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4년 말씀

나는 너그러운 믿음입니까? (행 17:10~1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4. 6. 1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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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수박 농사를 짓는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박이 익어갈 때쯤 수박밭 주인에게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한밤중에 수박밭에 몰래 들어와 수박을 따가는 아이들 때문입니다. 소위 수박 서리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수박만 따가면야 별문제가 안 됩니다. 문제는 어두운 밤에 몰래 따가니 수박 넝쿨이 다 망가지는 일입니다. 수박밭 주인이 이 일을 놓고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다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하여 수박밭 주인은 원두막 앞에 이런 글을 써 붙였습니다.

 

여기 수박 한 통에는 농약이 들어있음. 주인만 알고 있음. -주인 백- 그날부터 수박 서리가 없어졌습니다. 누가 따먹겠습니까? 죽을 수도 있는데.

농부는 그날부터 평안하게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며칠 후 원두막 앞에 깜짝 놀랄 글이 붙어 있습니다. 뭐라고 썼을 것 같습니까?

여기 수박 두 통에 농약이 들어있음. 한 통은 주인이 알고 또 한 통은 도둑이 알고 있음. 도둑 백. 만약 도둑이 수박 한 통에 진짜 농약을 넣었다면 그해 수박 농사는 낭패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악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좀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보자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좀 여유 있는 마음을 가져보자는 의미입니다.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사도 바울은 베뢰아 지역 신자와 데살로니가 지역 신자의 문화 차이점을 선교의 차원에서 바라봅니다. 세계 선교의 관점을 정치 경제 지정학 상황에서 바라봅니다. 바울은 베뢰아 사역을 전후로 당한 핍박과 배척을 선교의 관점으로 접목합니다(01~09).

바울은 이런 여러 고난 속에서 베뢰아 사람들을 통하여 많은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베뢰아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졌기에 바울이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말하는지 믿음의 차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나는 너그러운 믿음입니까?로 정했습니다.

 

 

1.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면 너그러운 성도가 됩니다.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본문의 앞 상황을 봅시다. 바울 선교팀이 베뢰아에 오기 전 데살로니가에서 3주 동안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의 성공을 통해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극심한 훼방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 일로 바울은 남서쪽 약 80km 정도 떨어진 베뢰아로 피신합니다.

80km면 상당한 거리입니다. 당시 군인들은 한 시간에 4km 정도를 행군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아마 밤새 20시간을 걸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가다가 휴식을 취하기도 했겠지만 쉬지 않고 이동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쫓기는 몸인 만큼 얼마나 마음 졸였겠습니까? 그런데도 안식을 맞이하자 휴식도 없이 바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의 열정과 체력을 주신 증거입니다.

11절 말씀을 잘 보십시오. 이는 데살로니가 신자의 거친 성품이나 정치 성향이나 투박한 학문 자세와 비교하여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베뢰아 사람은 세련된 학문 자세를 가졌다는 뜻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베뢰아 사람들처럼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면 좋지 않겠습니까?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 자세를 누가가 너그러운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베뢰아는 마게도냐 평원 남쪽 올림퍼스 산맥 기슭의 작은 언덕에 있는 도시입니다. 많은 사람이 살고는 있으나 정치면에서는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한 지역입니다.

 

마게도냐의 수도 역할을 데살로니가에 비하면 작은 지역입니다. 저자 누가의 시각에서 볼 때 베뢰아 사람들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자로 인식되었습니다.

무엇이 누가의 눈에 그렇게 너그러운 모습으로 비쳤겠습니까? 외모와 윤리 면에서 아름다운 예절이겠습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너그럽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너그럽다는 의미는 그들이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합니다.

 

사실 낯선 사람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디 쉬운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사람들 심성을 봅시다. 마음의 문을 닫는 사람과 복음을 듣기는 해도 건성으로 듣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나이가 많고 인생 경륜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마음은 더욱 경직되고 완고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의 말을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베뢰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모습을 봅시다. 상당히 고상한 마음 너그러운 품격으로 평가해도 되겠습니다.

바울의 전도 활동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면 베뢰아 사람 외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역시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루디아를 들 수 있습니다.

 

행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 지라.

 

후일에는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도 상당한 수준에까지 이릅니다. 전도자의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각처에 믿음의 소문이 났기 때문입니다(살전 02:13). 믿음의 가족 여러분, 다윗 이야기 많이 들어보셨지요?

이스라엘의 막강한 권세를 가진 왕입니다. 그런데도 궁중을 출입하는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책망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다윗은 피난길에서 시므이의 저주를 들었을 때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내버려 두라고 하였습니다(삼하 16:11). 우리에게는 이런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2. 받은 말씀을 날마다 상고할 때 너그러운 성도가 됩니다.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성경을 상고(ἀνακρίνω)하므로. 상호 검토하다. 심문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을 상고(詳考)한다고 했으니 골라낼 것은 골라내어 양식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즉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 선교팀의 메시지를 듣고 구약성경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그 본의를 다시금 잘 새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베뢰아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통하여 얻은 지식과 헬라의 철학사상을 혼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해 준 설교를 잘 살펴 신중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한 마디로 뚜렷한 말씀의 주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바른 뜻을 바로 깨닫기 위하여 공부하는 자세 얼마나 좋은 자세입니까? 지혜로운 자는 항상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탐구하는 자세를 가집니다. 시험의 돌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잠 02:0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0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믿음의 가족 여러분, 말씀을 어떻게 대합니까? 들은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자세를 가지느냐 말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 상황을 보면 이단이 창궐합니다. 왜 그렇게 되어 가는지 아십니까?

남달리 신비스럽고 능력이 있는 것 같이 보이면 그 사람이 전하는 말은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아멘이라는 단어를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단 추종자들을 보십시오. 한결같이 성경과는 도무지 빗나간 말을 하는데도 그 말을 진리인 줄 알고 맹목적으로 따라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더불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능력 있는 말씀처럼 보입니까? 그 말이 성경에서 이탈되었으면 그는 이미 이단의 범주에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한때 박OO 장로 하면 얼마나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까? 자기가 참 감람나무라고 주장하던 사람으로서 전도관을 창립하여 교주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성경에서 빗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는 마귀 대장의 아들이요 성경의 98%가 거짓이므로 불살라야 한다. 십자가는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추종자들은 모두 아멘 했습니다.

나중에는 자기의 나이가 5,786세라고 했다가 다시 15천억 세로 주장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기가 새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추종자들은 아멘 했으니 어이없는 일 아닙니까?

 

이후 이 전도관에서 이탈한 조OO은 영생교 승리 제단을 세우고 교주가 되어 자기는 하나님이요, 생미륵불이요, 정도령이요, 참이슬이요, 구세주라고 자처했습니다. 자기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열렬하게 아멘 하였습니다. 그가 1994년 사기죄로 걸려 감옥 생활하는 중에 올해 우리나라에 가뭄이 든 것은 자기를 감옥에 넣어서 그렇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 말에도 그의 추종자들은 오직 아멘이었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상고합니까?

무엇보다 이 말씀이 나와 무슨 관계인가 살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정립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신령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청교도 신학자로 유명한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급한 사람아, 조용히 앉아서 욥과 교제하라.

완고한 사람아, 베드로와 모세의 기사를 자세히 읽어라. 유약한 사람아, 엘리야를 만나라. 마음의 노래가 없는 사람아, 다윗에게 들어라. 정치가가 된 사람아, 다니엘서를 읽어라.

실망과 암흑에 빠진 사람아, 이사야를 읽어라. 마음이 차가워진 사람아, 사랑의 사도 요한을 가까이하라. 신앙이 엷어진 사람아, 바울을 주의해서 보라. 안일한 자리에 있는 사람아, 야고보서를 잊지 말라. 장래의 소망을 잃은 사람아, 계시록에서 약속의 땅을 받도록 하라.

 

 

3.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므로 나타나는 두 가지 결과가 있습니다.

 

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①).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바울이 베뢰아 신자의 회당에서 성경을 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론 체계를 세워 설명한 부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선교팀이 전하는 메시지 핵심입니다.

 

행 17:0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베뢰아 신자들이 회당에서 바울의 메시지를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결과가 무엇으로 나타났습니까?

심령을 일구고 복음을 뿌린 결과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믿는 자가 많다는 것은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자기가 믿은 후에 이웃에게 전도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렇듯이 전도의 의무를 다하는 중에 불신자들이 몰려옵니다. 어떤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듭니까? 생명의 복음을 증명하는 교회입니다.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많이 믿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란 세상 가치관으로 보면 상류 사회에 속한 자들입니다.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자들입니다.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②

 

이처럼 베뢰아에서 믿는 사람이 날로 증가한다는 소식을 들은 데살로니가의 사악한 유대인들이 들었습니다. 악한 마음이 발동하였습니다.

무려 2백 리나 떨어져 있는 베뢰아까지 달려왔습니다. 또 군중들을 선동하고 폭력배를 동원하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십시오. 그 선동은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소동을 일으키는 무리에 베뢰아의 유대인들이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베뢰아의 유대인들이 적어도 바울 일행에 대해 적의(適意)를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은혜입니다. 이때 베뢰아의 신자들은 새 가족입니다. 작은 유혹이나 시험에도 넘어지기 쉬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번 가정해 봅시다. 이때 베뢰아의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과 합세하였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복음의 큰 어려움과 위기를 만났을 것입니다.

죽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동시에 베뢰아의 신자들도 교회는 위험한 곳이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을 만나겠구나. 교회 다니지 말아야겠다. 하며 낙심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뢰아의 신자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굳게 서서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 소동으로 바울은 안전하게 지낼 곳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곳 신자들을 감동하여 베뢰아를 빠져나가게 하셨습니다.

베뢰아의 신자들도 주님을 영접한 지 얼마 되지 않는데도 전도자들을 보호하였습니다. 이제 시작된 교회를 지키기 위해 자기들 목숨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이미 주님을 위해서 순교도 감당하겠다는 믿음으로 채워졌습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각오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너그러운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신앙은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말씀에 자리를 잡은 믿음은 자신뿐만 아니라 남의 생명까지 구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