을 듣고 간 사람의 입으로 복음의 소문이 확산하였습니다. 일주일 후에 온 시민이 거의 왔다면 이는 분명히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바울 선교팀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무슨 기적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나 또한 병자를 고쳤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기적을 보지 않고 말씀의 소문만 듣고도 이렇게 모였다면 이건 대단한 사건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복음의 대폭발입니다.
이때 회당은 큰 공간이 아닙니다. 그러면 바울은 회당 문전에 서서 모인 시민들에게 설교하였다는 말입니다. 음향 시설이 없는 곳에서 설교하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웬만한 정열 아니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바울은 신나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그 메시지를 듣는 사람은 감동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메시지는 기적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감동하고 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대 부흥 집회에는 항상 마귀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3. 바울의 설교 후 나타나는 안 좋은 반응을 보겠습니다. |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며 좋은 반응을 보이자 유대교의 골수분자들은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떻게 시기하고, 반박하고, 비방합니까?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에 관한 설교의 내용은 지극히 잘못되었으며 사실과 다르다고 강력히 비판하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다. 부활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만 주신 구원의 특권이 이방인에게 넘어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렇게 강렬한 반대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그대로 받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책임과 지금까지 쌓아 올린 기득권이 일시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복음을 악을 품고 전파되는 것을 막아섭니다.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유대인들이 기득권을 가진 귀부인들을 이용하여 바울 선교팀의 복음을 계속 핍박합니다. 이런 현상을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있는 일입니다.
복음이 입증되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괜히 빈정대고 배척도 합니다. 이에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유대인들이 복음을 먼저 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도 오순절 이후에 설교할 때 이 사실을 말하였습니다(행 03:26).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므로 이방인에게 향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사 49:06절을 인용하여 그 증거를 밝힙니다(47).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비방하는 자들 앞에서 담대했다는 복음의 용기입니다. 전도에서 염려되는 일이 두려움과 위축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을 상대로 반박할 때 조금도 위축됨 없이 아주 담대하게 성경을 예로 들어 반박합니다. 복음을 힘차게 전합니다. 이 힘은 원자폭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동력입니다.
바울은 지난날 예수님을 핍박할 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본 사람입니다. 어쩌면 자기도 그렇게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위기를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오직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 여러분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이런 담대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는 덥지도 차지도 않은 회색지대에 머무는 일입니다.
안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신앙의 담대함과 용기가 없이 안일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믿어도 지식으로만 믿는 자가 되지 맙시다. 이론과 지식으로만 믿으면 무기력한 자의 자리에 머뭅니다. 예배당에 나와도 형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는 분이시기에 그분께서 여러분을 변화시킬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이 주어져도 거부하는 사람이나 영생을 거절하는 사람은 복된 자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신령한 복을 거절하면 그 복이 다른 데로 넘어간다는 사실 기억하십시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시기와 분노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바나바와 바울을 박해합니다. 더 이상 비시디아 안디옥에 머물지 못하고 떠납니다.
그러나 복음의 원자폭탄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폭발한 이상 복음은 더욱 왕성해갑니다. 우리도 이 복음을 폭발시키는 일에 잘 쓰임 받는 일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 선교팀이 그 지역을 떠나도 그들에게는 기쁨과 성령님의 충만이 있습니다(52).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고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 모두가 무기력한 모습에서 탈출하여 놀라운 복음을 폭발시키는 일꾼이 됩시다.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은혜의 일꾼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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