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몸에는 혈관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지 그 혈관 길이를 한 줄로 이으면 9,500km 이상 된다고 합니다. 경부 고속도로(428km)를 열번 이상 왕복하고도 조금 남는 긴 혈관이 한 사람의 몸 안에 퍼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혈관에는 묵은 피와 새 피가 흐릅니다. 초당 1,500만 개 이상의 세포가 나고 죽고 하는 생명의 역사가 반복됩니다. 이렇게 생명의 역사를 반복하는 피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피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또 붉은빛으로 얼룩져 있는 핏자국을 보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독교는 피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합니다. 피(寶血), 십자가, 못 박는다는 말을 귀가 아프도록 듣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피를 쉴 새 없이 입에 올립니다. 성경에 피라는 말이 무려 418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그만큼 피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성경 옆면 색상이 금박이나 은색 혹은 무색입니다. 그러나 한 50여 년 전만 해도 그 옆면을 붉은색으로 칠해 놓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피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만큼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믿는 것과 피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또 구원에 대하여 바로 이해하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 피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피에 의한 구원의 교리가 없는 복음은 참 복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나는 예수님의 피가 필요합니다.」로 정했습니다.
1. 예수님의 돌아가심과 피 흘리심의 필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는 기본 진리 하나가 있습니다. 불변의 진리는 피는 곧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피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만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피 흘리신 구절들(약 175회)을 제하여 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성경은 심장이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진리가 성립하는데 피를 흘림은 곧 죽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죽음 즉 피 흘리는 죽음과 죄의 삯인 죽음입니다.
롬 0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받으려면 반드시 피를 흘려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피를 흘리는 것이 죽음이고 죄의 삯이 죽음이라면 뭐가 같습니까?
죄의 삯은 곧 피를 흘려야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이 자리에 오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죄를 씻고 싶습니까?
피를 흘려야 합니다, 나의 죄에 대한 대가를 정확하게 내고 싶습니까?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분명히 죽어야 합니다. 이일기 너 죄인이지? 예, 죄인입니다.
그러면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해. 이 길은 정녕 피할 수가 없어. 네가 죽기 싫으면 누군가 너 대신 죽어야 해. 예, 그렇습니다. 이것이 구원을 향한 출발점이며 반드시 내가 받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구원의 자리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림과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진리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현재 저와 우리의 처지를 자세하게 설명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롬 0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믿음의 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 같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대상을 정하셨습니다. 그 대상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2. 구약시대에는 속죄의 제물로 짐승을 드렸습니다. |
말 01:11….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역사를 우리는 주전(B.C.) 역사라 합니다. 성경에서는 구약역사(舊約歷史)라고 하지요. 이때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죄를 대신해서 한 지정된 짐승으로 죗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짐승이 대신해 피를 흘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제사 제도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속죄의 짐승은 주로 소, 양, 염소 세 가지로 각자 형편에 따라 드렸습니다.
만일 너무 가난하여 이와 같은 것들을 드릴 형편이 못되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시한 방법을 따라 떡을 만들어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나 양, 염소 등은 반드시 흠이 없어야만 했습니다. 만일 눈이 상하였거나 다리를 절거나 병이 들었다든지 또 흠이 있으면 바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으로 보아 완벽한 짐승을 속죄의 제물로 정하셨습니다. 죄를 대신해서 피를 흘릴 수 있는 속죄 제물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레 22:22 너희는 눈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습진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이런 제사의 현장을 통해 우리는 피가 넘쳐흐르는 강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죄를 하루에 몇 번이나 범합니까? 답이 제대로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셀 수 없습니다. 행동으로 범하는 죄는 살펴보면 말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 범하는 죄는 이루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구약시대 사람들의 제사 원리를 압니까? 마음으로 죽일 놈 해서 날마다 미워하다 어느 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다고 생각되면 속죄 준비를 합니다. 우리에 가서 자기를 대신해 죽을 짐승을 골라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서 제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직접 당신 죄는 이 짐승의 피 때문에 용서받았다. 하면 자기의 죄가 용서받은 줄 알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한 시간도 못 되어 무슨 생각이 납니까? 죽일 놈 하면서 분노가 또 치밀게 됩니다.
그러면 또 우리에 가서 어느 짐승이 나를 위해 죽을 것인가? 하고 고르겠지요? 상상해 보십시오. 도대체 하루에 죄를 몇 번이나 짓습니까? 짐승이 얼마나 많이 죽어야 합니까?
만일 백성들이 죄를 범한 대로 짐승을 끌고 왔다면 그 제사가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제사였겠습니까? 그래서 구약시대의 제사 지내는 장면은 피의 현장입니다.
또 아무리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도 죄를 짓는 사람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허사입니다. 이것이 최대의 고민거리입니다.
한번 짐승을 잡아 바쳤으면 그 짐승이 애처로워서도 마음에 죄를 지으려는 생각을 지워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 같은 죄가 반복되는 것은 근본 치유가 되지 않아서입니다.
구약시대의 짐승 제사는 이만큼 문제가 있었습니다. 짐승의 피는 아무리 흘려도 우리를 죄에서 완전히 사하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이 고민거리입니다.
3. 예수님께서 죄를 속량하기 위한 제물로 오셨습니다. |
히 0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하나님은 좀 더 완전한 제사,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될 제사, 단 한 번 피를 흘리고 죽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영원히 그 죄를 다 용서하고 죄를 씻을 수 있는 피의 제사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죽음으로 영원히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피를 주셨습니다. 단순히 죄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죄짓는 마음까지도 치료할 수 있는 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반복해 온 짐승의 피가 아니라 무죄한 사람의 피입니다.
그러면 그런 죄가 없는 사람의 피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하여 찾는 피가 무죄한 자의 피라야 한다면 그런 피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오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속죄의 제물은 완전한 사람이어야 하므로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 동정녀 탄생하셨습니다. 죄가 없는 피, 완벽한 속죄를 이루는 피로 오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로 달리셨습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이 일이야말로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벧전 03: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과거에 범한 죄도, 오늘 범한 죄도, 내가 내일 범할지도 모르는 죄까지도 다 담당하여 속죄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내가 죽은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에 예수님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못 박아 죽인 것과 같습니다.
이 피를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용서함을 받고 온전한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 진리 앞에 이제는 죽음이 나에게 죗값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히브리서 09장에 보면 구약성경의 제물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대제사장은 깨끗한 피를 속죄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도 없습니다(히 09:22). 예수님께서 그의 피를 흘려주심으로 죄를 용서해 주셨으며, 이 속죄의 피가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 죄를 영원히 씻겨 주시는 주님께 내어놓으십시오. 깨끗이 씻겨 심령에 평안함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들고 나의 구주로 믿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면 나의 모든 죄를 무조건 완전히 씻어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서게 하실 것입니다.
요일 0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를, 그와 같은 놀라운 복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까? 그 책임은 온전히 나의 몫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그 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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