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목사로부터 설교 초청을 받은 한 목사님이 설교 본문과 제목을 전화로 불러 줍니다. 시편 23편 01~06.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후배 목사님이 이를 받아 적으면서 그다음에는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마 그 뒤에 뭐가 더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하고 말했습니다. 약속한 주일 오후에 그 후배 목사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안내를 따라 강단에 올라 자리에 앉아서 주보를 펼쳐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오후 예배 설교 제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사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다윗의 고백은 말 그대로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합니까?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예수님 한 분으로 족합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만으로는 안 되는 줄 알고 불신 세계와 종종 타협합니다.
이스라엘의 왕(王)이며, 목동(牧童)이며, 가수(歌手)이며, 시인(詩人)인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노래를 부른 지도 3천 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골리앗을 향해 사용하고 남은 물맷돌 4개나 양을 치던 지팡이, 수금, 의복, 장신구 등은 오랜 세월 속에서 흙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읊은 시편 23편은 가고 오는 사람에게 새로운 영감과 끊임없는 감동과 풍요로움을 더해 줍니다.
우리가 전부는 암송하지 못해도 그 가운데 한 부분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정도는 암송합니다.
그러다 보니 시편 23편에 관한 설교 제목이 오늘 주보에 실려 있는 것을 보신 분은 이 설교는 내가 잘 알고 있다는 선입관을 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잘 알고 있다는 그 선입관 때문에 내용의 깊이를 잘 헤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2주간 동안 「여호와는 나의 목자입니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시편 23편에 나타난 사상과 그 위치 |
①신관(神觀). 여호와는 나의 목자.
②인생관(人生觀). 양같이 유약한 존재와 연약한 인생, 그리고 어리석고 죄악에 물든 인생.
③세계관(世界觀). 결핍된 세계.
이런 관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갈 때 인생관이 안전합니다. 결핍된 세계관이 부족함이 없는 세계관으로 전환될 것입니다.
시편은 150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이 다윗이 읊은 시라서 다윗의 시편이라고 칭합니다. 그중에 23편은 시편 전체의 본론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시편 23편의 위치는 22편과 24편 앞뒤를 연결하는 가교(架橋)역할입니다. 22편은 01, 15, 16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다윗이 성령님의 영감으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돌아가실 것인가에 대한 갈보리산의 십자가 상징입니다.
시 22:0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24편은 03, 07, 08절에서 그 핵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통해서 영광의 왕으로 시온산에 재림하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노래합니다.
시 24:0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0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0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시편 23편은 죽음과 재림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시입니다. 따라서 22편은 신약 시대에 응답하였고 24편은 장차 될 일입니다.
23편이야말로 십자가의 갈보리산과 재림의 시온산 사이에서 성도들은 푸른 풀밭과 잔잔한 시냇가의 생활을 즐기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23편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백성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 세상에서의 삶을 노래한 것으로 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현실에서 과연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가족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
0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글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주권자 다윗왕입니다. 그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본 시 01절 첫머리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절대 신앙을 보여줍니다.
나의 목자시니(רָעָה 라아). 이 비유는 당시 팔레스타인 유목 사회에서는 널리 알려진 말입니다. 다윗은 이를 자기의 시에서 나의 목자로 발전시킵니다.
이 목자의 비유는 바위나 방패와 같은 비인격체가 아닙니다. 왕이나 구원자와 같이 권위의 비유도 아닙니다. 상호 간의 밀접한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내포하는 비유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은 어려서부터 목자로 잔뼈가 굵었습니다. 평원을 누비며 양들과 더불어 생활하던 시골의 노린내가 나는 사람입니다.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절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자로 지내던 어린 시절입니다. 그는 양들에 대한 지식을 몸으로 터득하였기에 양들의 몸짓 하나, 소리 하나만 들어도 그 요구가 무엇인지를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생명 관계여야 함을 체험으로 알았습니다. 이른 아침 양 떼를 우리에서 불러내어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여야 함도 잘 알았습니다.
다윗은 약하고 병든 양이 있으면 가슴에 안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무리를 떠난 길 잃은 양은 끝까지 추적하여 공동체의 삶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사나운 짐승 곧 사자나 곰 늑대 등이 침입해 올 때는 생명을 걸고 양들을 보호하였습니다. 목자가 해야 할 일을 잘 알았습니다.
삼상 17: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말을 자기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로 설정하였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우쳐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다윗이 말한 나의 목자가 현실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인정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서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단어는「나의」라는 소유 대명사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소유주이며 일대일 관계입니다. 우리의 목자가 아니라 개인으로 친밀한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
Sweeding(미국 시카고에 있는 Moody 신학교 총장 역임). 하나님은 손자가 없으시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가령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하고 부르면 인간의 경우로 말할 때 여러분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것임에도 아버지라고 부르지요.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개인의 관계라는 말입니다. 즉 아버지의 목자도 어머니의 목자도 목사님의 목자도 아닌 나의 목자로 삼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편 23편은 비록 여섯 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입니다. 그런데도 나와 관계된 나의, 나를, 내가, 나와, 내게. 라는 표현이 열네 번이나 나옵니다.
결국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나와 일대일 관계입니다.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부모가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어도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나의 목자 되시는 여호와로 인해, 승리를 기대하십니까?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십시오. 놀라운 은혜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양들에게 행복의 조건은 목자가 함께하느냐? 성실히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목자가 함께하면 아무 염려가 없습니다.
옛날 히브리인 가정에서는 종들의 이마에 주인의 소유를 나타내는 인(印)을 쳤습니다. 목자도 자기 양의 귀 끝에 화인(火印)으로 표시하였습니다.
그런 원리를 우리의 믿음 생활에 적용해 보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으니, 심령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믿음의 표시가 있는지 확인해 봅시다.
고후 01: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안(印) 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우리 가운데 지금 생활이 너무 힘들어 시달림을 받는 분이 계십니까? 다윗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십시오. 목자장 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언제 불행이 닥칠지 모릅니다. 항상 불안합니다.
목자장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길 수 있습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위하여 할 일은 인도와 돌봄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의 속성을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40년 동안에 잘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에게도 잘 보여주실 것입니다. 양들이 목자를 의지하는 것처럼 나도 생명과 재산과 미래를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영국의 한 연극 배우가 어떤 연회석에서 명예 훈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식사 후에 사회자가 그 배우에게 참석한 분들을 위해 어떤 대사를 암송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무엇이든 신청하라며 흔쾌히 승낙하였습니다. 그러자 연로하신 한 목사님께서 선생님 시편 23편을 한번 암송해 주시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제가 마친 후 목사님도 읊어 주셔야 합니다. 이윽고 그 배우는 감정을 잡으면서 너무나 인상적으로 암송했습니다. 청중은 넋을 잃고 듣는데 암송이 끝났을 때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잠시 후 목사님도 암송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는 숙연해졌습니다. 암송이 끝났을 때는 그 방의 어느 한 사람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얼마간 침묵이 흐른 후 그 배우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 귀를 울렸지만 여기 목사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저는 단지 이 시편을 알고 있었지만, 목사님은 목자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외형의 시편 23편만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속에서 나의 목자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까? 그저 의미 없이 암송만 하는 그 자체로는 나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결코 만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목자라는 고백이 따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양 떼 속에 내가 속했다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는 다윗이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결과입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은 목자 되시는 여호와께서 충분히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한 충분한 공급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신 02:0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은혜를 다윗은 잘 알았습니다. 따라서 환난 중에서도 요동하지 않았고 결핍 속에서도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일상생활에서 두 가지 형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①욕구 불만의 인생.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모자라는 삶을 삽니다. 왜냐하면 세상 것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아무리 많은 것을 안겨 주어도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 0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②자족하며 사는 인생.
다윗에게는 생활환경이 변화무쌍(變化無雙)이었습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흔들림이 없는 행복을 누릴 때도 있었습니다.
사울 왕의 박해를 피하여 십 년이나 고달픈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의 마음에는 흔들림이 없는 믿음이 굳게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심령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목자로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 0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3. 여호와는 나를 푸른 풀밭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
0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양은 무척 유약한 짐승입니다. 다음과 같은 4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눕지 않습니다.
①양은 무척 겁이 많습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기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는 눕지 않습니다.
②양의 집단은 분화되어 있어서 계층 구조를 이룹니다. 그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면 위계질서에 혼란을 가져오므로 싸움이 끝나기 전에는 눕지 않습니다.
③양은 배가 부르게 꼴을 먹지 않으면 눕지 않습니다.
④양은 무척 세심합니다. 민감해서 코파리, 말파리, 쇠파리, 진드기, 기생충 등에게 시달리면 눕지 않습니다. 이때 목자의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살충제 종류를 뿌려 주고 기름을 바르면 됩니다. 이런 여러 조건이 원만하게 충족될 때 양은 편안히 눕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목자의 끊임없는 보살핌과 헤아림이 있어야 합니다.
0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풀밭은 양의 삶의 토대입니다. 생존과 직결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양들은 꼴을 뜯고 편안하게 휴식합니다.
목자는 일정한 초장에서 양 떼가 풀을 다 뜯어 먹으면 새로운 초장으로 옮깁니다. 매일 매일의 꼴 즉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성도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십니다. 성도의 사정을 세밀히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필요를 준비해 주십니다.
누이시며(רָבַץ 라바츠). 누이신다는 말은 땅에 대고 엎드린다는 뜻입니다. 말이나 소나 나귀와 같은 짐승이 힘에 겨워 넘어지려 할 때 목자는 짐을 벗겨서 편안히 쉬게 합니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쉼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가족 환경을 잘 조성하여 영육 간에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십니다.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 06:0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0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매일의 양식을 공급하시되 과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공급하십니다. 주 안에 있는 성도는 부족함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의식주 문제나 육의 양식 문제로 굶고 헐벗고 어려운 시련에 처하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마음의 문제일 뿐 실제 현실에서 그렇게 극심한 현장은 아닙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쉴 만한 이 뜻은 세찬 물결과는 대조되는 의미로 잔잔하다는 뜻입니다. 급류는 양들이 물을 마시기에 불편합니다.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해(害)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안전하게 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일부 평야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메마른 광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양들에게 먹일 물이나 샘을 찾는 일은 목자의 임무 가운데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물을 찾았다 할지라도 혹 물이 써서 먹을 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출 15:23). 혹은 고인 지 오래되어 부패한 물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급히 흐르는 물은 양들이 먹기에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복잡한 요인을 모두 충족시키는 맑고 천천히 흐르는 시냇물을 오아시스라 합니다. 바로 이런 오아시스로 인도함을 받을 때 비로소 편안한 휴식을 취합니다.
현대인들 모두가 피곤한 삶을 삽니다. 요즘 생활환경은 저마다 피곤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습니다. 공무원은 계속되는 고된 일 때문에 피곤하다고 말하고 사업가는 국가의 경기가 침체하고 사업이 부진해서 피곤하다고 말합니다.
뜻이 있는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것과 국회와 정치가 계속 부패해서 피곤하다고 말합니다. 고 3학년은 수능 문제로 거의 긴장과 무력감에 빠져 피곤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 있는 존재입니다. 육체 정신 영혼 이 3가지가 모두 소중합니다. 이 3가지 요소에 피곤이 겹치거나 쌓이지 않도록 잘 조절해야 합니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중심은 영혼입니다. 영혼이 메마르고 영혼이 시들어 버린 육체는 허수아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육체의 피로를 풀겠다고 자칫 영혼을 고사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휴식도 좋고 휴가도 가야 하고 오락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혼 관리를 등한히 해서는 안 됩니다.
영혼의 피곤은 발 뻗고 드러눕거나 온종일 T.V를 보는 것으로 풀리지 않습니다. 등산하고 드라이브하고 헬스한다고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와 정신의 피곤은 그런 것들을 통해 해소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피곤은 하나님께 나와 입술을 열어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으로 영의 양식을 받을 때 풀립니다. 예배를 게을리하고, 기도와 찬송을 쉬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에서 맡은 일을 소홀히 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도 모르게 영적 탈진에 빠집니다.
이 진리를 일찍 깨달은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0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 여호와는 나의 시들은 영혼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
0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회복한다, 되돌아오게 한다는 뜻입니다. 죄악과 곤경으로 헤매던 영혼이 제 자리를 찾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영혼이 지쳐 쓰러질 때 다시 원기를 회복하여 매일 매일 새롭게 그리스도를 닮아 가게 합합니다.
하나님을 초원에서 양을 치는 목자로 비교한 03절을 보십시오. 인간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사탄에게 유혹받아 죽음의 늪에 빠졌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의 삶에는 갈등과 긴장, 손해와 사기, 불만과 억울함이 난무하였습니다. 이런 세상 것들로 인해 사람의 영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 입은 영혼을 생명의 말씀으로 치료하십니다. 우리의 심령이 굶주려 있을 때 말씀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요 10:11)라고 하셨습니다. 시들어 가는 영혼을 싱싱하게 소생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 0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미국의 어느 큰 회사에서 사장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후임 사장님을 모셔 와야 하는데 이사회에서는 오랜 시간 의논 끝에 이외의 결정을 하였습니다.
보통은 부사장이나 전무가 사장이 됩니다. 그런데 이사회에서는 수천 명 사원의 근무 성적을 조회해서 가장 유능한 사원을 사장으로 선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고 통솔력이 탁월하고 인간관계가 원만한 사원을 선정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청년 사원입니다. 청년을 사장으로 옹립하였습니다.
개인으로 말하면 이보다 큰 출세와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장으로 취임하여 회사의 일을 돌아보니 그 자리가 밖에서 보는 그렇게 좋은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좋은 물건 많이 만들어야 하고 또 재고 없이 판매도 해야 합니다. 거기다 수천 명 사원 중에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도 많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그만 밥맛까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의욕이 줄어들고 자신감이 사라져 결재할 때쯤이면 두려움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결재하는 손마저 떨리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 젊은 사장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치료받게 되었습니다.
그 역시 별로 치료의 진전이 없자 오랫동안 고민하였습니다. 하루는 정신과 전문의 의사가 사장님, 제가 최선을 다해 치료합니다만 잘되지 않으니 귀하신 한 분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분을 만나게 되면 사장님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분을 소개받았는데 그분은 Houston TX에 계시는 찰스 알렌(Charles Allen) 목사입니다.
젊은 사장은 정신과 의사의 소개로 당일 면담 약속을 잡고 자가용 비행기로 Houston TX에 있는 감리교 목사 찰스 알렌을 찾아갔습니다. 알렌 목사님은 젊은 사장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조그마한 종이에 처방을 하나 써 주었습니다. 그 처방전이 이렇습니다.
사장님, 여기 도움이 될 수 있는 처방을 기록했는데 성경 시편 23편을 하루에 다섯 번씩 읽으세요. 일어나자마자 한 번, 아침 먹고 한 번, 점심 먹고 한 번, 저녁 먹고 한 번 그리고 주무시기 전에 한 번 읽으십시오.
잘 아는 말씀이라고 빨리빨리 읽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천천히 한 글자 한 단어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하는 것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음미하며 읽으십시오.
그리고 사장님은 바쁘실 터이니 아침에 일어나서 좀 시간이 있을 때 다섯 번 읽으면 되지 않겠나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가령 하루에 약을 다섯 봉지 먹어야 하는데 식전에, 조반 후, 점심 후, 저녁 후, 취침 전에 한 봉지씩 먹어야 할 약을 바쁘다고 그럴 것이 뭐 있나 하지 마십시오. 시간 있을 때 먹어야지 하면서 다섯 봉지의 약을 한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시면 효과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시키는 대로 반드시 하세요. 이 젊은 사장은 알렌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일어나서 성경을 한 번, 조반 먹고 한 번, 점심 식사하고 한 번, 저녁 들고 한 번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번 이렇게 하루에 다섯 번씩 시편 23편을 정독했습니다.
그랬더니 일주일을 계속하는 동안에 큰 변화가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음이 평안하니까 밤에 잠을 편히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밤에 잠을 잘 자니 피곤이 덜해지고 의욕이 생기고 밥맛이 좋아져서 확신까지 생겼습니다. 마침내 큰 회사를 잘 운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왜 소생시켜 주십니까?
①우리의 심령에 신령한 부흥을 일으키시기 위해서입니다.
②병든 심령을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③충만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④천국 가는 그날까지 계속 주님의 일을 잘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⑤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적극적이고 유용하고 귀한 그릇이 되게 하려고 소생시켜 주십니다.
이제 나의 시든 영혼을 소생시켜 주신 후에 어떻게 하십니까? ①03…. 자기 이름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의로운 이름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 20:0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시 148:13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03….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의의 길이란 평탄의 길 형통의 길입니다(Calvin).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평탄과 형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목자로서의 자비하신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특별히 자기 이름을 위해서라는 표현이 나오는 부분을 보십시오. 그 인도의 궁극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정한 평탄의 길이라도 사람의 보기에 때로는 좁은 길, 험한 길로 여겨져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시 37:0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잠 14: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셔야 갈 수 있는 길을 의의 길이라고 합시다. 우리 모두 가야 할 길 곧 성공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고집이나 자기만의 주장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목자가 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 성공의 길이 있습니다.
사실 양들은 좀 미련하고 둔합니다. 그대로 두면 꼭 같은 길로만 다니고 꼭 같은 장소에서만 풀을 뜯어 먹습니다. 결국은 그 땅이 황무지가 되어 기생충과 병으로 오염됩니다. 목자는 이런 황폐화를 막는 예방 조치를 합니다. 활동 계획을 치밀히 세워서 목초지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06)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않으면 의의 길로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젊은 시절 목자로서 이런 일을 많이 해 보았습니다.
그때의 일을 추억하면서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를 목자로 비교합니다. 그분께서 인도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의 길로 가려는 몸부림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목자 되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 영혼이 날로 강건해집시다. 새 힘을 얻어 주의 인도하심을 받읍시다. 만족함을 누리는 성도가 됩시다.
2부는 다음 주일에 올립니다
'은혜의 강단 > 2024년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든든히 서가는 교회를 세웁시다(행 09:19~31). (0) | 2024.11.09 |
---|---|
➁여호와는 나의 목자입니다(시 23:01~06). (0) | 2024.11.02 |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십니다(창 08:01~05). (3) | 2024.10.19 |
계속 성숙하며 성장하는 신앙인(벧전 02:01~02) (0) | 2024.10.12 |
나는 말씀 위에 인생을 건축합니까? (마 07:21~27) (2) | 2024.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