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4년 말씀

➁여호와는 나의 목자입니다(시 23:01~0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4. 11. 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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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일에 이어 올립니다.

 

5. 여호와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에서도 함께하십니다.

 

0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צַּלמָוֶת 찰마웨트) 골짜기. 매우 짙은 그늘 또는 흑암(黑暗)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이 성경에서 사용된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광산 통로의 암흑(28:03), 죽은 자가 거하게 될 어두움(10:2, 38:17), 창조 이전의 어두움(05:08) 등에 적용되었습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이 어두운 골짜기는 산지가 많이 있는 팔레스타인에서는 쉽게 발견됩니다. 그 동굴에는 먹잇감을 노리는 이리나 곰 승냥이 등 맹수들이 살기 마련입니다. 이런 곳을 지날 때 목자는 긴장과 함께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생명의 위험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여름이 되면 목자는 양 떼를 시원한 목장이 있는 높은 산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위험한 골짜기도 지납니다. 이 골짜기를 가고 오는 동안 사나운 맹수의 습격으로 목자도 죽음에 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표현합니다.

 

04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양 떼 곁에는 항상 목자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안전하게 골짜기를 지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길도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친히 동행해 주시면 안전하게 지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본향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질병, 고통, 영적 시련, 어두움, 함께 순례길을 걷던 사람과의 이별 등이 수시로 우리 곁에 따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위해 주십니다. 04절을 다시 보십시오.

목자는 두 개의 나무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팡이입니다. 이 도구는 목자가 피곤할 때 몸을 의지하기도 하는 손잡이 달린 휘어진 지팡이입니다.

 

이 지팡이는 양이 위험한 낭떠러지나 그와 같은 곳에 떨어졌을 때 양의 목을 걸어서 당겨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막대기는 무슨 용도입니까?

사나운 맹수가 달려들 때 격퇴 시키는 일종의 곤봉 같은 도구입니다. 다윗은 이런 목자의 기구인 지팡이와 막대기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이해하였습니다. 시련과 위기를 친히 안보해 주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역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아무리 하나님의 손길에 있어도 늘 푸른 풀밭이나 잔잔한 물가와 같은 상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1503~07절에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양이 무리를 떠나서 마음대로 다니다 마지막에 스스로 돌아오지 못하는 자리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포기하지 않고 양을 끝까지 추적하여서 마침내 찾아 즐겁게 어깨에 메고 왔습니다. 목자가 왜 어깨에 메고 왔습니까?

양이 도망하다 그만 돌아올 힘이 없어서 다리를 후들거리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목자가 메고 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눅 15:0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0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0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믿음의 가족 여러분, 혹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은 환경을 만났습니까? 깊은 환난과 신음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찾아오는 다양한 환경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두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그런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지 못하고 하나님의 보살핌과 인도를 받지 못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두려워할 문제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도중에 한 사람이 강도 만난 이야기를 여러분은 잘 아시지요? (10:30~37).

이 내용도 우리 인생살이 중에 강도 같은 위험한 요소를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음을 시사해 주는 사건입니다. 함께 02절과 04절을 대비하면서 봉독하겠습니다.

 

0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0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02절의 푸른 초장과 04절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너무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사실 푸른 풀밭과 휴식할 수 있는 맑은 시냇가를 찾기 위해서는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야 합니다. 엉겅퀴와 찔레로 뒤덮인 야산의 위험 지대도 통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저 건너편의 푸른 풀밭으로 비유되는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현실에서 우리에게 사망의 골짜기 같은 환경이 수없이 다가옵니다.

그럴지라도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 그 골짜기를 통과하여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04절은 막강한 힘이 됩니다.

 

사 43:0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0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0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6. 여호와는 원수의 목전에서도 내게 상()을 차려주십니다.

 

0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05절은 원수의 목전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신령한 만족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부르는 찬양의 절정입니다.

이제 이런 의인의 즐거움과 만족 그리고 원수의 앞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살펴보겠습니다.

 

①0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베푸시고(עָרַך 아라크). 미완료 시제로 과거로부터 지금도 계속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앞으로도 베풀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고백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그 옛날 목동 시절 자기가 경험한 여러 일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이제 시의 무대를 푸른 풀밭 들판에서 집으로 옮겨옵니다.

목자는 주인으로 양은 손님으로 그 배역을 바꿉니다. 동방의 풍습 그대로 주인은 손님을 환대합니다. 손님은 주인에게 영접받는 순간 주인과 동격이 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신다는 뜻은 원수를 물리쳐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성도 여러분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아직도 그분을 만나지 못하여 외롭게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힘을 내십시오.

오늘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만나십시오. 어떤 고난의 환경이라도 말씀의 막대기와 성령님의 지팡이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마침내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는 여름에는 양 떼를 고원 지대 산간 목장으로 인도합니다. 가기 전에 목자가 양들이 마음껏 먹고 마시며 쉴 수 있는 지형을 익혀 놓습니다.

물웅덩이를 파고 청소하여 독초를 제거합니다. 야영지를 설치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목자의 바로 이런 수고를 상을 차려주시는 일로 이해하였습니다.

특히 목자는 독초를 뽑는 일에 각별하게 신경 써야 합니다. 캄마스라는 흰색의 풀은 양이 뜯어먹으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독성이기 때문입니다.

 

②05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여기 기름은 잔치 때에나 사용되는 향유입니다. 귀족들 특히 왕실에서 높은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귀중품입니다.

귀족들은 잔치에 참여할 때 이 기름을 머리나 수염 등에 바릅니다. 특별히 귀한 손님이 집에 오면 주인은 친절과 호의의 표시로 머리에 기름을 붓기도 합니다.

 

눅 0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셨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크게 높이심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귀한 자로 인정해 주시는 은혜의 손길입니다. 목자는 일 년 중 특별히 여름 한 철에는 양들의 머리()에 때로는 기름을 바릅니다.

여름은 파리의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기후와 함께 많은 해충이 출현하여 가축을 괴롭히는 계절입니다. 따라서 양들의 목숨까지도 잃게 합니다.

그 기생충은 말파리, 코파리, 각다귀, 모기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해충들이 양 떼를 공격할 때는 황금의 여름을 고통의 계절로 바꿔 놓기 쉽습니다.

 

양들은 특히 코파리에 의한 공격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이 코파리가 양의 축축한 코점막에 알을 낳으면 이삼일 후에 가느다란 유충이 생깁니다. 이것이 마침내 콧구멍을 뚫고 들어가 자극을 줍니다. 그 고통으로 인해 양들이 더러 죽습니다.

양들은 이런 코파리 공격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가끔 서로 부딪쳐 뿔에 상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목자들은 이때 양들의 코에 기름을 발라 코파리가 오지 못하게 합니다그때에야 비로소 양들이 안심하고 풀을 뜯어 먹습니다. 편하게 지냅니다.

 

우리의 현실도 영혼을 해치며 해치는 코파리 같은 사탄의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성령님의 기름 부음과 같은 은혜가 늘 유지되어야 합니다. 기생충으로 고통당하는 양들이 목자의 보호를 받는 것처럼 우리를 해하려는 악의 세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변 안전까지 보장받아야 합니다. 이런 일은 목자 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요 사랑입니다. 원수가 우리를 덮쳐들 듯 것 같은 위기와 공포가 옵니까? 그럴지라도 우리를 위하여 상을 차려주시는 하나님의 보호 때문에 세상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③05 ….내 잔이 넘치나이다.

잔은 기업을 비유한 말입니다(16:05). 이런 잔이 단순히 가득 찬 정도가 아니라 흘러넘칩니다. 이는 다윗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여유로움을 뜻합니다.

 

시 16:0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실제로 그가 차지한 왕실의 재산과 사유 재산은 엄청났습니다(대상 27:25~31, 29:02~05). 그러나 다윗은 풍성한 재물을 하나님의 성전 건축 비용으로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심과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는 하나님의 은혜는 잔이 넘치는 것과 같은 만족을 누리게 합니다.

세상 사람은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므로 참 만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 때문에 잔이 넘치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은 신령한 구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잔이 넘칠 때까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부어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여야 합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퍼주고 또 퍼주어도 마르지 않는 복을 받읍시다.

 

눅 06:38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7. 평생에 임마누엘의 복이 따릅니다.

 

0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다윗은 언약을 지키시고 풍성한 기업을 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복 된 생애가 펼쳐질 것임을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삶의 마지막까지 이어질 것을 확신합니다. 이런 믿음이 진정한 임마누엘의 복입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밀려온 모든 현장이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의 손길 아래서 진행되었음을 알았습니다. 한때는 대적들로 인해 낙심될 정도의 아픔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기를 돕고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기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모든 환경은 그분의 섭리 속에서 진행됨을 보며 날마다 감사의 생활을 잊지 않았습니다. 다운은(down) 되어도 녹다운(knock down)은 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돌아봅시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화려한 경력도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고통은 셋째 아들 압살롬이 일으킨 반역입니다.

다윗이 근동 지방에서 영향력 있는 실세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낳은 아들에게 쫓겨 예루살렘 궁을 떠날 때는 초라한 군주로 추락하였습니다. 당시 가슴 아픈 한 장면을 보겠습니다.

삼하 15:30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 가니라.

 

다윗은 이렇게 분()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인해 정신과 육체는 거의 실신 상태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시편 23편을 맺습니다.

 

06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은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성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본 구절은 이보다 더 깊은 신령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이 영원히 성소에만 앉아 있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더욱 하나님과 영적 교제의 자리에 들어가겠다는 각오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01).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06). 라는 말씀으로 맺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승리의 표현입니까?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다는 말은 세상의 삶이 아닌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기를 원하는 고백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를 내다보고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적인 삶에 자기의 에너지를 드리겠다는 고백입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삶과 소망이 여호와의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런 신령한 은혜와 복을 잘 유지하기 위해 세밀한 신앙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을 떠나 사는 곳에는 형통하는 것 같으나 불통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의 삶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전을 떠난 삶이 생활화되면 그때는 믿음이 시들어 죽어가는 때임을 기억하십시오. 엘리 대제사장의 말년을 기억하십니까?

자식을 애지중지하여 방관한 삶은 가문의 패망이고 국가의 패망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이가봇의 비극을 거두고 말았습니다(삼상 01~04).

 

시 27:0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65:0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 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