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09년 말씀

모두가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요 09:13~41)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09. 8. 15.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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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다니는 어떤 부인이 오래 전부터 남편이 요구해온 댄스파티에 꼭 한 번만 동행해줌으로써 남편 마음을 즐겁게 해주려고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쯤은 아량을 베풀어서 남편의 요청을 들어주면 결국 남편도 감동되어 교회에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녁 이 부인은 남편을
따라 댄스홀에 가서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여보, 오늘 밤은 참으로 즐거웠소!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남편은 웃음 띤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인도 남편을 향해 활짝 웃으면서 여보, 돌아오는 주일에는 나와 함께 교회에 가시는 거예요. 그렇죠? 하고 부인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좋아하지 말라구! 이제는 다 틀렸어! 나는 당신이 진짜 교인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당신의 신앙은 엉터리더구먼.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뼈 있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만약 오늘도 당신이 내 요구를 거절한다면 당신이야말로 진짜 교인일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소. 당신을 따라 교회에 가야겠다고 작정하였는데 오늘밤 당신을 보니 당신의 믿음은 진짜가 아니고 단지 고상한 취미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 같구려.

 

성도 여러분! 육신의 생각으로 영적 일을 논하지 마십시오. 영의 눈을 뜨고 판단하여야지 인간적인 생각만 앞세우면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지난주일 말씀 01~12절을 보면 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자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눈을 뜨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건이며 우리 모두가 함께 축하할 만한 일이지요.
그러나 13절부터는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안식일에 고쳤다는 이유로 시비를 벌이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바리새인들의 영적 우매함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인이 눈을 떴다는 사건 때문에 시비가 일어났다고 하니 도대체 이런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1. 영의 눈이 어두우면 트러블 메이커가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십계명의
인도를 따라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한 법을 무려 613조 이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정말 복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눅 06:0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0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향해 지적한 일이 과연 율법의 관점에서 볼 때 허용될 수 없는 일에 속하는 것일까요? 제가 성경을 한 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신 23: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굶주린 이웃이 타인의 곡식밭에 들어가서 그 주린 배를 채운다 할지라도 관용과 긍휼의 정신으로 그것을 용납하라는 은혜로운 규정입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이삭을 자르고 손으로 비비어 먹은 그때가 바로 안식일이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안식일 법조문을 적용하여 두 가지 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한 겁니다.

①이삭을 잘랐으니 이는 안식일에 낫으로 밀을 벤 것과 같으며 ②자른 이삭을 손으로 비볐으니 역시 안식일에 타작한 결과가 된다는 겁니다. 반면 아무리 안식일이라도 생명에 관한 문제는 다소 예외가 있었습니다.


마 12: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가령 양이나 나귀가 구덩이에 빠져서 지금 당장 건져 내지 않으면 죽게 될 경우 안식일이라도 제사(예배) 후에는 건져낼 수 있으나 구덩이에 빠진 나귀가 하루를 그곳에 더 있어도 죽지 않을 형편이라면 그 다음날 건져내야 합니다.
만일 안식일에 구덩이에서 건져낸 나귀가 아직도 힘이 있어 즉시 뛰어간다면 이것은 나귀의 주인이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되어 책망을 받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야 하죠. 그런 면에서 볼 때 맹인이었던 이 사람도 다 죽어가는 환자였다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으로 보아 하루 지나서 눈을 떠도 별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눈을 뜨게 한 것은 명백히 안식일 범한 죄에 해당된다고 규정하여 시비가 붙은 건데 영의 눈이 어두웠기에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결국 생명을 다투는 위급한 일이 아니면 어떤 선한 일이라도 안식일을 범한 것이며 이런 논리를 적용하여 오늘 맹인이 눈을 뜨게 된 것을 문제로 삼고 있습니다. 얼마나 문자에 얽매인 형식적 율법을 지키려 애를 쓰고 있는지 그 흔적이 능히 짐작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제기하는 안식일 문제에 대해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①노동으로부터의 안식과
②새생명의 탄생을 위한 선한 일과 ③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안식일의 근본정신임을 명백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마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즉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생명 문제를 하찮은 양을 구덩이에서 건져내는 일과 비교하여 안식일에 일을 했다. 안 했다. 죄가 된다. 안 된다는 식의 시비를 벌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막 0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가두어 두려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지키기 어렵고 무거운 것도 아닌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밝히십니다.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와 같은 예수님의 안식일에
대한 정신을 바리새인들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문자적이고 형식적인 안식일 지키는 일에만 급급하여 안식일 본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게 다 영적으로 우매하면 나타나는 결과 아닙니까?

 


 2. 육의 눈도 영의 눈도 함께 떠야 합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되었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이 사람 그러나 신앙적인 면에서는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입니다. 이 사람이 육신의 눈을 뜨는 기적을 직접 체험하였음에도 즉시 신앙인이 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17 이에 맹인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 분과 올바른 신앙의 관계를 맺어가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맹인 되었던 이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이 자신의 구세주 되심을 고백하지 못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자리에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인자는 문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메시야에게만 사용하는 독특한 명칭입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힐 때 쓰는 표현이 바로 인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 고 물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구세주가 되신 것을 믿느냐? 는 질문입니다. 그러자 맹인 되었던 자가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36)? 라고 되묻습니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나타내 주십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기적만 가지고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온전히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기적은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기적 후 가르치는 겁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맹인이면서도 맹인인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며 또한 당시의 바리새인만 맹인이겠습니까? 나 자신도 맹인일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안 보입니까?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안 보입니까?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의 방황된 모습이 안 보입니까? 바로 자신이 영적 맹인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도 영적 맹인이라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그분의 자녀로 누릴 수 있는 복된 삶을 상실한 인생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간 내가 영적 맹인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면 빛 되신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십시오. 맹인이 단순히 눈을 떴다는 사실이 기적이 아닙니다. 진정한 기적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고 구주로 알게 되는 일입니다. 이 사람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선지자쯤으로 생각했으나 비로소 나중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였습니다.

 

요 0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3. 신령한 눈을 뜬다고 앞날이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영의 눈을 감은 사람들은
이 세상 물결 따라 되는 대로 쉽게 살아갈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고 영의 눈을 뜬 사람의 앞길에는 어려운 일도 많습니다. 세상은 바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잘 용납 않으며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칭찬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에도 계속 시비가 있고 오해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맹인 되었다가 눈을 떤 사람을 축하하기보다 시비를 한 것도 전통과 습관 그리고 자기 경험, 자기중심적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비생산적인 전통이나 습관은 과감히 박차고 일어나는 용기를 앞세워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일을 놓고 안식일을 범했다는 식의 문제를 삼았습니다.

안식일에 왜 그런 일을
했느냐는 거지요? 은혜는 율법을 이기고 사랑은 모든 법을 초월한다는 진리를 알지 못하였기에 그들의 전통에 매여 비생산적인 시비를 거는 겁니다. 이러한 것에서 우리는 먼저 자유로워야겠지요? 그렇지 못하면 나의 낡은 사고방식들이 상대를 피곤케 하고 고통만 안겨 주지 않겠습니까?


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바리새인들은
맹인 되었던 자의 부모를 불러 협박조로 묻기를,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이냐?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냐? 누가 눈을 뜨게 하였냐? 등 취조하듯 묻습니다.이에 맹인 되었던 자의 부모는 대단히 눈치가 빨랐습니다. 잘못하면 출교를 당할 것 같으니 아주 지혜롭게 말합니다. 그가 내 아들이고 맹인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누가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했는지는 모른다고 말을 하였습니다(20,21).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 함이러라.(그러자 다시 소경되었던 자에게 묻습니다)
26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이와 같이 새로운 삶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하는 곳에는 시비와 어려운 고난의 일들이 따릅니다만 그럴수록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헬라 사람들의 재미있는
설화가 있습니다. 어느 캄캄한 밤에 맹인이 등불을 들고 길을 갑니다. 자기는 맹인이라 등불이 필요 없지만 가다가 다른 사람하고 부딪치면 괴로우니 등불을 켜고 가는 겁니다.

이 불은 자기를 위함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기 위해서 준비한 건데 여기 불이 가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그만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이때 맹인은 자신 있게 한마디 합니다.
이 사람아 눈이 없나? 이 등불이 보이지도 않나? 그러자 저쪽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이 등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라도 불은 꺼진지 오래 되었소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꺼진 등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등불이 꺼졌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기에 맹인인 겁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불이 꺼진 우리들이야말로 영적 맹인이 아닐까요? 최소한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신앙 세계에 대해서 신령한 눈을 뜨지 못한 내 자신의 영적 모습을 보면서
주님! 이 시간 내 영의 눈을 뜨게 하여 주의 일거리를 보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0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 지라.

 

예수님은 소경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왜 관심을 가지십니까? 그에게 밝은 광명을 주셔서 새로운 인생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전에 몰랐던 세계의 기쁨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영적 소경 된 모습을 역시 보시고 신령한 세계에 대한 영의 눈을 뜨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순종하면서 살아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