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09년 말씀

김삼일 가족 여러분 다시 시작합시다(창 09:01~13)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09. 1. 3.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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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내리는 어느 날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Pittsburgh)의 한 가구점 앞에 초라한 할머니 한 분이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가게 주인이 나와 할머니를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나는 가구를 사려는 것이 아니라 차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주인은 따뜻한 차를 대접하면서 할머니 물건은 안 사셔도 괜찮습니다. 편히 앉아서 구경하십시오.

할머니가 탈, 차 번호를 알려 주십시오. 제가 밖에 나가서 차가 오는가를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가구점 주인은 할머니가 탈 차가 올 때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며칠 후 가구점 주인은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비 오는 날 나의 어머니에게 베푼 당신의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회사와 고향 스코틀랜드의 집을 짓는데 필요한 가구를 모두 당신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카네기.

여러분 어디서 들어본 이름 아닙니까? 당시 미국의 그 유명한 대재벌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1.25.~1919.8.11.)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와 직접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이웃을 소홀히 대하기 쉽습니다. 이해타산으로 대한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2009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김삼일 가족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가 최선의 도움을 베풀면 어떻겠습니까? 사랑의 손길과 구제의 손길 말입니다.

우리는 앞서 노아 홍수를 통하여 사람의 죗값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노아 홍수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홍수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출발선입니다.

 

이 시대를 책임지고 이끌어가야 할 노아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전해집니다이 명령은 또한 2009년 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김해삼일교회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김삼일 가족 여러분 다시 시작합시다.로 정했습니다.

 

 

1. 복음의 터전을 개간해야 합니다.

 

0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사람이 한 번 불행을 겪게 되면 좀처럼 낙관하는 인생관을 갖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불행을 겪으면서 서서히 좌절감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은 행복보다는 불행에 더 익숙할 수밖에 없는 고통과 한()의 역사를 안고 있습니다그러한 삶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대중가요입니다.

 

가사를 보면 자주 쓰이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랑 눈물 이별 황혼 가을 등입니다노래 내용이 주로 주변의 슬픈 주제를 다루다 보니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가사를 서서히 자기의 현실처럼 받아들이는 심리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현실에서 겪는 불행 자체는 별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극복하면 되기 때문입니다진짜 극복해야 할 문제는 불행을 운명이나 팔자소관으로 여기면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입니다. 그런 상태에 머무는 불행심리 이것이 문제입니다인류 최초 사명이 무엇입니까?

 

창 0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홍수 심판이 휩쓸고 지나간 황량한 터전에서 앞날을 살아가는 것이 좀 막막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에게 새롭게 삶을 개간하라고 하십니다.

노아에게 삶을 일구라고 하신 명령은 복된 요소가 있으니 가꾸라는 뜻입니다. 이미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까지 마련해 주십니다. 02, 03절을 같이 읽읍시다.

 

0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0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새롭게 확산이 된 환경의 위험과 각종 동물로부터의 위험은 얼마나 두려운 것들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문제들을 미리 정리해 주십니다. 대신 복을 가꾸고 누리기 위해서는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새로운 환경에 도전해야 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로 약속하신 만큼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이 널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여러 환경과 또 시대 자체가 아무리 암울할지라도 나를 위해 예비하신 복된 삶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열심히 개간하는 삶은 나의 몫으로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이 저절로 굴러들어올 것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개간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그 복을 개간하는 일에 나의 에너지를 집중해야 합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 주신 복과 노아에게 주시는 복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성경을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창 0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09:0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07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본문 01절은 창 01:28과 달리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 까닭은 정복이라는 명령을 앞세워 하나님께서 주신 문화 사명을 이탈하고 육적인 지배권으로 인한 전쟁과 폭력의 패역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인류가 심판받아 멸망에 이르자 구속사의 프로그램을 펼치는 하나님은 새로운 조상 노아에게는 땅을 정복하여 인권을 말살시키는 지배권을 배제하셨습니다.

타락한 인류가 더는 전쟁에 휩싸이지 말라는 사인(sign)입니다. 이제부터는 육신의 물리적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해야 합니다.

 

 

2. 이웃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0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전쟁을 치르고 나면 사람들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생깁니다. 소위 인명 경시 풍조가 대두하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겪은 노아에게 이제 식물이 핍절한 상황에서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03).

따라서 인명 경시 현상이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고기를 먹기 위해서 어떤 동물이든지 사냥하고 죽여야만 하는 필연적인 결과가 등장했습니다.

이런 생명 경시의 습성은 사람의 목숨까지도 함부로 다루는 잔인성으로 발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06절을 대하여야 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죄야말로 가장 큰 죄에 속합니다. 그런 일을 벌인 결과도 죽음으로 갚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서로서로 존중히 여기며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런 일이 바로 인간 본연의 의무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보십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 누구도 해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만큼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지고 정보화되어 갈수록 생명과 인권의 존중에 대한 의식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실 모두가 공감하는 일입니다.

심지어는 인간을 기계의 한 부품 정도로만 생각하는 태도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여지없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결과는 아무런 이유나 원인 없이 함부로 살인을 저지르는 사건으로 발전합니다. 이와 같은 일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이 발생합니까?

우리는 가끔 끔찍한 사건을 통해 각종 사회악이 대담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잔인성 속에서 생명을 존중하는 자세가 무디어 감을 충분히 느낍니다.

우리 모두 생명의 위기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살다 보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서 평안할 때도 있습니다.

반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만남으로 인해 짜증과 스트레스가 쌓이는 때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귀한 존재입니다. 무한히 용서하고 용서받는 생활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임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노아 홍수 심판 이후에 전개되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이 지켜야 할 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가장 중요한 법도입니다. 이 법을 잘 지키는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3. 하나님께서 인류와 새 언약을 세우십니다.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성경은 사람에게 다가오는 삶의 폭풍우를 다양하게 안내합니다. 전쟁, 기근, 가난, 육신의 고통, 핍박, 현실의 신앙 핍박으로 인한 위기 등입니다.

이런 여러 환난을 통해서 사람들은 믿음의 자리에 굳게 서는 때도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식거나 낙심하는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의 심지가 강한 사람이라도 그 믿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가 들어서 아는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입니다. 그 엘리야의 활동상을 읽어보면 대단한 믿음의 용장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왕상 18장부터 보십시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의 선지자 850명과 신앙의 대결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참 신이 누구인지를 가리는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지는 쪽은 죽임을 당하는 신앙의 게임으로 엘리야 선지자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이후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 선지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우상을 섬기는 우두머리 왕후 이세벨이 그 소식을 듣고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복수를 다짐합니다(왕상 19:02). 그 일이 있은 바로 다음 날 엘리야의 모습을 보십시오.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복수를 피하여 위해 그 손길이 미치지 않는 브엘세바로 도망을 갔습니다. 북부에서 남부 깊숙한 곳으로 도망을 한 셈입니다

브엘세바는 광야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산인 호렙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엘리야는 이곳 광야에 나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합니다.

 

왕상 19:04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얼마나 무기력합니까? 바로 하루 전만 하여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큰 이적을 나타내어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 그 선지자였는데 말입니다.

불과 하루 만에 엘리야는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약해질 수 있습니까? 엘리야의 이런 낙담과 절망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일이 잘될 때는 날아갈 듯한 기분을 가집니다. 그러다 일이 꼬이고 실패가 거듭되면 인생을 다 산 듯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이 우리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홍수 심판 이후의 노아 시대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지만 처참한 상황 앞에 노아의 믿음이 위축되고 하나님을 향하여는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인간의 죄악 때문에 세상을 홍수로 심판했지만,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탕자의 아버지와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마치 자식을 징계한 후에 다시금 가슴에 품어주는 부모님의 마음처럼 느껴집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채찍질한 후에 더욱 사랑스러워하는 마음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새 시대의 출발에서 노아와 언약을 맺습니다.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고 변함없이 인간을 사랑하시겠다는 사랑의 선언으로 무지개를 증표로 주셨습니다. 이 무지개를 통해서 복된 삶을 약속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라는 겁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티베트의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독특한 방법으로 값을 정한다고 합니다. 양의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을 정합니다.

양의 성질을 테스트하는 방법이 매우 독특합니다.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보면서 가격을 정합니다.

양이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아무리 마른 양이라도 값이 올라갑니다. 반면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살이 쪘더라도 값이 내려갑니다. 왜 이런 방법으로 정합니까?

위로 올라가는 양은 현재는 힘이 좀 들어도 넓은 산허리의 미래를 차지합니다. 반면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는 수월하나 결국 협곡 바닥에 이르러 굶주려 죽기 때문입니다.

 

골 03:0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노아처럼 2009년 새 시대를 맞아 12일의 청지기 수련회를 마치고 첫 주일의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허락하시는 축복 속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더 쉬운 것들 세상의 것에 집중하라는 유혹을 받지만 믿음의 삼일인은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생살이에는 여러 형태의 풍랑이 있습니다. 질병의 풍랑, 물질의 풍랑, 자녀의 문제로 인한 풍랑, 가정의 풍랑, 직장 풍랑 같은 것 말입니다.

이와 같은 광풍이 우리에게 불가항력으로 밀려올 때는 속수무책입니다. 그럴수록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축복을 개간하는 삶, 이웃을 사랑하는 삶,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복된 새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