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제네바에서 출생하여 후에 프랑스에서 활동한 사상가요 교육학자로 그 명성이 대단한 루소(Rousseau, Jean-Jacques. 1712, 06, 28~1778, 07, 02)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워낙 천재였고 외모 또한 늠름해서 많은 귀족 여인들이 따랐지만 그는 그 여인들 중 한 사람에게 청혼하지 않고 자기가 묵고 있던 하숙집 주인의 딸, 테레즈 르봐쇠르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그녀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미모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고 신분도 좋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지식이 풍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루소가 시계 보는 방법을 가리켰지만 죽는 날까지 시계 보는 방법을 모르고 죽은 여인으로서 자식을 낳고서도 자식을 제대로 양육할 능력이 되지 못해 자식의 목욕이나 뒷거리를 처리해 주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소는 교육학에 관한 글을 썼으면서도 자기 자식은 남에게 맡겨서 양육해야만 했습니다
루소가 주변에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들, 신분 좋은 가문의 여인들이 있어도 결혼하지 아니하고 하숙집 딸 테레즈 르봐쇠르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이유가 뭘까요? 단 하나 세상 끝날까지 자신과 함께 있어줄 여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람은 건강하고 힘이 있을 때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지만 병들고 늙으면 모든 사람이 떠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병들고 늙어도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있어준다면 감격하여 살맛이 나겠지만 그러나 사람이 세상 끝날까지 누군가 곁에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요?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돌아보시는 하나님,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만나주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예레미야 선지자가 사역하던 당시의 환경을 보겠습니다. |
0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예레미야는 B. C 646년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나 세습(世襲)에 의해 장차 제사장 직이 보장된 예비 제사장 직업군에 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사명에 눈물과 기도로 순종하면서 제사장이 아닌 선지자로서의 부름을 받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은 이미 나라가 바벨론에 함락을 당하여 거의가 포로로 잡혀갔던 암울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회개와 영적 회복을 위한 메시지를 눈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은 이미 07,08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행동하여야 살 길이 있는지를 안내를 받고서도 그 말씀대로 따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람의 생각을 따라 행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지하 특공대를 조직해서 성공적인 작전을 이끌어 고국으로 당당히 돌아가 빨리 독립 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작전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은 어디까지나 바벨론 제국의 포로의 신분 아닙니까? 그런 상황에서 무슨 해결점이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무리수를 둘 때가 아닙니다. 이미 자업자득입니다. 지금 당장 이스라엘은 포로 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적응해야지 그 현실을 부정하고 파괴를 일삼는 작전 같은 것을 펼친다면 이는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일이요, 그 현실을 주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앙의 자리에 떨어집니다. 이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2가지로 권면을 하고 있는데 05~07절 부분과 08,09절 부분입니다.
①05~07절 부분은 포로로 잡혀간 그 지방에서 잘 적응을 하여 현실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하지 말고 그저 평안히 거하라는 내용입니다.
②08,09절 부분은 거짓 선지자와 복술자(卜術者)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이 두 가지의 권면을 잘 받아야만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따라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장래 문제가 걸려 있는 말씀으로서 그대로 받고 행하기만 하면 사는 길이요. 받지 않으면 죽음의 길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소망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주셨으니 이제 그 말씀을 든든히 믿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세월이 점점 지나면서 현실적으로는 가나안으로 돌아갈 징조가 조금도 보이지 않자 백성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히면서 거짓 예언자와 복술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서서히 이스라엘의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러한 우상의 길로 갈 것을 알고 계셨기에 08,09절에서 거짓 선지자와 복술자에게 미혹되지 말 것을 경계하셨던 겁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우리가 왜 이렇게 까지 되었는지 자기를 성찰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죄와 허물을 고백해야 하는 때입니다. 왜냐하면 11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시는 말씀을 거듭 하셨기 때문입니다.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한 것은 끝까지 그리고 반드시 지키시는 분 아닙니까? 그 말씀대로 아멘 하여 순종하기만 하면 복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신 07:0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그렇습니다. 신실하여 약속을 꼭 지키시는 하나님임을 알고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기만 하면 복된 생활을 누릴 수 있음에도 이스라엘은 그렇지를 못하고 거짓 선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때가 있었습니다.
렘 28장을 보면 하나냐라는 사람이 모든 사람과 빼앗겼던 성전의 기구들이 2년이 못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는데 이때 이스라엘이 미혹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냐는 거짓 선지자로서(렘 23:21) 이스라엘을 미혹하는 자요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자였습니다. 이에 예레미야가 하나냐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렘 28:15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 도다. 1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17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
우리는 생명 있는 동안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가로막는 일들로 인해 많이 피곤하고 지치고 때로는 좌절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소망이란 비록 지금의 현실로는 아직 성취되지 못했으나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우리의 축복입니다. 소망을 믿고 바라보는 자는 비록 현재의 상황이 변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마음속에는 이미 성취된 것처럼 믿고 의욕이 넘치는 적극적 자세로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소망의 특징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현실의 고달픈 생활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굳건히 믿음으로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찬의 특징입니다.
중학시절 때 많이 암송하였던 시 한 편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러시아의 국민적 시인 푸쉬킨(Pushkin, Aleksan dr Sergeevich. 1799. 6.6~1837.2.10)이 지은 삶이라는 시인데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나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돌아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리고 지난 것은 그리워하느니라.
설움의 나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돌아오리니 라는 이 구절이 저는 아주 마음에 듭니다. 어떻습니까? 이 소망의 구절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3.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만나 주십니다. |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사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은 고난과 가시밭길입니다. 나라를 빼앗겼고, 주권을 잃어버렸고, 가족은 헤어져 찾을 길이 없고, 고향으로 돌아 갈 기약도 없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어야만 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때때로 그발강 가에 나가 버드나무에 걸어 놓았던 수금을 내려다 타면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한 맺힌 노래를 불렀는데 이러한 고난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들은 차츰 하나님 앞에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이에요. 12~14절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기도는 성도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며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대적인 통로입니다.
사 55:0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열심히 있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이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13)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는 자에게 축복의 길을 열어주시는 그 은혜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마음이 어렵고 힘들고 아플 때 어떻게 하시며 현실의 생활에 많이 지치고 주저앉고 싶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나의 삶과 영혼을 누구에게 맡기며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부르짖으라, 기도하라, 찾으라, 그리하면 만나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고 한숨을 짓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우리는 사람을 바라보고 도움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제는 세상의 소리, 향락의 소문, 미혹의 영을 따라 세상으로 나갔다가 실족하였던 모습들을 눈물로 고치며 돌아와야지요. 하나님을 찾는 이 길만이 우리의 살길이며,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으며 찾고 또 찾을 때가 바로 지금이며, 지금이 우리가 바로 주님을 찾고 또 찾아야 할 때입니다.
고후 06:0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성도 여러분! 문제의 해결점이 기도인줄은 알고 있는데 기도가 안 되어 답답해하십니까? 닫혀있는 심령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남에게 받은 상처가 깊습니까? 행하는 일들이 잘 풀리지 않습니까? 심령이 단단히 굳어졌습니까? 누가 이 굳어 버린 심령을 녹여줍니까? 지금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 55:0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14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돌아오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이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모든 것이 풀려나가는 것 아닐까요?
예, 풀려야지요. 오늘부터 성도 여러분의 삶에 맺혀있는 모든 문제가 완전히 시원하게 풀려지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여러분도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축복의 터전으로 돌아오기를 축원합니다.
11 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란 말이 세 번이나 강조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만큼 이는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듣고 안 듣고의 선택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는 필(必)히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 55:0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오늘은 삼일 뷔페가 등장하는 날이기에 미리 웃음으로 몇 마디 드리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시골의 한 농가에서 인절미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 집 며느리가 옆에 있는 신랑에게 떡을 소담스럽게 잘라 콩고물을 비벼서 입에 쏙 넣어주었습니다.
마침 옆에 있던 시아버지는 먹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고 군침이 돌지만 체면이 있어서 달라고는 못하고 창밖의 먼 산만 쳐다보고 있습니다.그때 마침 시어머니가 들어오면서 며느리에게 얘, 아버님 떡 좀 드렸느냐? 하고 묻자 아니요. 아버님은 상을 차려서 잘 해 드려야지요. 아니 시아버지가 얼마나 인절미를 좋아하는데 아직도 안 드렸니? 하며 떡을 주먹만하게 뚝 떼어 콩고물을 묻히곤 남편에게 우선 잡수세요. 했습니다. 그러자 시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떡을 볼이 미어지도록 입에 넣고는 아들보고 하는 말이 이놈아 너만 색시 있냐? 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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