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09년 말씀

누가는 종의 길을 자원하였습니다(딤후 04:09~11).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09. 3. 1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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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에는 성전의 건축 목재로서 레바논 산(産) 백향목을 사용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이 나무로 성전을 지었는지 아십니까? 

여간해서 썩지 않고 좀도 먹지 않는 데다 그 단단함이 어느 나무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급 품질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은은한 향기 또한 좋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논할 때 백향목 나무의 성질을 따라 백향목 관계라는 표현을 합니다. 요즘 세태가 어떻습니까? 좀 이용 가치가 있겠다 싶으면 잘 사귑니다

그러다 별 이용 가치가 없으면 단번에 외면하는 그런 인간관계입니다. 그런 친구, 그런 부부관계, 그런 신앙 관계를 떨쳐버리고 백향목 같은 변질하지 않는 인생을 살기를 바랍니다.

 

걸핏하면 떠나 버리는 철새 교인이 판을 칩니다. 이런 환경에서 백향목 같은 한 믿음의 사람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주님 나라를 위하여 자기 삶을 이름 없이 던진 한 사람, 자기의 모습은 완전히 감추며 산 누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감추고 산 누가, 그는 어쩌면 당대의 사람들로부터 자기가 헌신한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세상 가치관 평가보다 주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며 바울의 종으로서 삶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누가는 종의 길을 자원하였습니다.」로 정했습니다.

 

 

1. 누가의 인적 사항을 살펴보겠습니다.

 

골 04: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누가(Λουκᾶς Luke). 수리아 안디옥 출신으로서 그 이름은 빛나다, 총명하다는 뜻입니다. 그의 직업은 골 04:14에 의하면 의사입니다.

의사의 일을 하다 하나님 섭리로 A.D. 50년경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 때 드로아에서 바울 선교팀에 합류하였습니다(행 16:10, 21:25).

선교의 일원으로 빌립보로 건너갔으며 바울이 가이사랴와 로마에서 옥중생활을 할 때 바울의 주치의요 대필자로 봉사하였습니다(행 24:23, 28:16).

데마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십자가의 도를 버리고 바울 곁을 떠났으나 누가는 바울 곁을 마지막까지 지킨 믿음과 의리의 인물입니다. 본받을 만한 인물입니다.

 

누가는 헬라인 의료인으로 의료 선교사로 좀 더 편하게 복음 전하는 생활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누가의 이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사역자 가운데 두드러지게 활약한 인물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의 후기 서신에 세 번 정도 나옵니다. ➊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골 04:14), ➋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 04:11), ➌나의 동역자…. 누가가 문안하느니라(몬 01:24). 정도입니다.

 

누가는 이방인임에도 두 권 성경을 남겼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눅 01:03, 행 01:01). 저술 내용이 아주 자세하고 연대도 매우 정확합니다.

초대 교회사에 남긴 매우 중요한 기록물입니다. 신약성경 27권에서 권수로는 사도 바울이 13권, 사도 요한이 5권, 베드로가 2권, 누가가 2권 마태를 비롯한 여러 저자가 각 1권입니다.

그러나 분량으로는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제일 많습니다. 가정이지만 누가의 기록물이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사나 사도들의 행적을 제대로 알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도 설교 본문으로 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사도들의 선교 행적을 누가가 로마의 고위직을 지낸 데오빌로에게 보낸 것이 하나님 섭리로 보아야 합니다. 

누가의 기록물이 존재해도 공개되지 않으면 없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데오빌로에게 보낸 것이 잘 보존되었고 적절한 때에 공개되었으니 하나님의 특별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가의 특성을 살려서 교회사의 행적을 알리는 일에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초기 교회사의 종합분석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점점 교회가 생겨나자 누가는 수집한 여러 자료를 분석하고 목격자들까지 인터뷰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사사로운 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도들 행적과 여러 지역 특성 및 교회 지도자들, 복음 사역 등의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공개했습니다. 누가의 기록이 대단한 가치를 지닙니다.

 

눅 01:0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0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2. 누가는 선교의 현장에서 자기의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행 16: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성경 기자 가운데 누가는 이방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그 분량이 대단히 많습니다(24장, 28장).

그런데 누가는 자기 이름을 한 번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매우 중요한 역할에서는 자기의 이름을 넣어 영웅처럼 묘사할 수도 있는데도 말입니다.

누가가 이렇게 자기 모습 감추는 것은 알려지는 일에 나서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선교의 주인공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만일 알려지기를 좋아하는 영웅 심리가 있었다면 얼마든지 자기 이름을 주인공처럼 끼워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런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을 보면 둘 다 그 속에 저자가 누구인지 직접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시작할 때 누가는 자기 이름 대신 나라고만 칭합니다. 눅 01:03….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행 01:0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

누가의 저작물 두 권을 잘 보십시오. 두 번 외에는 여러 선교 현장에서 나라는 단수는 없고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합니다. 우리 속에 내가 들어 있다는 정도입니다.

누가는 선교의 현장에서 자기를 감추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믿음의 일꾼은 인기인으로 부상(浮上)하기보다 잊히는 자리를 더 좋아합니다.

 

겸손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겸손의 자리를 택합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특별한 한 인물을 소개합니다.

바로 이름 없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눅 10:30~37). 마태 마가 요한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생략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만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 현장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무명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여러분 그 사람 이름을 아십니까? 아시면 알려주십시오. 누가가 그런 인물이 되기를 원했다는 뜻입니다.

 

누가는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행하면서 바울을 극진히 시중들었습니다. 사도행전 곳곳에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합니다(행 16:11~17, 20:05~15, 27:01~28:16).

우리라는 명칭은 사도행전 저자로서 바울의 선교지마다 동행했다는 증거입니다. 누가가 바울과 함께하면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공적을 세웠다고 자랑하거나 생색내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에 바울을 나타내고 나머지 사람은 우리 속에 감추고 맙니다. 지도자 바울보다 앞서지 않아야 함을 잘 알았습니다.

 

바울의 조력자로 만족하며 바울을 돕는 것이 누가의 목적입니다. 누가는 자기의 헌신과 수고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바울을 앞세우는 것으로 즐거워했습니다.

누가의 이런 모습을 우리가 가지면 얼마나 복이 되겠습니까?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겸손하게 쓰임을 받으면 얼마나 복 된 일입니까?

복음서에 여자의 행적이 열두 명 정도 나옵니다. 이 가운데 누가복음에 여자의 이야기가 아홉 명 됩니다. 누가는 자기는 감추고 약한 자는 드러내어 돌보아 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여자의 복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복음서라고 합니다.

 

 

3. 누가는 바울을 마지막까지 도왔습니다.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변함없이 초지일관(初志一貫) 신앙생활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세월이 지나 대를 이어 섬기는 일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많은 사람이 충성을 다짐하고도 얼마 못 가 시험에 들고 무너지는 것을 흔히 봅니다.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내 마음과 뜻대로 안 되면 교회를 어렵게 하며 살며시 등을 돌립니다.

누가는 선교 대열에 이미 뛰어든 이상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을 만나도 바울을 돕는 일에 작정한 그 마음을 끝까지 유지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생 말년 순교를 앞둔 어느 한 시점에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부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순간 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

 

바울은 모두 나를 떠났지만, 누가만은 숱한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내 곁에서 위로자로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는 믿음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누가는 바울과 생사고락을 같이하였습니다. 오갈 데가 없어서 바울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의사가 크게 대우받는 신분은 아닙니다.

그래도 누가는 좋은 의술을 가졌기에 마음만 먹으면 바울을 떠나서 물질에 부담 없는 생활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길은 바울처럼 흙과 같이 내어 버렸습니다. 오직 복음과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바울과 함께 고난을 감수하고 복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수많은 환난과 고통이라도 누가의 충성을 꺾지 못했습니다. 그 헌신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마음을 변경시킬 수 없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선교 일을 도우면서 죽음과 다름없는 극한 상황을 수없이 만났습니다.

바울과 같이 선교의 대열에서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굶고, 함께 헐벗은 생활 하고,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면서도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누가가 바울을 향한 의리를 어떻게 끝까지 지킬 수 있었습니까? 자기의 처지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바울의 처지에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좋은 보조자는 자기보다 상대방 처지를 생각합니다. 마가 요한을 보십시오. 선교사의 수행자로 나섰지만, 자기 입장만 생각하다 보니 그만 바울의 선교 대열에서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행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이 일로 얼마나 선교에 큰 지장을 가져왔습니까? 후일 바울과 바나바 두 선교사가 마가 때문에 크게 다투고 헤어지는 아픔을 가져왔습니다(행 15:36~39).

그에 비하면 누가는 끝까지 바울 곁을 지켰으니 대단한 일꾼입니다. 참으로 부러운 일꾼입니다. 함께하고픈 일꾼입니다. 목회자 관점에서 꼭 찾는 일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믿음의 모습으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위한 일에 누가(자기 이름)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 말씀이 여러분 심령에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4. 누가는 복음 사역에 그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았습니다.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누가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 때 합류하여 3차 선교여행을 거쳐 최후의 로마 옥중에까지 함께하였습니다(몬 01:24). 바울이 로마 감옥에 두 번째 갇혔을 때입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여러 핑계를 대며 하나둘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섭섭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데마가 왜 데살로니가로 갔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지만 아마 데마의 고향이 데살로니가일 것으로 짐작합니다.

데마는 초기에 바울의 동역자로 인정받았는데도(골 04:14, 몬 24)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여 세상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은(τον νυν αιωνα) 현재 세상을 말합니다. 따라서 데마가 지금 세상이 좋아서 바울 곁은 떠나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데마가 어떤 형편에 놓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을 만났을지라도 천하보다 귀한 믿음만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데마가 그만 지키지 못했습니다.

 

옛 생활이 아무리 좋아도 영생보다야 좋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데마는 세상이 좋아 영생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때만 그러하겠습니까? 지금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불붙은 열심히 잘 믿다가 어느 순간 낙심자로 전락하는 말입니다. 교회를 이탈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기만 아니라 은근히 남도 자기와 같이 되도록 부추기기를 잘합니다.

같이 당을 짓고 행동합니다. 지금 바울의 옥중 뒷바라지 누가 합니까? 누가입니다. 누가가 어떻게 바울의 옥중생활에 동참할 수 있습니까?

당시 로마법은 로마 시민권자는 어떤 상황이든지 두 사람까지 노예를 둘 수 있었습니다. 누가는 이 법을 따라 바울의 종으로 등록하였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도 바울을 끝까지 받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의사이기에 바울의 주치의로서 건강 돌보는 일을 하였고 고독한 감옥생활을 하는 바울의 믿음의 동반자, 위로자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삶을 주님 나라를 위해 드렸습니다. 선교사 바울을 위하여 사명감으로 드렸습니다. 자원하여 고난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이런 선택은 오직 주님을 신실한 믿음으로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 누가는 언제나 자기의 유익보다는 남의 유익을 생각한 사람입니다.

누가는 바울의 선교를 자기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바울의 생각이 자기 생각이며, 바울의 소원이 자기의 소원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누가와 같은 진실과 의리입니다. 변덕 없이 교회를 다듬고 섬기는 굳건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 누가와 같은 인물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고대 중국 전국시대에 유방(劉邦 B.C. 256~B.C. 195)과 항우(項羽 B.C. 232~B.C. 202)가 싸울 때의 일입니다. 유방의 부하 장수 가운데 번쾌(樊噲)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번쾌가 이끄는 부대가 항우의 부대에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번쾌는 전령(傳令)에게 위급하다는 소식과 함께 주군에게 구원을 요청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러자 책임을 맡은 전령은 자기를 광인(狂人)으로 가장하였습니다. 또 발각되었을 때 안전과 비밀보장을 위해 스스로 자기 입속에 불덩어리가 된 숯덩이를 집어넣어서 언어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전령은 얼마 가지 않아서 적에게 체포되어 심문받았습니다. 그러나 언어장애인과 광인으로 인정되어 무사히 석방되었고 결국 임무를 완수하여 번쾌가 원군을 지원받아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사명 감당하는 일은 이처럼 자기희생이 꼭 필요합니다. 기독교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누가, 당대에는 그다지 알아주지 않았고 알려지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자랑거리와 명예에 관하여 초연한 모습으로 살기 원하는 일꾼을 김해삼일교회는 찾고 기다립니다. 

저도 몸 된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변함없이 충성하는 일꾼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자기의 취향에 맞지 않고 마음에 좀 맞지 않는다고 너무 쉽게 등을 돌리는 나약한 사람이 아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하는 일꾼 말입니다. 모두가 다 그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