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09년 말씀

성도의 심령을 시원하게 합시다(고전 16:15~18).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09. 3. 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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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화장품 광고 모델 이영애가 자신을 가리켜 저는 산소(酸素) 같은 여자입니다 라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산소 같은 여자 도대체 그 뜻이 무엇입니까?
시원한 느낌을 주는 여자. 이런 말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아서 시원하고, 만나서 시원하고, 사귀어서 시원한 사람이 잘 있습니까?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는 일에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느낌이 있습니다. 만일 산소 같은 느낌을 받고 나도 산소 같은 느낌을 준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곁에 있어도 보고 싶고, 만나면 또 만나고 싶고, 헤어지면 아쉽고, 얼마든지 함께 있고 싶은 그런 품격을 지닌 분이 여러분 주위에 얼마나 있습니까?

함께 있으면 답답하고, 안 보면 오히려 더 좋은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공연히 스트레스만 쌓입니다. 전화 오는 것조차도 부담스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김해삼일교회 성도는 항상 유쾌하고 시원함을 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 삶을 몸에 익히도록 힘써야 합니다.

내가 사람을 사랑하고 또 시원함을 줄 수 있으면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이겠습니까? 혹 상대방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면 이는 바람직한 삶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아주 귀한 인물 스데바나가 나옵니다. 그에 대한 사도 바울의 평가가 멋있습니다.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바울이 이런 평가를 하였는지 이 스데바나에 대한 행적을 살펴보려 합니다. 따라서 제목을 이웃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시다로 정했습니다.

 

 

1. 바울이 스데바나를 예우하게 된 배경을 보겠습니다.

 

고전 04:0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0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고전 01장과 09:01~0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로 인해 마음이 무척 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놓고 뒤에서 수군거리며, 험담하며, 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험담을 합니까?
수군거리는 이유가 바울이 사도가 맞느냐? 혹시 가짜 사도가 아니냐? 하는 사도권 의심입니다. 정말 속이 상하는 수군거림입니다.

 

거기다 교리 문제와 윤리 문제, 은사(恩賜) 문제와 성도 간 인격 문제 등으로 파당이 생겼습니다. 분쟁하는 시끄러운 교회로 변질하였습니다(고전 01:10~12).

고린도전서에는 교회 안에서 성도 간의 갈등을 해결해보려는 바울의 노고가 엿보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사랑하는 고린도교회가 사회로부터도 문제 많은 공동체로 추락하였기 때문입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성도들 문제를 그냥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속히 가서 징계할 사람은 징계한 후에 수습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몇 사람을 징계해야 합니다. 또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므로 일어나는 부작용도 만만찮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좀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고후 01:23, 02:01~06, 13:01~02).

 

그러자 주변에서는 바울을 놓고 계속 비난합니다. 고린도교회 문제를 수습하러 간다고 하면서도 가지 않는다는 허풍쟁이라는 비아냥입니다.

바울은 편지는 힘이 있어 보이지만 실제 만나보면 졸렬하고 큰소리만 치는 사람이라고 평가절하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상황을 설명합니다.

 

고후 01:23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않고 미룬 속 마음을 밝힙니다. 오직 고린도교회 성도를 아끼는 마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바울이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 없이 방문하였다면 어찌 되었을 것 같습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죄악을 다루어 그들을 책벌하는 재판을 해야 합니다. 심히도 마음 아픈 일만 있을 것입니다(고후 2:02~03).

왜냐하면 고린도교회에는 징계받아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고후 02:05~07). 특별히 불신 세계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매우 흉한 죄악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고전 05:0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 도다.

 

바울은 당장이라도 가서 징계할 수도 있으나 그 길을 잠시 미루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고후 02:07).

목회자로서 매우 지혜로운 자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성도 가운데 일부분은 바울의 인내와 용서하는 마음을 왜곡(歪曲)하여 도리어 비난하였습니다.

 

이런 좋지 못한 소리가 들려옴에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위하여 모든 비난을 참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이런 형편에서 고린도교회로부터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스데바나가 두 사람을 데리고 바울에게 찾아왔습니다. 온 이유는 먼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충고와 애정을 잘 받아들였다는 소식입니다.

바울에게는 고린도교회 전체가 바울에게 사도님, 이제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스스로 자정하는 능력을 발휘하여 잘 수습했습니다. 라는 소식이 최고의 소식입니다.

 

 

2. 바울을 찾아온 스데바나의 신앙 품성을 보겠습니다.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섬긴다는 말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스데바나의 가족이 어떤 방법으로 봉사하였는지는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의 사회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주로 병든 자나 가난한 자를 돕는 일과 자기 집을 집회 장소로 내어놓은 것이 아닌가로 봅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반면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한두 번 정도, 혹은 일시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계속 섬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온 가족이 섬김의 자리에 있다고 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시원한 마음을 전해 주는 일보다 귀한 일이 있습니까? 시원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귀한 성품입니다.

이웃을 돌아보는 섬김은 상대방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그러나 섬김의 자리를 모르는 사람은 항상 상대방의 마음을 답답하게 합니다.

어떤 사귐에도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만나면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더 이상 만나고 싶지를 않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성도 섬기는 일에 각오합니까? 교회에 충성하기로 작정합니까?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섬기는 곳에 시원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변덕입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 오늘은 좀 좋았다가 내일은 궂은 날씨 변하는 것이 불안의 요소입니다.

 

이왕 섬기기로 작정했으면 그 일을 믿음으로 감당하십시오. 한 번 충성하기로 맹세했으면 죽는 날까지 봉사하십시오. 무엇을 자꾸 이랬다저랬다 합니까?

걸핏하면 교회를 옮긴다고 하는 사람, 적응이 잘 안된다는 사람, 마음을 못 정했다면서 자주 갈등하는 변덕쟁이를 만나면 모두가 힘이 빠집니다.

 

신앙생활은 믿음의 심지가 곧아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휘청, 저 말을 듣고 휘청하면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김해삼일교회 여러분, 성도 섬기기로 작정합니까? 주위의 시선에 구애되지 말고 그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마음을 잘 지키십시오. 주님께서 힘을 주심으로 더 잘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나기만 하면 참 편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행복을 느낍니다. 안 만나면 오히려 슬픕니다. 자주 만나야 복이 됩니다.
그런데 만나면 항상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큰일 난 지가 언제인데 만나기만 하면 큰일 났다고 합니까?

이런 사람은 평안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스 메이커입니다. 피곤하게 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언제나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성도가 됩시다.

 

잠 25: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3.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은 알아주어야 합니다.

 

18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를 시원하게 한 이 스데바나가 누구입니까? 바울이 매우 귀하게 여기는 스데바나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스데바나(Στεφανᾶς). 왕관(면류관)을 쓴, 이런 의미입니다. 그는 고린도 사람이며, 그의 가정은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가정 중의 하나입니다(고전 01:16).

브드나도(Φορτουνάτος 포르투나토스). 이름 뜻은 행복한, 행운으로서 라틴어 이름입니다. 아무래도 출신이 종의 처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가이고(Ἀχαΐκός). 이름 뜻은 아가야에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노예이거나 노예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혹자는 01:11을 근거로 글로에의 종들이라고 추정합니다. 스데바나가 두 사람을 데리고 바울에게 와서 아주 특별한 말을 합니다. 아주 신선한 말입니다.

 

마음을 시원케(ἀναπαύω 아나파우오) 하였으니.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말입니다. 단지 감정상의 위로가 아니라 영혼까지 참 안위를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알아주라(ἐπιγινώσκω 에피기노스코). 에피(ἐπι 위에)와 기노스코(γινώσκω 알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의미는 진가를 충분히 인정하고 도와주라는 뜻입니다바울은 이런 사람의 가치를 교회가 충분히 인정해 주라고 권합니다. 정말 귀한 분입니다. 분명 산소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더러는 내가 하지 않으니 은근히 남이 수고하는 것을 배 아파하며 방해하지는 않습니까내가 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수고하는 자들을 받들어주는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상대방의 걱정을 덜어주는 일, 얼마나 가치 있는 일입니까?

 

시원하게 하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습니다. 이런 성도가 많이 모일 때 행복한 교회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가보고 싶은 교회가 됩니다.
바울은 마음을 시원하게 한 또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인지 짐작하십니까? 바로 오네시보로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딤후 01: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격려해(ἀναψύχω 아납쉬코) 주고. 상쾌하게 하다, 원기를 회복하게 하다. 용기를 북돋아 주다. 라는 뜻입니다. 오네시보로는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을 자주 찾아 위로하고 마음을 유쾌하게 한 사람입니다. 마음을 격려해 주는 매우 귀한 일입니다.

 

성도 간에도 이런 교제의 장이 넓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은 물질이 많은 자가 아닙니다. 많이 배운 지식인도 아닙니다. 특별한 권세를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를 믿음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어떤 평가를 받습니까? 주위의 사람이 여러분을 어떻게 본다고 생각합니까?

 

시원하게 하는 사람입니까? 섬기는 일을 기쁨으로 알고 봉사합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알아주시고 성도들이 인정해 주는 은혜의 복이 따릅니다. 스데바나처럼 시원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런 일에 잘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에밀 디킨슨(Emily Elizabeth Dickinson, 1830, 12, 10~86, 05, 15)의 헛되지 않으리. 라는 시()의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만일 내가 한 사람의 상심을 건질 수 있다면 내가 사는 것은 헛되지 않으리. 만일 내가 한 사람의 괴로움을 덜어줄 수 있고 그 고통을 시원하게 해줄 수 있다면 한 마리의 허덕이는 안락 새를 구하여 그 둥지 속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다면 내가 사는 것은 헛되지 않으리.

 

스데바나가 두 사람을 데리고 교통도 좋지 않은 그 시대에 고린도에서 500km나 되는 에베소의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바울의 아픈 마음을 시원하도록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조금이라도 좋습니다. 내가 사랑해 줄 수 있고 또한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시원함이 주어지면 나의 삶은 대단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고 대신 교만함이 싹틉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은 늘 원망과 불평이 쉬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한쪽 말만 듣고 오해하며 또 오해하고 있는 자를 찾아가서 더 혼란스럽게 합니까? 화목하게 하는 자가 아니라 화목을 깨뜨리는 자입니다.

 

김해삼일교회 가족 여러분, 주님께서 제자들 발을 씻기신(13:01~15) 것처럼 나도 입이 아니라 손과 발로 봉사하는 일에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이쪽저쪽을 화해하게 하여 양쪽 모두에게 평안의 만남을 이루어 주는 사람(peace make)이 되십시오. 말씀을 따라 좀 의젓하게 그런 역할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 05:0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