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09년 말씀

일어나서 빛을 발하십시오.(사 60:01~11)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09. 2. 2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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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교 물리학 시간에 교수 한 분이 학생들에게 다소 좀 낮은 듯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낮이 끝나고 밤이 시작되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누가 대답할 수 있습니까?
답은 해가 뜨면 낮이고 달이 뜨면 밤이라는 사실쯤은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명색이 대학 강의시간 인데 이런 질문이 나올 때는 어떤 의미가 있었겠죠? 그때 한 학생이 일어나서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낮과 밤의 구별은
멀리 떨어진 동물이 개인지 고양이인지 구별할 수 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모두들 웃었습니다. 또 한 학생이 답변하기를 멀리서 걸어오는 교수님이 대머리 물리학 교수인지, 아니면 대머리 화학 교수인지 분간 할 수 있을 때라고 말하면서 교실 안은 한 순간 폭소로 뒤덮였습니다.

혹자는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빗대기를 캄캄한 어둠 속 어디 하나 빛을 찾아볼 수가 없는 암흑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에 대해 더러는 그래도 아직은 빛이 완전히 꺼지지는 않은 희망이 조금은 있는 세계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 어둠이 계속 내리고 있지만 아직은 희미하게나마 밝음과 희망의 빛이 꺼지지 않은 현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능히 밝음이 극복 될 현실 아닐까요?
오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멸망한 후 오랜 세월 포로 생활을 하다 고레스 왕의 칙령(勅令)으로 B. C 538년 돌아오게 된 때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그때를 빛이 회복되는 때로 상정하여 말씀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01). 는 이 말씀을 놓고 봅시다. 나 자신이 암흑 속에 있는데, 나 자신이 어둠에 묻혀서 앞뒤 분간을 못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빛을 비추고 구원을 선포한단 말입니까? 나 자신이 암흑인데 누구에게 복음을 선포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 자신은 빛이 아니지만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빛이 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나를 통해서 빛나게 됩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빛이 나고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게 됩니다.


 1. 01절 말씀의 배경을 보겠습니다.


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북 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에, 남 유다 왕국은 바벨론에 함락되어 나라가 완전히 문을 닫았습니다. 고대에서 전쟁에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줄을 잘 알지요. 즉각 포로의 생활, 불행의 길에 들어서는 겁니다.
전쟁에 졌기 때문에,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을 빼앗기고 성전도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소망 없이 그날그날을 고통과 신음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이 속한 이사야 56장부터 66장까지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첫 20년 사이의 시대를 배경으로 예언 된 말씀입니다.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바벨론 포로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유대인들 중에 더러는 그곳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조국의 부흥을 위하여 바벨론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와 보니 예루살렘은 그들이 상상했던 그 옛날의 거룩한 성지가 아니라 짐승들이 노니는 허허벌판이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거기에서 새롭게 성전을 건축하고 성벽을 쌓고 자기 집도 짓고 거리도 정리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과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바벨론의 정책을 따라
이주해 온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는데다 아무리 도시를 보수한다고 해도 여전히 예루살렘은 허전키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끼리의 증오심과 이기심이 그들 사이를 갈라놓자 믿음으로 바벨론 생활을 접고 돌아온 사람들은 이렇게 살려고 고국에 돌아왔던가? 라는 회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그 삶이 무기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며 열심히 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울부짖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희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0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이사야서 59장을 읽으면 침울함과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책망하고 있지만 60장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곧 장차 오실 여호와의 영광의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온(교회)과 그의 백성들(성도)의 구원 성취를 예언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의미로는 지금은 비록 바벨론의 포로 생활로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장차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하나님을 섬길 것을 묘사합니다. 이 예언은 단순히 회복 될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한 사건의 내용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임할 최후의 영광을 예표하고 있음이 그 특징입니다.
 

 

 2. 빛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신음과 고통 속에서 일어나 우선으로 할 일이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죄악으로 인해 황폐해진 이스라엘 자체에는 빛이 있을 턱이 없으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자체로부터 나오는 치유의 빛 구원의 빛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거듭나게 되어 빛을 발할 수 있는 근거가 제시됩니다. 빛은 발광체와 반사체가 있지 않습니까? 이 빛이 무엇인가를 요일 01:05절이 설명을 합니다.

요일 01:0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예수님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01:09) 라 하셨고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09:05) 하셨습니다. 이 빛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되어 온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빛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나는 홀로 빛을 발할 수가 없는 것은 그 빛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밤에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가다 보면 이정표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정표가 마치 불을 켜 놓은 것처럼 밝아서 눈에 확 띕니다. 그렇다고 표지판 자체가 빛을 내는 건 아니죠? 빛이 없으면 표지판도 보이지 않습니다.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빛 되신 예수님을 전하고 그 빛을 전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 0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제각기 빛이 있는데 그 빛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바로 착한 행실이라고 하십니다. 성도의 착한 행실 이것이 불신자에게 빛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나는 어떤 빛을 발하고 있습니까? 나의 신앙생활이 불신자에게 보여 질 때 과연 저들이 나를 통하여 어떤 복음의 빛을 볼 수 있느냐 말이에요?
내가 진정 복음의 빛을 비추려면 믿음의 위치에 서서 의로운 행실로 인하여 비춰지는 겁니다.

엡 05:0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0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이 시간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볼까요? 빛을 발하기를 진정 원하지만 빛 된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가진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 안에서 거듭나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도 역시 어둠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는 말씀은 어두워진 세상에서 죽음과 절망의 고뇌 속에 시달리는 인생들에게 산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의 말씀입니다.

 

 3. 빛을 발하기 위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①절망과 위기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이때에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때로 볼 수 있습니다. 유다 왕국은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패하였고 또 예루살렘 성전도 불타 훼손됨으로 인해 그들에게 기다려지는 것은 곧 처하게 될 포로생활에 대한 공포인데 이러한 위기 가운데서 이사야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일어나라는 명령입니다.
패배 가운데서 일어나라, 좌절 가운데서 일어나라, 위기 가운데서 일어나라, 너희들의 그 절망에서 당당히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강대국 틈새에 끼어 눈치보고 살기에 정신이 없었지 않습니까? 북 왕국은 앗수르 눈치 보기에 바빴고, 남 왕국은 바벨론과 애굽 눈치 보기에 바쁨으로 인해 사대주의 사상으로 친 애굽파, 친 앗수르파, 친 바벨론파로 국론이 분열 된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시대가 지나갔으니 당당하게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주변의 강대국들이 이스라엘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도우시겠다는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사 36:06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 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②지금 여기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항상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라는 겁니다. 한 번 일어나려고 하다 주저앉지 말고 일어설 때까지 계속 반복하라는 말씀이에요. 창조주의 명령 앞에는 죽은 자가 일어납니다. 병자가 일어납니다. 안 풀리던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지금 이 시간 그 전능자의 명령을 우리가 듣고 있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께서 지금 위기와 절망 가운데서 힘들어 합니까? 전능자께서 일어나라고 하심은 지금 나를 풀어주시겠다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다음에 라고 다짐만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일어나야 합니다.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허물과 얼룩진 습관에서 일어나십시오. 일어나는 것이야말로 다음 행동으로 발걸음을 옮겨놓는 첫 단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저앉아서는 아무 일도 못하고 드러누워서는 더욱 아무 일도 못하지 않습니까? 영적인 면에서 대단히 침체되어 있다면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일어나라는 말씀을 가끔 하셨는데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을 때 그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한 후 관을 향하여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눅 0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좋은 결과가 따르며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거기에는 항상 기적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우리가 빛을 발한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04절 말씀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같이 읽읍시다.

04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①사람들이 모여옵니다.

04절에 중요한 동사적 표현이 세 번 거듭 나오는데 여기 무리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문자적으로 본다면 세계 각처로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사 11:12) 및 선택받은 이방인을 지칭하는 말로 받으면 됩니다.
영적인 면에서 이 말씀을 받는다면 여기 사람들이 모여 온다는 것은 교회가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발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나아온다는 말입니다. 곧 교회의 부흥이라는 말씀이지요.
생명의 빛을 보고 돌아올 자가 많다는 것은 우리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의 마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 축복의 말씀을 우리교회가 받아야 합니다.
저는 상당한 기대와 흥분을 가집니다. 우리가 주님의 빛 된 역할을 제대로만 한다면 바로 내 속에 역사하시는 주님의 빛을 통해서 우리교회로 많은 사람이 온다는 사실 말입니다. 믿으시면 아멘입니다.
나를 통하여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로 올 자가 많이 있다면 내가 어떠한 목적으로 살아야 할지를 새롭게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입술로, 착한 행실로 이 빛을 발함으로 생명 구원의 역사를 함께 나누는 축복을 누립시다.

②물질세계가 옵니다.

05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온갖 물질의 세계가 다 뒷받침 될 것이라 하였으니 이 넘치는 축복을 어떻게 주체하겠습니까? 정말 놀라울 일입니다. 바다의 부…. 이방 나라의 재물….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이 70년 기간을 마치고 귀환 할 때 이방의 큰 재물이 지원되겠다는 예언입니다(스 01:06). 동시에 이방의 재물이 무엇인지 그 구체적인 목록들이 06~9절까지 계속 소개되고 있습니다.

11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성문이 항상 열려있다는 것은 태평세월을 누린다는 뜻으로서 침입자의 도전이 없을 때 가능한 일이죠? 이러한 일은 인간의 권력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약육강식의 원리를 따라 도전과 정복의 욕망을 지울 수 없기 때문에 성문이 항상 열려 있기 위해서는 전능자의 보호하심이 따라야만 가능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이 말씀을 받는다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원하는 자들을 위하여 교회의 문 믿음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는 의미가 되겠죠?(행 14:27; 계 03:08)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빛을 발하기만 하면 여러분 개인이나 가정이나 생업의 터전이나 교회가 영육간의 축복을 충만히 누릴 것임을 확인해 줍니다.
우리가 주님의 빛을 발하기만 하면 지금의 나의 삶이 축복으로 새롭게 전환된다는 이 말씀이 여러분들을 지배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금 주목해서 보십시오.
믿음이 회복되고 영혼이 회복되기만 하면 복과 은혜가 동서남북에서 모여든다고 약속합니다.
내 신앙이 회복되고, 내 영혼이 복을 받으면 떠났던 사람이 돌아오고, 잃었던 재산이 회복되고, 예기치 않았던 복이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합니까? 환경부터 안정시켜 놓아야 합니까? 집을 새로 수리해야 합니까? 이 모두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의 무너진 믿음의 집을 새로 고치는 것이 영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동서남북에서 몰려오는 축복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나만 바라보고 주변만 바라보면서 절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하지 맙시다. 20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20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참으로 가슴 설레는 이 말씀,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는 이 감격스런 말씀이 성도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어나 빛을 발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일어나 빛을 발할 때 축복의 사람이 되며 일어나 빛을 발할 때 하늘의 복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