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종교들마다 나름대로의 상징이 있는데 우리 기독교는 십자가입니다. 자동차에도 십자가를 부착하고 또한 성도들 가정에도 아마 몇 개의 십자가는 있을 겁니다. 김해시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은 1996년 3월에 개국한 창원 극동방송국 98.1 MHz(창원FEBC)의 스티커를 차량 뒤편에 많이 부착하고 다닙니다. 이런 스티커를 보면서 저는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전도를 하기 위해서 일까? 아니면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라는 광고를 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의미가 있을까? 아마 다수는 아니지만 더러는 혹 이 스티커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겠지? 라는 일종의 부적(符籍)역할 기대심리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고 불교인들도 자신들의 종교를 표현하기 위하여 묵주를 자동차의 손잡이에 걸거나 또 달고 다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전에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모세가 제작한 법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고 중요한 일에는 앞세우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법궤를 앞세우고 건넜더니 물이 갈라진 일이 있었고, 그래서 법궤가 있는 곳에는 승리가 있고 반드시 기적이 일어난다고 여겼습니다. 매사에 그리되면 좋겠지요.
법궤, 언약궤, 혹은 여호와의 궤라고도 불리는 이 궤를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는 길갈이라는 곳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수 04:18~20). 그 다음에 벧엘에 있다가 실로에(삼상 03:03)까지 옮겨왔었는데 당시의 제사장 엘리 때에 아벡이란 곳에서 진을 치고 블레셋과 전투에서 무작정 법궤만을 앞세웠다가 패전함으로 그만 법궤가 블레셋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삼상 04:01~11).
이스라엘의 상징인 법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만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결국은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법궤를 탈취해간 블레셋에서는 약 7개월 여 동안 이 법궤로 인하여 복을 받았는지, 아니면 화를 당하였는지, 이로 인하여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블레셋은 법궤 때문에 고통과 혼란만 계속 당합니다. |
삼상 05:02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블레셋(Philistines). 고대 팔레스타인 민족 가운데 하나로 B. C 3세기 말 에게 해에서 팔레스타인의 서쪽 해안으로 침입하여 정착한 비셈계 민족입니다. 당시 블레셋은 다섯 지방 곧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의 수령들에 의하여 각각 분할 통치되던 부족연합의 집단 형태로서 이스라엘을 자주 침공하였습니다.
이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법궤를 전리품으로 노획해 갔는데 이런 성과를 거둔 것은 자기들의 힘보단 그들이 섬기는 신 다곤(Dagon)이 하나님을 이긴 것이라 여겨 법궤를 다곤 신전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법궤로 인하여 다곤 신상이 부서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삼상 05:03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0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가 축복이 아니라 재난을 가져오는 줄 알고 각 지방 수령들이 모여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 라는 의논을 합니다. 수령들의 의논 끝에 하나님의 진노는 다곤 신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여호와의 궤를 다곤 신당이 없는 가드라는 곳으로 옮기는 결정을 합니다(삼상 05:07~08).
삼상 05:08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
그런데 법궤를 가드로 옮겨 간 이후에 가드에서는 더 큰 문제가 성 전체에 발생하였습니다.
삼상 05:09 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
다 쳐서 종기가 나게. 입술이나 눈꺼풀이 깨어지다는 의미인데 극심한 피부 질병을 만나 피부가 완전히 해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아스돗보다 가드에 더 큰 재앙을 내리셨음을 뜻하는 바 이에 그들이 다시 모여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 지역으로 보내기로 합의 했습니다.(아스돗→ 가드→ 에그론)
삼상 05:10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에그론은 아스돗(Ashdod) 북 동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블레셋의 주요 다섯 성읍 중의 하나인데(08절) 왜 이곳으로 법궤를 보냈을까요? 이곳 에그론은 바알세붑(Baalzebub)이라는 신을 섬겼는데(왕하01:02,03) 하나님의 궤가 다곤 신 때문에 진노한 줄 알고 다곤 신을 피하기 위하여 이곳에 보내었습니다만 법궤가 에그론에 도착하자마자 주민들의 반대 여론과 원성이 매우 심각합니다.
삼상 05:10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마침내 블레셋 다섯 수령들이 다시금 모여 심각한 의논을 합니다. 법궤를 자신들의 또 다른 도시로 보낸다 해도 그 도시 역시 앞의 다른 도시들처럼 하나님의 진노로 그 피해가 클 것이기 때문에 아예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자고 결정을 합니다.
삼상 05:11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결국 블레셋 족속은 법궤로 인하여 많은 재앙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 위한 블레셋인들의 방법을 보겠습니다. |
삼상 06:02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잘못 다룸으로서 엄청난 재앙을 만났다고 생각하자 그들의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의 조언을 받아 종교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여기서 제사장들에게 자문을 받는 것은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는 구체적인 방법 및 궤를 다루는 요령에 대하여 조언을 받고자 함이고, 복술자들로부터의 자문은 궤를 돌려보낼 날짜와 시기 등에 대하여 알고자 위함입니다.
삼상 06:03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04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이쯤 되자 블레셋 수령들은 더 이상 법궤를 가지고 있다가는 온 나라가 독종으로 멸망할 것이라 여겨 속히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를 추진합니다. 그리고는 이 법궤를 어떻게 돌려보낼 것인가에 대한 방법으로서 먼저 하나님과 이웃에게 피해를 입혔을 경우에 드리는 제사인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속건제(贖愆祭)는 흠 없는 숫양을 제물로 드리는 건데 이들은 이방인이다 보니 속건제의 제물로 자기들을 괴롭혔던 독종처럼 금으로 다섯 개의 독종 모형을 만들고 또한 금으로 다섯 개의 쥐를 제물로 만들어 드리는 겁니다.
왜 다섯이냐면 블레셋 부족의 집단 숫자를 상징한 것이며, 마침내 속건제 제사를 드린 후에 그것들을 상자에 넣어 법궤와 함께 수레에 싣고 출발하였습니다(08). 그런데 삼상 05:11절에 의하면 법궤를 본래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낼 것이라 하였으나 지금 법궤가 가는 곳은 당시의 실로가(Shiloh. 삼상 03:03) 아니라 예루살렘 서쪽 약 22km 지점에 위치한 벧세메스입니다(09).
블레셋인들이 법궤를 이곳으로 보내려 한 이유는 ①법궤가 원래 보관되어 있던 실로는 당시 블레셋인들에 의해 심하게 파괴되었고(04:10) ②법궤로 인해 마지막 재앙을 당한 에그론과 제일 가까운 성읍이며 ③법궤를 관리할 수 있는 제사장들의 거주지이기 때문입니다.
삼상 06:07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블레셋 제사장들이 법궤를 새 수레에 실어 보내고자 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그분에게 경외심을 보이고자 함 아닐까요?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마리. 이것 또한 세속적 목적을 위해서 전혀 사용되지 아니한 소로서(민 19:02) 모세 율법에서도 정결 의식에 필요한 희생 제물은 이 같은 조건에 부응해야 한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신 21:03).
특히 새끼가 딸린 암소를 법궤를 운반할 짐승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당시 블레셋 제사장들에게 있어서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는 자신들에게 내려진 재앙이 어디로부터 말미암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즉 그들은 그 재앙의 근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부터인지 아니면 다만 우연인지를 궁금해 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09절에서 블레셋 제사장들은 재앙의 근원이 하나님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세워놓고 있는데 즉 그들은 그 수레의 진행 방향을 보아 그 재앙의 근원을 규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삼상 06:09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새끼가 딸리지 않은 암소를 사용한다면 그 암소가 목적지를 향해 곧장 간다 하더라도 그 암소는 다만 본능대로 길을 따라 간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반면 새끼가 딸린 암소를 사용할 경우 그 암소가 새끼를 개의치 않고 곧장 목적지까지 간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가 개입됐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삼상 0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식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있으며, 더군다나 여인에게는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모정이 넘치듯이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서는 송아지들이 어미를 향해 부르짖는 소리가 나고 암소 주 마리도 새끼의 울음소리에 너무 가슴이 아파 울고 있습니다.
이 장면 충분히 상상이 됩니까?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옆길로 가지 아니하고 목적지 벧세메스를 향하여 나아갔다는 것은 암소들이 새끼 송아지에게 모성적(母性的) 본능이 이끌리면서도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손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은 블레셋의 제사장들이 스스로 기준을 세운 바(09절) 처럼 블레셋에게 임한 재앙이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았음을 확인해 주는 메시지입니다.
눅 0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우리에게도 우편에서는 황금만능주의, 세속주의, 쾌락주의, 안일무사주의가 미혹하고 있으며, 좌편에서는 불신앙과 의심 그리고 이단들이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유혹을 뿌리쳐 버리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여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아무 불평 없이 가야 하는 자임을 기억하십시오. 벧세메스로 향하던 암소처럼 울며 가야하는 신앙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 홀로 가지 않도록 친히 동행하여 주십니다.
3. 법궤를 운반한 암소 둘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
삼상 06: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여기 두 마리의 암소가 블레셋 나라의 그 많은 소들 중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통하여 특별히 선택을 받은 소라고 이해하며 말씀을 듣는 것이 아무래도 더 좋지 않겠습니까? 실제 그 나라에 소가 어찌 이 두 마리뿐이겠습니까? 수를 셀 수 없는 만큼 많은 소가 있었을 것은 기본상식입니다. 그럼에도 본문의 이 암소 두 마리가 수레에 법궤를 싣고 가는 일에 선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을 해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이 말씀을 영적으로 적용하여 볼 때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성도 여러분도 이 젖 나는 암소들과 같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특별히 선택함을 받은 자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충성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좀 더 좁게 볼까요. 앞으로의 우리 교회에 어찌 여러분만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여러분이 김해삼일교회에 부름을 받은 것은 분명히 이 소들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뜻이 있어서 큰 사명을 띠고 부름을 받은 자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죽을 수 있는 신앙의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함을 아시지요. 우리 그렇게 한 번 살아봅시다.
그러면 젖 나는 암소 두 마리 즉 어린 새끼들을 떼어놓고 벧세메스까지 앞만 보고 힘들게 힘들게 달려온 이 소들을 그곳 사람들이 어찌하였습니까? 수고했다고 칭찬하면서 상으로 여물을 많이 주면서 휴식을 푹 취하게 하였을까요? 아닙니다.
두 마리의 암소에 의해 실려 있는 법궤를 본 그 지역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새 수레를 쪼개어 단을 쌓고 그 위에 암소 두 마리를 잡아 희생의 제물로 드리고 말았습니다. 암소 두 마리가 마지막 희생을 당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성도의 최후의 모습이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마지막 때의 신앙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아무리 일을 잘해도 그 영광은 주님에게 돌아가고, 칭찬도 듣지 못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것처럼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은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모습은 외형적인 것에 치우쳤고, 남에게 내가 뚜렷이 드러나기를 원했고,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이 더욱 나를 많이 알아주기를 바랐으며, 하늘나라의 상급보다는 세상의 칭찬을 더 많이 원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신실한 성도는 이 암소 두 마리와 같이 마지막 희생의 제물이 될 때까지, 주여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내가 하여야 할 것을 한 것뿐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08)고 고백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벧세메스까지 수레를 끌고 온 암소가 두 마리였다고 이미 말씀 드렸는데 바로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또 담겨져 있습니다. 교회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나 혼자의 힘으로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하는 것, 즉 앞에서 끌면 뒤에서 밀어주고, 서로 돕고 서로 받들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간혹 교회를 오해하여 교회 안에도 야당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맞아요? 어디 교회가 정치집단이며 힘의 논리를 앞세우는 곳입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군병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우리 모두가 군병이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지 신령한 교회 안에서 야당노릇 하는 것이 아님을 아십시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모든 직원들, 그러니까 목회자,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들이 하나가 되어 한 입으로 복음의 소리를 발할 때 그 교회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부흥되고 성장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페르시아에는 이상한 새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수놈은 왼쪽 날개만 있고 오른쪽에는 갈고리 같은 것이 붙어 있으며, 암놈도 오른쪽 날개만 있고 왼쪽에는 역시 갈고리 같은 것이 붙어있는 특이한 새입니다. 한 마리로는 절대로 날아갈 수 없기 때문에 날아갈 때는 서로 갈고리를 걸고 두 마리가 짝을 지어 날아간다고 하네요.
우리 김해삼일교회도 이런 동물처럼 신앙의 협동이 이루어 질 때 비로소 주님이 역사하셔서 은혜와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마 18:20)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제직들과 온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며 멍에를 메고 서로 협력하여 힘써 주님을 섬겨 나갈 때에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복된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시온의 찬미 1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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