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혼란했던 전국 전란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의 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던 3대 쇼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새는 죽여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는 새는 울게 하라. 도쿠가와 이에야스. 울지 않는 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라. 고 말했다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참지 못하는 조급성의 극치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적극적 도전정신을 보여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하며 멀리 내다보고 때를 기다리는 미래지향적인 리더십을 보여줍니다. 인류의 미래는 인간의 비전과 상상력에 달려있다(나폴레옹)고 했습니다. 얼마나 멋지고 미래 지향적인 말입니까? 인생은 내일에의 꿈을 키워 나갈 때 현실의 고난도 이겨 나갈 수 있으며, 인류사도 내일을 바라보는 미래지향적인 학자들에 의해 발달을 해왔고 지금도 계속 발달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내일에의 꿈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들을 향하여 미래가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 내일의 꿈을 포기하시오. 우리나라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곧 망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외친다면 그 소리를 듣는 모든 이들의 부풀은 미래의 꿈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아닐까요? 당장 국가 보안법(保安法)으로 체포되어 수감을 당할 처지에 이르게 될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고독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조국 유다 왕국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왕이 포로로 잡혀가고 나라도 패망하게 될 것이라는 비극의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로막는 절망적인 예언의 메시지인데 즉시 군인들에 의해 사회 기강 혼란 죄로 체포되어 수감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영적 우매함으로 인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레미야의 집안에 토지 매매 건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불확실한 현실의 난세(亂世)에서 왜 갑자기 매매 건이 등장하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를 성도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1. 인간의 상식을 저버린 부동산 매매가 있습니다. |
0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 지라…….
예레미야와 하나멜 이들은 사촌지간으로서 어느날 하나멜이 감옥으로 예레미야를 면회 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위로 차 온 것이 아니고 부동산 거래를 하기 위함입니다. 아마 그는 대단히 가난하였고 난세라 돈이 무척 아쉬웠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당시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부동산은 무용지물이었고 얼마라도 현금(금, 은)을 지니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하멜은 예레미야에게 어쩌면 목숨은 옥중에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니 이왕 죽을 바에야 자기를 위해서 가지고 있는 돈(은, 금)으로 땅이나 구입하라는 겁니다. 돈을 그냥 달라는 의미와도 같은 셈인데 이때 예레미야는 밭을 사라고 권하는 하나멜의 말을 여호와의 말씀인 줄로 알고(08) 그의 밭을 현금으로 즉각 매수(買受)를 하였습니다.
09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을지라도 그 형편에서 밭을 사는 예레미야의 입장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다 수감된 처지이고 나라가 흔들리고 내일을 알 수 없는 경제 불안정이 점차 가중되고 있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해도 밭을 살 입장이 못 되며 만일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느 정도는 관망해 보아야만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처한 현실이 그렇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무도 현실에서 부동산을 매입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내다 팔 사람은 있어도 살 사람은 당연히 없기 마련이에요. 어느 나라든지 경제가 조금이라도 불안의 기미가 보이면 주식 시장이 폭락을 하지 않습니까? 투매현상도 일어나고요. 여기 하나멜을 보십시오. 그는 예레미야와 사촌지간임에도 위로와 격려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대단히 의리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생각으로 재단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맞출 때 하나님께서 하나멜의 밭을 사라고 하신 그 뜻을 깨닫습니다. 즉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멜의 밭을 살 수 있었던 것은,
2.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회복되는 조국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예레미야는 비록 지금은 자신이 예언한 대로 유다가 곧 멸망할 것이지만 일정한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온다는 미래의 소망을 내다보았던 겁니다. 그때가 오면 농사를 짓게 되고 토지 매매가 성행할 것이라는 미래의 기쁜 소식을 영의 눈으로 내다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합니다. 유다왕국이 이내 폐허가 되고 잿더미가 된다 할지라도 그곳에서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았기에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토지 매매를 단행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레미야는 내일을 바라보는 철저한 미래지향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니겠습니까?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엘레나 루즈벨트 여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20세에 루즈벨트와 결혼을 하여 11년 동안 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에 한 아이가 그만 죽었습니다. 그러자 한 친구가 찾아와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 주었는데 그때 그녀는 그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에게는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또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다섯이나 남아 있다오. 그녀가 20세 때 결혼한 남자는 젊고 패기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남자였는데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관절염에 걸려 다리가 말라 버리는 불행에 직면케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쇠붙이를 다리에 대고 고정시킨 채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되었는데 어느날 루즈벨트가 엘레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불구자가 되었는데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하오. 그러자 엘레나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럼 내가 그동안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 줄 알았나요.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인격과 당신의 삶이에요. 당신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요. 꿈과 희망을 가지세요. 이 말은 다리 불구가 된 뒤 열등의식과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루즈벨트에게 내일에의 새로운 희망과 꿈과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1932년 다리 불구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1936년에 재선, 1940년에 3선, 1944년에 4선까지 되어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장차 오는 세상에서 얼마든지 좋은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체념의 말을 하는 때가 있잖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말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어갈 뿐이지 성공적인 세계로 인도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꿈을 가지는 것은 미래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민족의 멸망을 예언하면서도 멸망 건너편에 있는 하나님의 회복의 손길을 바라보고 민족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멜이 오늘을 위해서 내일을 팔아 버린 사람이라면 예레미야는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값지게 산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움이 다가올 때 이 현실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입니까?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고 어두움이 엄습하여 올 때 무엇을 할 것이며 내일이 없는 감옥 속에 던져질 때 어떻게 처신할 것입니까? 사방이 우겨 쌈을 당하고 절망을 당하는 순간인지라도 자포자기 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내일을 향한 빛을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내일이 없는 자들에게는 소망을 안겨주는 말씀으로서 예레미야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하나님도 항상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0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예레미야는 언제나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그 말씀이 당장에 잘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길을 택함으로서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고 어떤 삶의 상태로 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 바른 영적인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
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예레미야도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기에 의문점이 있었고 때로는 의아심이 생길 때는 하나님께 종종 묻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이 나라가 망한 다음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시점에서 많은 돈을 투자하여 밭을 사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 질문에 대하여 답이 27절이죠.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는 사람들은 절망의 벽을 깨고 일어설 수 있고 밭도 살 수도 있으며 불확실한 현실이라도 내일을 위한 투자를 능히 할 수 있습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사형장에서 야수의 먹이가 되기도 하였고 혹은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기도 했습니다. 이 순교의 행렬 속에서도 그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색깔은 결코 바래지지를 않고 오히려 고난과 박해 중에서도 마라나타 하였습니다. 즉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희망의 소식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믿음의 위로를 하였던 것입니다.
미래의 희망은 내일을 바라보며 내일을 사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절망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고 오늘에 도취되어 내일을 망각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습니다. 하나멜처럼 내일의 축복을 현실에 팔아 버리는 현실주의자들이 더욱 많은 이때에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값있게 투자하며 살아갑시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내일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의 십자가를 수용하였고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과 영생의 장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삽시다. 동물들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앞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사실을 알고계시지요. 그만큼 인간은 내일을 위하여 살아가는 미래 지향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보다 앞서 가시며 우리를 뚜렷한 목표가 있는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서 꺼져 가는 조국의 장래에 희망이 있고 내일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멜의 밭을 샀습니다. 그 땅이 어떤 특별한 값어치가 있어서 산 것은 전혀 아니기에 역사적인 시점에서 그 행동의 시사성은 대단히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오해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행위가 오해받기 좋았고 이상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안목을 지녔기에 대단히 고무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가 망할 거라는 소식이 들리면 저마다 은행에서 돈을 찾기에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런데 한 영향력 있는 사람이 은행에다 계속 돈을 예금한다면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동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미래를 신뢰하고 현실의 행동으로서 내일이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었던 겁니다. 예레미야는 내일의 걱정 때문에 오늘의 삶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그저 오늘의 주어진 일에 대하여 성실하게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스피노자(화란)는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였지 않습니까?
신성한 의무를 다하는 예레미야는 나라가 흔들리는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도 오늘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창조하면서 살아간 인물입니다. 때로는 주변의 사람들이 아니 저 사람 나라가 망한다고 해 놓고 자기는 부동산 투기를 하다니 그러고 보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구먼! 하면서 온갖 비방과 손가락질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주위의 비난이나 오해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민족에게 그래도 내일이 있음을 행동으로서 보여주는 한 마디로 비전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위기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처한다 할지라도 영광된 내일이 있음을 믿고 살아갑시다. 내일을 위하여 조국의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한 시대를 앞서가는 영적 통찰력을 지니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꾼으로 다함께 살아봅시다.
빌 0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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