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09년 말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야 눈을 뜹니다(요 09:01~1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09. 8. 8.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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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시대 중동의 관습은 부모의 처지에서 장애인(障碍者)을 키우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고 합니다. 인권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을 때의 일입니다. 또 일곱 살까지는 성한 자녀이든 장애인이든 부모가 키워야 할 책임으로 여겼습니다.

만일 자녀가 혹 말을 못 하거나 보지 못하는 등 장애인일 때는 그 부모가 자녀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무방했다고 합니다.

어느 비정한 부모가 장애인 자녀를 밖에 내다 버려도 누구 하나 탓할 사람이 없는 환경인 셈입니다. 인권을 중요시하는 오늘의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은 당장 철창행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어느 모로 보아도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기 어려운 한 불행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입니다.

평생 예루살렘 거리 한쪽 모퉁이에서 구걸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만약 이 사람도 중동의 관습을 따라 자랐다면 또래 아이가 학교에 갈 일곱 살 때쯤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이 사람이 장성했다고 나옵니다. 정상인 같으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며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시점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나이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소외된 채 구걸해서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해 갑니다. 아주 외롭고 고독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층은 이런 구걸하는 사람이 없어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어디론지 떠나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가졌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일어납니다. 당사자인 맹인에게는 복 중의 복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생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야 눈을 뜹니다로 정했습니다.

 

 

1. 장애인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점입니다.

 

0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02절을 보시면 제자들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병이나 장애를 놓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편견은 소통을 방해하는 무서운 현상입니다.

소통은 상대방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마음을 주고받는 일입니다. 상대방 입장에 서서 어떤 현상을 바라보면 해결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소통이 중요합니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 사람이 병은 귀신이 들려 생긴 것으로 알았습니다. 사람이 장애인이 되었다면 필경 그 부모가 죄를 지었거나 아니면 자기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날 때부터 맹인이 된(01) 사람을 놓고 예수님께 저 맹인이 부모의 죄로 저렇게 눈이 멀었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죄로 눈이 멀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당시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통상 개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사람이 나기 전에 그 영혼이 있었다는 사상에 근거합니다.

 

유대인 랍비들의 그릇된 가르침의 결과로서 진리에 합당하지 않는 말입니다성경에는 인간의 질병을 놓고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다고 자주 소개합니다.

그러나 부모나 자기의 죄로 말미암지 않는 불행과 고통도 있습니다하나님의 뜻으로 일어나는 일도 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이 맹인을 불쌍히 여기거나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맹인 된 이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에 장애인 되었는가에 관한 관심입니다. 상대방의 불행을 긍휼과 자비가 아닌 흥미로운 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 정리합시다. 질병에 관한 일로서 우리에게 왜 질병이 찾아오는가? 입니다. 이 질병이 찾아오는 데는 적어도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첫째, 죄 때문에 병이 생깁니다(막 02:01~12. 중풍 병자. 요 05:01~14. 베데스다의 38년 병자)

막 02:0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손 마른 사람).

요 0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베데스다의 38년 병자).

 

②둘째, 육신이 약하여 생깁니다.

사람의 육신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육신은 흙으로 돌아갑니다(03:19). 이 육신이 과로하면 결국 병이 납니다. 과로야말로 만병의 원인입니다. 건강할 때 주의해야지 과로는 금물입니다.

 

③셋째, 귀신 때문일 때도 있습니다.

귀신이 들면 자해하고 포학해지고 우울증에 걸리기 쉽고 자살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귀신이 들면 인격이 파손되고 가정도 사회도 평화도 심지어는 신앙도 파손됩니다(05:01~04).

 

④넷째, 전염병의 결과일 때도 있습니다(대상 21:14).

여기서 제자들이 맹인의 문제를 놓고 이렇게 죄와 결부시켜 물었던 것은 인간이 재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원인을 두 가지 측면에서 근거하여 질문한 겁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에 관한 결과라고 여기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2. 사람의 고통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0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잘 받고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제자들이 평소에 이 맹인을 잘 알고 있었다면 부모의 죄든지 자기의 죄든지 장애의 근원을 질문해도 됩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상 제자들이 맹인을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 대화를 해본 적도 없는 사람,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생판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막연하게 맹인이 된 원인을 감히 말합니다.

 

이는 대단히 무례한 일 아닙니까? 정말 오지랖 넓은 경망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통상 견해를 일축해 버립니다.

이에 따라 종교계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제자들도 고통을 보는 시각에 변화와 함께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오늘 우리도 제자들처럼 보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맹인을 놓고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그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에서 특별 목적이 있다고 밝힙니다.

이는 제자들에게도 고통의 관점을 새롭게 가지라는 권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고통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모든 문제를 환경 탓으로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가령 부모를 잘못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다. 친구를 잘 못 만나 그렇다. 스승을 잘못 만나서 그렇다. 등 환경에 관한 신세타령은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03절 말씀을 놓고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위해 일부러 이 사람을 맹인 되게 하신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신학 원리를 잘 보십시오. 어떤 불행한 상황도 주님의 은혜를 입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현장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지식으로 돈으로 권력으로 건강으로 자랑할 만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이 아닌 나를 택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면 그때는 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거리의 맹인을 통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시며, 그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나를 통해서도 큰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했으니 우리는 미래지향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도 현실에서의 고통을 과거 행위에 관한 결과나 사탄의 일로 돌릴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의 아픔에 대해 추측성 발언을 하는 것처럼 아픈 곳을 찌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맹인은 안 그래도 괴로운데 누군가가 이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 라고 추측하며 왈가불가하는 일은 상처에다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현재의 고통을 미래지향의 관점에서 보셨습니다. 그 사람이 맹인 된 것을 과거의 행위에서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어떤 계획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3. 맹인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음으로 눈을 떴습니다.

 

0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은 왜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까? 그 맹인을 실로암으로 보내지 않고 말씀으로도 얼마든지 낫게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또 실로암으로 보내더라도 그냥 보내시지, 눈에 진흙까지 붙여 힘들게 한 후 보내십니까? 맹인이 실로암 못을 찾아가려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십니다.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03).

 

그리고 06절을 보면 이 맹인이 인내심이 있어 보입니다. 성미 급한 우리 같으면 아프다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아파요. 좀 살살해 주세요

그러나 맹인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로 가만히 있습니다. 속으로는 이분이 왜 이렇게 아프게 하실까? 하는 마음이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명한 소문이 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알아서 해 주시겠지 하며 참고 있습니다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바깥에 있는 기혼 샘과 연결된 못입니다. 기혼 샘의 물이 바위를 깎아 만든 수로를 통해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실로암 못까지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기혼 샘에서 실로암 못까지 샘물이 보냄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로암이라는 이름이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실로암이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오신 신령한 못입니다. 예수님만이 그 맹인을 능히 치료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못이 아니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말씀하십니다. 실로암 못의 물은 약수도 특별 생수도 아닌 그저 평범한 물입니다.

 

그러면 이 실로암 못은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의 눈을 뜨지 못해 어둠의 생활을 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할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쳐 주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맹인은 분명히 눈을 뜨게 될 줄 믿고 씻으러 갔습니다.

 

이에 가서(ἀπέρχομαι 아페르코마이). 즉시 갔다는 순종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즉각 순종은 기적을 창출하는 지름길입니다.

이 맹인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한 것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니 눈이 열렸습니다. 새 하늘 새 땅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삶이 열렸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 말씀을 듣고 바로 순종하여 기적을 창출한 사람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①눅 17:11~14(문둥병자 10명의 고침 받음), ②요 11:40, 41, 44(죽은 지 나흘째 나사로의 살아남), ③요 21:06, 07(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고기 153마리)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일상생활에서 육신의 질고(疾苦)로 고통을 당합니까? 이 고통을 치료받고 활동력 있게 살기를 원합니까?

영적 병을 치료받고 은혜로 살기 원합니까? 사업의 실패에서 회복되기를 원합니까? 신앙의 밝은 눈으로 주님의 일에 충성하기를 원합니까? 예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가능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3대 사역이 무엇입니까? 09:35~38에 자세히 나옵니다. 교회의 본질입니다. 첫째 가르치는 사역으로 양육과 훈련입니다. 둘째 전파하는 사역으로 전도와 영혼 구원입니다. 셋째 치료 사역으로 각종 병을 고쳐 주시는 일입니다.

 

마 0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맹인이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정상인으로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눈을 뜨기 전에는 남의 동정과 구제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별 가치 없게 살았지만,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눈을 뜨고 난 이후에는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나와는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고 그분을 증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09:36~38).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의 압제자들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33). 한때는 그저 생명 연장을 위해 살던 사람입니다.

 

이제는 눈을 뜨고 난 이후 이전에 알지 못했던 은혜의 생활, 복음 증거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그러면 맹인의 삶을 살다 눈을 뜬 이 사람의 삶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다시 구걸하던 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간증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도 예수님과 만나야 합니다.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