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09년 말씀

이웃의 허물을 볼 때 어떻게 하렵니까?(창 09:20~2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09. 1. 10.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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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대통령을 마치면 정적(政敵)이 많이 생깁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속 좁게 굴지는 않습니다

미국 제37대 대통령을 지낸 리차드 닉슨(Nixon Richard 1913.1.9.~1994.4.22.)에게도 아주 골치 아픈 정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부통령을 지낸 허버트 험프리 상원 의원입니다. 이 두 사람은 오랜 정치 무대에서 서로 대통령이 되려고 다투었습니다.

서로 심한 충돌을 하였고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험프리가 죽기 사흘 전 친구이면서도 존경하는 제시 잭슨 목사에게 내가 풀어야 할 일이 있으니 닉슨을 꼭 불러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잭슨이 닉슨에게 연락하여 두 사람이 병상에서 만났습니다. 먼저 험프리가 닉슨에게 과거 자기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내가 그때는 자네의 작은 실수나 별것 아닌 일을 큰 흠인 것처럼 외치고 다녔네. 나를 용서해 주게 그래야만 내가 편안히 하나님 앞에 설 것 같아.

그러자 닉슨도 자네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자네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었어. 우리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서받기를 바라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은 병상에서 서로서로 용서의 기도를 올리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믿음의 사람 노아가 포도주를 많이 먹고 취하였습니다. 그만 자식들 앞에 벌거벗은 추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매우 민망한 일이지요.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본문 말씀을 잘 보십시오. 노아의 허물과 실수보다는 노아의 실수에 대한 아들들의 반응입니다.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노아와 가장 가까이 있는 자식들 그들이 자기 아버지가 실수한 행동을 놓고 막 비난합니다. 가족으로서는 매우 안 좋은 모습입니다.

우리도 인간관계에서 이웃의 실수를 볼 때도 있고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이웃의 허물을 볼 때 어떻게 하렵니까?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1. 이웃의 허물을 들추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2절에서 둘째 아들 함이 취한 행동 가운데 두 단어를 잘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22절을 읽으십시오. 느낌이 오는 두 단어 보고, 알리매라는 동사를 보아야 합니다.

①보고(רָאָה 라아). 이 단어는 지나가다가 슬쩍 보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계속 즐기며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아들 함은 어느 날 아버지가 술에 만취해 벌거벗고 누워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민망히 여기기보다는 그 부끄러운 광경을 즐겼다는 말입니다. 함의 이런 태도는 이웃의 잘못이나 실수를 보고 즐기는 악한 사람의 심성입니다.

 

이웃이 당한 부끄러움을 내 일처럼 나서서 수습해주는 모습이 안 보입니다. 오히려 그 허물과 실수를 즐깁니다. 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증거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이웃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고 여기는 놀부의 심정과 같습니다.

 

②알리매(נָגַד 나가드). 알게 하다. 폭로한다. 이런 의미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정이나 걱정해 주는 배려가 전혀 안 보입니다. 함은 이웃의 허물을 안중에도 없이 화젯거리로 삼습니다. 여기저기 떠벌립니다. 누구의 이야기를 누구에게 말합니까?

아버지의 보기 흉한 장면을 형제에게 말합니다. 자기를 낳고 양육한 아버지의 허물을 감추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폭로합니다.

드러낼 것이 아니라 감추어 드려야 할 일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형제들에게 가서 막 떠벌립니다. 불효막심한 아들 아닙니까?

 

삼하 01:17~27을 보십시오. 다윗은 자기를 그렇게도 못살게 굴던 원수 사울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난 것 같은 홀가분한 마음입니다. 잘 죽었다고 말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고소해하기보다 통곡합니다. 오히려 이런 노래(哀歌)를 지어 불렀습니다.

 

삼하 01:17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18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0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아마 보통 사람 같으면 빅뉴스 감이라고 여겨 동네방네에 알렸을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함의 태도와는 달리 남의 아픔을 아픔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웃이나 혹은 나하고 잘 못 지내는 사람이 실수하여 안 좋은 일을 당할 때 어떤 마음이 듭니까? 어떤 불행에 빠졌을 때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말입니다.

 

함의 태도처럼 그것 아주 잘 되었다고 하며 빅뉴스 감을 이 집 저 집, 전하느라 휴대폰이 불이 나는 것 아닙니까? 그럴수록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약점과 실수는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관대히 받아들입니다. 반면 남의 허물을 놓고는 필요 이상으로 비판하는 태도는 고쳐야 합니다.

 

잠 17:0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2. 이웃의 허물을 감추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①어깨에 메고. 히브리인들의 문화를 나타내는 말로써 이는 언제나 봉사하는 종의 태도를 표현합니다. 아버지가 실수한 것은 사실입니다. 너그럽게 이해해도 잘한 일이 아닙니다.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셈과 야벳은 아버지 섬기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②덮었으며(כָּסָה 카사). 셈과 야벳이 마음을 모아 아버지의 잘못을 덮어 주는 장면입니다. 아버지가 실수했지만, 그래도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인격을 보호하려는 조심스러운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아버지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데서 나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이웃의 허물이나 실수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봅니까? 옳다구나. 잘 되었네. 나하고 불편한 사람 잘 되었다며 고소해합니까?

은근히 흠집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느냐 말입니다. 함과 같이 상처를 드러내 더 아프게 만들지 맙시다. 셈과 야벳처럼 덮어 주고 사랑으로 감싸줍시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로 갈립니다.

 

벧전 04:0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일본 속담에 칭찬하는 말 한마디가 겨울 석 달을 따뜻하게 해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이익 하나로 서로 다투고 갈라서는 세상입니다.

삭막한 세상에 새길만 한 말입니다. 주님 안에서 서로 감싸주고 위로해 주는 좋은 말이 더욱 필요합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은 이웃의 허물을 안고 갈 수 있는 넉넉한 사랑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잠 11:11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

 

요즘 세계 리더 대학이라는 주 1회 강의 코스 모임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강의 중 하나가 미인대칭 교육인데 이런 내용입니다.

당신의 미소는 한국의 미소입니다. 당신의 인사는 한국의 예절입니다. 당신의 대화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당신의 칭찬은 신바람을 일으킵니다. 좀 더 요약하면 미인대칭이란 미소 짓고 인사하며 대화하고 칭찬하는 그런 의미의 뜻입니다

 

제직회를 하거나 임원회를 할 때, 교사회를 할 때나 월례회를 할 때 훈련된 천국의 언어와 절제된 감정 더욱 세련 된소리가 필요합니다.

자칫하면 거친 말, 더러운 말, 격동의 말, 가시가 돋친 말, 원망스러운 말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쏟아져 나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노아의 술 취한 행동을 평가해 봅시다. 일단 술을 과하게 먹고 취한 행동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이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김삼일 가족은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일단 노아의 술주정은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본 자녀들은 잘 덮어 주어야 합니다.

본인이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그 일에 직접 관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각각 자기의 일만 잘 살피면 됩니다(06:04).

 

 

3. 이웃의 허물을 들추는 자의 앞길은 불행입니다.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함은 아버지 노아의 행동을 놓고 밖에 나가서 자기 형제들에게 열심히 떠벌렸습니다(22). 떠벌리는 내용이 아버지에 관한 일입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떠벌리고 드러내고 신나게 공격하였습니다. 그 순간이야 얼마나 재미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남의 허물 떠벌리며 씹는 것보다 재미있는 일 없습니다. 이리저리 동네북처럼 마음껏 공격하는 재미를 누려보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습니다.

 

잠 26:22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08)

 

성경은 정당한 비판을 인정합니다. 올바른 비판은 역사와 문화와 내가 속한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의미의 비판을 분별이라고 합니다. 분별은 어떤 일의 상황과 요인을 모두 살펴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곤란에 빠진 사람을 이해하고 돕는 겁니다.

반면 상대방의 처지를 잘 모르면서 왈가왈부하는 것을 비판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런 비판을 금지합니다. 예수님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 07:0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0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함이 벌인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노아가 술이 깨어 둘째 아들 함이 한 일을 놓고 저주를 선언하였습니다(25). 함만이 아닙니다. 그 아들 가나안도 저주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먼저 알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흔히 함은 흑인의 조상이고, 셈은 황인의 조상이며, 야벳은 백인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꼭 그렇게 단정할 것은 아닙니다.

 

세 아들의 후손들이 흩어져 살아간 곳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입니다. 대강 짐작이 갈 뿐 꼭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함이 저주받아 아프리카로 갔고 그 후손들이 흑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설()입니다. 이는 과거 백인이 흑인을 착취하려 꾸며 낸 억지소리입니다.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6, 27절에서 중요한 것은 왜 가나안에까지 저주가 내려졌는가? 입니다. 연좌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난해 구절 중의 하나로 의문점이 제기되는 부분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행동이 다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구속사와 관계가 있는 것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의문점이 다소 해소될 수 있습니다.

 

가나안이 먼저 노아의 일을 보고 아버지 함에게 고한 진짜 범죄의 하수인이며 가나안도 이미 그의 아버지의 불경건과 죄악을 답습하고 있었다(Ambrose, Keil). 이런 해석입니다.

상대방 허물을 덮고 보면 좋은 것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보이고, 자기의 죄가 보이고, 형제의 존귀함이 보이고, 심판의 날이 보입니다. 이웃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은 사랑이 없는 증거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아버지의 실수에 대하여 가타부타하지 않고 오직 그 허물을 보지도 않은 채 덮어 준 그 결과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옵니다. 셈과 야벳 두 아들은 복을 받았고 아버지의 실수를 덮지 않고 열심히 떠벌린 함은 저주받아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사건에 대하여 함은 아버지를 욕되게 하였지만 셈과 야벳은 옷을 취하여 아버지의 허물을 가리어 드린 일이야말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같은 사건의 현장을 놓고 셈과 함과 야벳 세 아들의 행한 일은 복과 저주로 갈리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야벳은 셈과 더불어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시면 이웃을 허물을 가려 주고 칭찬하는 말을 많이 합시다.

 

이웃의 죄만 보는 사람은 이웃의 좋은 점을 보지 못합니다. 이웃의 좋은 점을 먼저 발견하면 나의 삶의 질이 더욱 윤택해집니다.

남의 장점을 보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랑의 힘은 상대방의 장점을 보게 합니다. 상대방의 장점 한 가지라도 귀하게 보면 더욱 행복해집니다. 생각을 바꾸면 이웃의 장점이 보입니다.

 

여기서 살펴보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노아의 장자가 셈, , 야벳 중 누구인가입니다. 한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창 06:14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창 10:21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이 두 절을 보면 셈이 장자로 보입니다. 그러면 셈을 장자로 확정해도 됩니까? 좀 더 성경을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의 족보 기록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장자권을 가진 자를 먼저 기록합니다. 반면 족보의 기록은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합니다.

 

대상 05:0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르우벤이 야곱의 장자지만, 하나님을 잘 섬긴 요셉 자손이 장자의 명분을 가졌으므로 성경 기록은 장자권을 가진 요셉 자손을 가장 먼저 기록합니다.

장자권은 하나님께서 정하셨기에 하나님을 잘 섬긴 사람이 받습니다. 족보가 나오는 역대상을 보겠습니다. 분명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장자지만 이삭이 장자권을 받았기에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삭과 이스마엘이라(대상 01:28)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 족보를 기록할 때는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니(대상 01:29) 하면서 맏아들인 이스마엘부터 기록했습니다(34).

노아의 세 아들도 노아, , 함과 야벳 순으로 나옵니다(대상 01:04).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 나오는 족보를 보셔야 합니다. 누가 먼저 나옵니까?

 

대상 01:05 야벳의 자손은 고멜과 마곡과…. 이어 08 함의 자손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17 셈의 자손은 엘람과 앗수르와….

 

04절은 셈, , 야벳으로 적었지만, 다음절 05절에선 야벳의 족보부터 나옵니다. 따라서 첫째 아들은 야벳이고 둘째 아들은 함이고 셋째아들은 셈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함은 복을 받을 기회를 저주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반면 야벳과 셈은 복을 받을 기회를 잘 살려 복된 조상이 되었습니다. 주어진 기회를 잘 사랑의 기회로 삼아 복으로 활용하여야 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10.3.)는 13세기 이탈리아의 그리스도교 수도자로 유명한 분입니다. 이 분이 남긴 기도문이 유명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여, 위로받기보다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이는 자기를 줌으로 얻고, 용서함으로 용서받으며, 죽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