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09년 말씀

나도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눅 19:01~10)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09. 2. 15.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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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09, 02, 10)에 이런 내용이 올라왔습니다. 궁합 좀 봐 주세요. ㅠㅜ급해요. ㅠㅜ 7년 만난 남자친구가 있어요.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자친구 엄마가 궁합을 보고 반대하시네요.(ㅠㅜ) 궁합 보실 줄 아는 분 있으시면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너무 답답하네요. ㅠㅜ.


남자 1983년 01월 05일 오전 11시, 여자 1982년 03월 22일 오전 07시 15분.


이에 대한 답이 올라왔습니다.
두 사람의 궁합은 성격 심리코드에서는 무난하나 사주의 조화에서는 흠이 크다. 남자 쪽에서 궁합이 나쁘다고 했다면 어이없다. 오히려 남자의 사주가
여자를 힘들게 하는 사주고 이혼이나 사별이 있는 사주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지금 사귀는 입장이라 서로의 장단점을 상세히 알 수는 없어 궁합이 나쁘다고 결혼을 반대하니 불쾌하겠지만 실제 두 사람이 결혼하고 한 울타리에 들면 의견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궁합이다.
인생 한 번 뿐인데 서로
잘못 만나 불행하게 사는 것보다 좋은 사람 만나 한 평생을 알콩달콩 잘 살라고 반대하는 것이다. 지안명인 미담. 즉 헤어짐을 받아들이라는 그런 내용입니다. 과연 이러한 사주팔자 궁합 같은 것에 의해 정든 사람과 헤어져야 할까요?
아무래도 아니죠? 물론 서로가 잘 만나야만 행복을 창출 할 수 있습니다만 사주팔자와의 만남은 불행한 인생길의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행복한 인생은 복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자녀는 좋은 부모를 만나야하고, 아내(남편)는 좋은 남편(아내)을 만나야하며, 제자는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중요한 만남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어부 시몬이 주님을 만난
후 변하여 수제자가 되었고, 핍박자 사울이 변하여 사도 바울이 되었으며 오늘 말씀의 주인공 삭개오도 죄인 취급을 받던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난 후 새로운 삶,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우리 성도 여러분들도 삭개오처럼 주님을 만나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십니까?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1. 삭개오의 삶의 이력서


0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는 전통적 유대인의
이름으로서 본래의 뜻은 청결한 사람 또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인데 세리장(稅吏長)의 직책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가 근무하는 여리고는 베뢰아 지방으로부터 요단강을 건너가는 통상인들의 길목에 위치한 국경도시이기에 세관이 있었습니다.
그 세관에서는 주로 길르앗
지방으로부터 유입되는 향유 등 여러 상품에 대한 통관세와 그 지방의 특산물에 대한 세금 등을 징수하였습니다. 삭개오는 당시 로마의 공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도에 다라 자율적으로 세금을 징수하면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삭개오를 소개할 때에 부자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겁니다.

당시 세리에게는 허가 낸 도둑이라는 별명이 붙여졌고 이로 인해 세리를 향한 동족들의 시선도 대단히 싸늘하였습니다. 특히 세리가 지나가면 뒤에서 야, 저기 세리가 지나간다 하면서 욕질을 하고, 돌을 던지며, 침을 뱉는 일과, 딸 가진 사람은 아예 사위로 삼지 않는다고 까지 했습니다.

이 세리라는 직업이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불쾌감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직업이었는지를 알 수 있으시죠? 이러한 삭개오를 사람들이
얼마나 미워하였겠습니까? 아마도 같이 있는 것조차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어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삭개오의 교육수준을 한 번 추적해 볼까요? 당시의 로마의 공권력을 등에 업은 세리장이었다면 세상적인 면에서 상당한 식견과 지식을 필요로 하는 직책입니다.
왜냐하면 국경도시의 한 세관장으로 근무하려면 적어도 한 3,4개 정도의 외국어를 무난히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정도의 언어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일찍부터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삭개오는 회당교육에서 상당한 지식을 쌓은 사람으로 짐작이 됩니다.
 


 2. 삭개오는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길 원했습니다.


0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03절 말씀을 볼 때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일찍부터 듣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기적이나, 나병환자가 치료받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맹인이 눈을 뜬 사건 등 예수님이 들면 모든 문제 해결된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 가운데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려 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①여리고성 경내에서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 중에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통하여 눈을 뜬 기적과 이로 인해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18:35~43; 막 10:46~52)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삭개오 자신이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②자기와 같은 세리의 직업을 가진 마태를 예수님께서 불러 제자로 삼으셨다는 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리를 죄인 취급하고 손가락질하는 데도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치도 않고 외면치도 않으신다는 소문이 삭개오를 진하게 감동시켰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내가 예수님을 꼭 한 번 만나보아야겠다 라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처지를 이해해 주고 받아주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문이 열리고 정이 가게 마련 아닙니까? 이러한 상황을 맞이함으로 인해 삭개오는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고자 하는 갈급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그분이라면 정녕 세상의 금력과 권력이 답해주지 못한 문제, 자신의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는 남에게 말 못할 인생의 문제를 능히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으로 알았기에 만나려는 겁니다.

잠 0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마 08:01~04절에 보면
산상보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는 예수님을 허다한 무리가 좇았으나 그 가운데서 오직 나병환자 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습니다. 즉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예수님을 만나 병 고침을 받아야겠다는 그 간절한 마음이 군중 사이를 뚫고 감히 예수님 앞에 나아가 나병의 치료함을 받게 된 겁니다.

마 08:0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0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3.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걸림돌 되는 요소를 극복했습니다.


0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03절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기를 원하나 그 만나는 일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두 가지 난점을 체크 해 주는 말씀입니다. 삭개오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나려 했지만 키가 작다는 걸림돌과, 사람이 많다는 외적인 걸림돌의 요소가 그를 예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장에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을 포기하기보다는 다른 비상적인 방법을 찾게 되었는데 난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04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0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님의 일행이 지나는 방향으로 미리 앞질러 가서 기다리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는 말씀 아닙니까? 앞 절에서 언급된 삭개오의 한계 즉 예수님을 만날 수 없게 하는 두 가지의 걸림돌을 요소를 극복하려는
삭개오의 강한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물론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게 됨으로서 세리장의 외적인 근엄한 모습이 구겨진 좀 점잖은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꼭 만나기 위해서 자기의 단점의 한계성을 극복해 내는 놀라운 지혜는 칭찬할 만합니다.
03절에서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다는 이 말씀을 영적인 면에서 우리의 생활에 적용해 본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 성도라면 분명히 이와 같은 영적 장애 요소를 극복하는 일을 선결 과제(先決課題)로 삼아야 합니다.
삭개오는 환경이 불리하거나 불가능하다고 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좀 멀리 앞에 있던 돌무화과나무를 활용하여 예수님을 만나려는 그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믿음의
결심을 막는 방해물이 있습니까? 뛰어 넘어야 합니다. 결단을 막는 장애물이 있습니까? 뛰어 넘어야 합니다. 모든 방해물의 요소들은 반드시 극복해야 됩니다.
마가복음 02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상채로 매고 온 네 명의 친구도 눈앞의 환경만을 보았을 때는 도저히 집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고 달아 내림으로서 예수님으로부터 치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막 02:0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마 07:0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0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4.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가정을 심방하십니다.


0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예수님을 꼭 만나야겠다는 그 열정과 그 열망과 그 간절함 때문에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세리장의 이름을 주님은 직접 부르십니다. 삭개오란 이름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아셨을까요?
주님의 신적 전지성에 의해 그 이름을 아셨을 수도 있고, 혹은 삭개오의 이름이 이미 여리고 땅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무리들 중에서 야 저 돌무화과나무 위에 삭개오가 올라가 있다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알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얼마나 놀라우신 은혜와 자비와 긍휼입니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는 주님의 음성이 얼마나 다정스럽게 들립니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이 놀라우신 주님의 은혜를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서 체험해 보지 않으렵니까? 이 놀라우신 주님의 자비를
여러분은 오늘 이 시간에 맛보지 않으렵니까? 이 놀라우신 주님의 긍휼하심을 바로 이 순간에 느껴보지 않으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순간에 찾아옴을 영안으로 바라보십시오.


고후 06:0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삭개오의 가정을 심방해 주시는 주님께서 지금 이 시간 우리의 가정도 심방해 주셔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심령도 찾아주셔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사업장도, 일터도 직장도 찾아주셔야만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모든 문제가 풀리고 열리고, 확장되는 축복이 임합니다. 물 댄 동산과 같은 신령한 은혜가 넘친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십시다. 나 같은 사람도 찾아주시는 은혜를 체험합시다.


계 03:20 볼 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0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예수님은 부르시고 삭개오는 내려와서 즐거움으로 가정에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니 이 즐거움이야말로 삭개오가 세상의 권력과 물질로 채워보려 했으나 채울 수 없었던 진정으로 찾고자 했던 행복 아닙니까? 이제 삭개오가 찾아오신
예수님을 가정에 모실 때 그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0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서서 주께 여짜오되.
삭개오가 서서 말하고 있는 이 장소는 자신의 집안입니다. 아마 식탁이나 탁자 주위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말하는 것으로 여기 일어서서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말하는 사람의 진지함과 진실성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예수님께 대한 호칭을 신앙적인 의미의 주님이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삭개오는 보시옵소서라는 말로서 자신의 의지의 단호함과 실천 가능성에 있어서 자신 만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당시 랍비들에 의해 제시된 구제비(사회 환원)는 소유 재산이나 혹은 수입 부분에 있어서 20% 정도였는데 그에 비해 삭개오는 절반을 내어놓겠다고 했으니 이는 대단히 파격적인 액수입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당시의 세리의 생활이나 자신의 생활상이 도둑과 같은 모습이었음을 인정한다는 표현입니다. 사실 인생의 변화가 여기까지 이를 때 비로소 신앙의 열매 맺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 아닐까요?

0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배타적인 대접을 받아온 삭개오를 공동체로 복귀시켜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한 형제로 맞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당시 종교적 복권은 곧 정치와 사회적 복권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전인적 인간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