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국 전란의 혼란 시대를 마감하고 통일 시대를 여는 데 이바지한 3대 쇼군(Shogun 천황 다음가는 실질적 최고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6.23.~1582.6.21.),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3.17.~1598.9.18.),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2.10.~1616.6.1.)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새는 죽여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는 새는 울게 하라.
도쿠가와 이에야스. 울지 않는 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라.
오다 노부나가는 잘 참지 못하는 조급성의 사람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적극 도전정신을 보여 주는 사람이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멀리 내다보고 때를 기다리는 미래지향의 사람입니다.
나폴레옹(Napoleone di Buonaparte 1769.8.15.~1821.5.5.)은 인류의 미래는 인간의 비전과 상상력에 달려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미래 지향적인 말입니까? 사람은 내일에의 꿈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이런 사고(思考)력을 품을 때 현실의 고난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인류사도 내일을 바라보는 미래지향 주의자들에 의해 발달해 왔고 지금도 발달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일의 꿈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들을 향하여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일의 꿈을 포기하시오. 우리나라는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곧 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외친다면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비전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될 것입니다. 당장 국가보안법(保安法)으로 체포되어 수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오늘 고독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조국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왕을 비롯한 대부분 능력 있는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나라도 패망하게 된다는 절망의 예언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로막는 절망 메시지입니다. 즉시 병사들의 입틀막에 의해 예레미야는 사회 기강 혼란 죄로 수감 되고 말았습니다. 사회 분위기가 매우 혼란한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 선지자 집안의 토지 매매 건이 일어납니다.
난세(亂世)인 만큼 매매는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매매 건이 등장했으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내일을 위하여 밭을 사십시오.」로 정했습니다.
1. 사람의 상식을 저버린 부동산 매매가 등장합니다. |
0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예레미야와 하나멜 이들은 사촌 간입니다. 한날은 하나멜이 감옥으로 예레미야를 면회 왔습니다. 집안사람으로서 면회를 온 것은 잘한 일입니다. 서로 위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위로가 아닌 부동산 거래를 하기 위함입니다.
아마 하나멜은 가난했고 난세라 돈이 무척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 당시 현실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부동산은 무용지물입니다.
얼마라도 금이나 은 즉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나멜이 예레미야에게 말합니다. 너의 목숨은 감옥에서 끝난 것과 마찬가지다. 어차피 죽을 건데 죽을 바에야 자기를 위해서 가지고 있는 돈으로 밭을 매입하라는 부탁입니다.
돈을 그냥 달라는 의미와 같은 셈입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밭을 사라고 권하는 하나멜의 말을 여호와의 말씀인 줄로 알고(08) 밭을 즉각 매수(買受)하였습니다.
09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믿음의 가족 여러분, 이거 하나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을지라도 그 형편에서 밭을 사는 예레미야의 입장 말입니다.
아무리 넓게 생각해도 좀 이상한 일 아닙니까? 나라가 곧 멸망한다는 예언을 하다 감옥에 들어갔으니 ᄂᆞ라가 경제 불안정 상태에 돌입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밭을 사는 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아무리 하나님 말씀이라도 밭을 살 입장은 아니지 않습니까? 만일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좀 길게 기다려 보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처한 현실이 그렇다고 가정해 봅시다. 누가 부동산을 사들이겠습니까? 내다 팔 사람은 있어도 살 사람은 당연히 없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경제가 조금이라도 불안의 기미가 보이면 주식 시장이 폭락합니다.
투매 현상도 일어나고요. 여기 하나멜의 인성을 보십시오. 그는 예레미야와 사촌지간임에도 위로가 아니라 경제 문제로 이용하는 의리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 뜻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뜻에 맞춥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나멜의 밭을 사라고 하신 그 뜻이 깨달아졌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멜의 밭을 살 수 있는 영감(靈感)이 왔습니다. 어떤 영감입니까?
2. 하나님의 말씀에서 회복되는 조국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예레미야는 자기 예언대로 유다가 곧 멸망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동시에 일정한 때가 되면 다시 회복되는 미래의 희망도 보았습니다.
그때가 오면 농사를 짓게 되고 토지 매매가 성행할 것이라는 미래의 행복을 영의 눈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신령한 감각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이 곧 폐허가 될지라도 그곳에서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았기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매매를 하였습니다. 내일을 바라보는 미래 지향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인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엘레나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 1884.10.11~1962.11.7) 여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20세에 루스벨트와 결혼하여 11년 동안 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중에 한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한 친구가 찾아와 위로의 말을 해주자, 그녀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사랑할 수 있고 또 내 사랑이 있어야 하는 아이들이 다섯이나 남아 있다오. 그녀가 20세 때 결혼한 남자는 젊고 패기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고로 관절염에 걸려서 다리가 말라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쇠붙이를 다리에 대고 고정한 채 휠체어를 타고서 다녔습니다.
하루는 루스벨트가 엘레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장애인이 되었는데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하오. 그러자 엘레나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럼 내가 그동안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 줄 알았나요?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인격과 당신의 삶입니다. 당신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꿈과 희망을 품으세요. 이 말은 다리 불구가 된 뒤 열등의식과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루스벨트에게 내일에의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1932년 다리 불구임에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1936년에 재선, 1940년에 3선, 1944년에 4선까지 하였습니다. 미국 역사에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입니다.
희망과 꿈을 가슴에 품고 살면 장차 오는 세상에서 얼마든지 좋은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제는 모든 일이 끝났다고 체념의 말을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말은 우리를 성공이 아닌 절망으로 이끌어갈 뿐입니다.
반면 꿈을 가지는 것은 미래를 확보하는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민족의 멸망을 예언하면서도 멸망 건너편에 있는 하나님의 회복을 민족에게 제시합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하나멜은 오늘을 위해서 내일을 팔아 버린 사람입니다.
반면 예레미야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값지게 산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만일 내일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움이 다가오면 어떻게 대처해 나가겠습니까?
혹 우리의 삶에 어두움이 엄습하여 올 때 무엇을 하겠습니까? 내일이 없는 감옥 같은 곳에 던져질 때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또 사방이 우리를 포위한 것처럼 여겨집니까? 그래도 자포자기하거나 주저앉지 마십시오. 내일을 향한 빛을 보십시오. 믿음의 눈을 가지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은 내일이 없는 자들에게 소망을 안겨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하나님도 항상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0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예레미야는 언제나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말씀이 시원하게 이해되지 않아도 항상 순종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고 어떤 상태로 사느냐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바른 믿음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
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예레미야도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와 같은 의문점도 느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물어서 문제를 풀어나갔습니다. 나라가 망한 다음 회복될 수 있습니까? 지금 많은 돈을 들여 밭을 사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27절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믿는 사람은 절망의 벽을 깨고 일어납니다. 밭도 살 수 있습니다. 불확실한 현실이라도 내일을 위해 투자할 수 있습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사형장에서 짐승의 먹이가 되기도 하였고 혹은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순교의 행렬 속에서도 그들 마음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성도들끼리 마라나타(μαρτυρῶν) 하면서 인사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희망의 소식을 서로 주고받으며 위로하였습니다.
미래를 향한 소망은 미래를 봅니다. 내일을 얼마든지 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절망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에 취하여 내일을 망각하는 사람은 더욱 많습니다. 하나멜처럼 내일의 복을 현실에 팔아 버리는 현실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내일을 위해 오늘을 값있게 투자합시다.
어떤 환경을 만나도 반드시 예수님을 향한 시선은 흔들려서 안 됩니다. 주님은 내일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십자가를 수용하였고 우리에게 영생의 길 열어주셨습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이제부터 우리도 미래를 향한 꿈을 크게 꿉시다.
동물 가운데 사람만이 앞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은 사실을 아시지요? 그만큼 인간은 내일을 위하여 살아가는 미래지향 주의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가시며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선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예레미야는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였습니다. 행동으로 꺼져 가는 조국의 장래에 희망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멜의 밭을 샀습니다.
그 땅이 특별한 값어치가 있어서 산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해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예레미야의 행위를 부동산 투기로 오해할 것입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멀리 내다보는 사람은 좁은 사람의 세계와는 다른 길을 갑니다. 다른 일거리를 만듭니다. 다른 행동을 합니다.
나라가 망할 거라는 소식이 들리면 저마다 은행에서 돈을 찾기에 야단법석이겠지요? 그런데도 영향력 있는 사람이 은행에 계속 돈을 예금하면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미래지만 하나님을 믿고 내일이 있음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입니다.
예레미야는 내일의 걱정 때문에 오늘의 삶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주어진 일에 대하여 성실하게 살아가는 귀한 일꾼입니다.
스피노자(화란)는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성한 의무를 다하는 예레미야는 나라가 흔들리는 긴장 속에서도 오늘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창조하며 산 인물입니다.
때로는 주변 사람이 아니 저 사람 나라가 망한다고 해 놓고 자기는 부동산 투기를 하잖아? 그러고 보니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이네. 하면서 비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주위의 비난이나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에게 그래도 내일이 있음을 행동으로서 보여 주는 비전의 사람입니다.
우리도 위기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처할지라도 영광된 내일이 있음을 믿고 살아갑시다. 내일을 위하여 조국의 먼 장래를 내다봅시다. 시대를 앞서가는 영의 통찰력으로 복음을 전하며 삽시다.
빌 0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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