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2년 말씀

영의 생각을 따라 삽시다(롬 08:01~11).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5. 2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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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약 70억 이상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의 길은 두 가지의 길밖에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생명을 얻는 길과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 영생을 상실하는 멸망의 길입니다(마 07:13, 14).

예수님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 중에도 성숙한 믿음의 자리에 이른 사람이 있고 아직도 어린아이 정도의 수준에 머무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 그 사람 모습을 보면 거의 짐작이 갑니다. 사도 바울도 육에 속한 사람(고전 02:14), 신령한 사람(15) 그리고 육신에 속한 사람(03:01) 등 세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①육에 속한 사람은(14절) 혼(ψυχικὸς)이라는 말에서 생겨났는데 동물 같은 존재 즉 육체의 본능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을 칭합니다. ②15절의 신령한 사람은 성령님(πνεύματος)이라는 단어에서 생겨났으며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 영으로 성숙한 사람을 칭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반대 개념입니다.

③03:01절의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으로 된 자라는 뜻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고린도교회의 문제 많은 자를 지목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영적 상태로 보면 미숙한 아이(νήπιος)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08장을 보시면 육신과 영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리고 05절에는 바울이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로 비교합니다. 이 말을 현대인의 성경은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나 성령님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님의 일을 생각합니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면 육신을 따르며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또 영을 따르며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라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영의 생각을 따라 삽시다.」로 정했습니다.

 

 

 1. 육신을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0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에 관한 일만 생각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울은 05절에서 육신을 따르는 자와 영을 따르는 자로 비교합니다. 고전 02, 03장에는 육에 속한 자, 신령한 자, 육신에 속한 자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했으나 여기서는 두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0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0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울은 먼저 영의 해방에 대해 선언합니다. 신앙인이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받았음에도 잘못 판단하면 육신을 따르는 자로 전락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영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잘못하면 육신을 따르는 자로 전락할 수가 있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민 13~14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 두령에게 가나안을 사십 일간 정탐하게 한 일(01, 02)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후 열두 명이 돌아와서 모세에게 가나안에 대한 정탐 활동을 보고하는 장면도(25~33)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삼무아를 비롯한 열 명의 정탐꾼은 사람의 눈으로 보고 사람의 생각을 따라 부정의 보고를 하였습니다(27~33).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 중심의 보고를 하였습니다(14:06~09). 결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로 광야에서의 사십 년이라는 세월을 방황합니다(14:29~34).

 

우리 모두 영의 눈으로 보고, 영으로 생각하고, 영으로 말하고, 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 자녀로서 모든 것을 능히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 속에서 살아갑니다. 육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불평과 원망 속에 살아갑니다. 06절 말씀을 읽읍시다.

 

0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영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육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과는 그 생각과 그 말과 그 행동이 다릅니다. 육신의 생각에 치우쳐 사는 사람은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고, 영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사람의 생각이 바뀌면 그 삶에 기적이 일어남을 믿으십시오. 내가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판가름 날 수 있습니다.

저주와 절망의 구덩이로 빠져 갈 수도 있고, 하나님의 복 된 삶, 은혜의 삶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내 앞길이 좋게 혹은 안 좋게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꼭 같이 교회 나와서 한 시간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예배 시작 때부터 오늘은 설교 빨리 끝나야 할 터인데? 하며 온갖 잡념에 사로잡혀 예배에 실패하는 분도 있습니다. 얼굴에 다 그렇게 보입니다. 관심법(?)으로 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심령의 문을 온전히 열지 않으면 세상 요소가 우리의 심령을 지배합니다. 더러는 성도 가운데 몸은 예배당에 앉아 있으나 마음은 어느 잔칫집에 가 있고, 어느 낚시터에 가 있고, 어느 유흥장에 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배가 끝나기 바쁘게 빠져나갑니다. 우리의 심령이 영에 사로잡히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기를 원한다면 신앙의 몸부림을 쳐야만 합니다. 악한 영은 우리의 생각을 지금도 세상 불신앙의 자리로 데려가려고 노리기 때문입니다.

 

0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2. 영을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0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앞서 말씀드린 대로 05절은 육신을 따르는 자와 영을 따르는 자를 대비시키면서 영을 따르는 자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나타내 줍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박사는 사람이 마음으로 열 가지 좋은 생각을 하려고 하면 노력도 열 번을 하여야 소망이 있는 한 가지가 떠오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실은 때로는 암울하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럴수록 긍정으로 생각하고, 긍정으로 말하여야 합니다. 같은 일도 어떤 사람은 부정으로 보고, 부정으로 판단하고, 부정으로 행동합니다. 긍정으로 생각하면 잘 될 수 있는 것도 부정으로 반응하여 혼란을 만듭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모든 것을 영으로 생각하고, 영으로 판단하고, 영으로 행동하고 있는가를 자신을 향해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생각을 심으십시오. 그러면 행동을 거둘 것입니다. 행동을 심으십시오. 그러면 습관을 거둘 것입니다. 습관을 심으십시오. 그러면 성격을 거둘 것입니다. 성격을 심으십시오. 그러면 나의 운명을 거둘 것입니다.

 

생각을 좋게 바꾸면 환경이 바뀝니다. 우리는 흔히들 저 사람이 바뀌어야 하고,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바뀌기를 기대합니다. 영을 따르는 사람은 상대편이 바뀌고, 내 주변 환경이 바뀌고, 상황이 바뀔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먼저 내 쪽에서 성령님에 감동으로 인해 긍정으로 바뀝니다.

아무래도 내가 바뀌는 것이 더 쉽습니다. 부부간에 자주 싸우는 사람은 우리 남편만 바뀌면 우리 집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아내가 바뀌면 우리 집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집에는 문제가 항상 존재합니다. 상대방은 그대로 두고 나만 바뀌면 됩니다. 우리 남편이 바뀌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아내의 마음만 바뀌면 됩니다.

우리 아내가 바뀌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남편의 생각이 바뀌면 됩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내편에서부터의 변화를 위해서는 내가 영을 따라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06절 말씀 다시 읽겠습니다.

 

0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함이 있습니다. 혹 세상을 살면서 마음에 평안함이 없습니까? 절망과 두려움과 공포가 내 마음을 지배합니까? 내 삶이 육신을 따르는 삶을 살기 때문에 온갖 세상 걱정과 근심과 염려 속에 갇힙니다.

우리는 세 가지 관계가 개선되어야 합니다. ①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②나와 너와 이웃과의 관계 ③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관계가 개선되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늘 마음의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나와 이웃과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얼굴만 쳐다봐도 마음이 언짢습니다. 어린아이 특징 아시지요?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심술부리는 겁니다.

 

0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 속에 영이 거하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으며, 영을 따르는 사람 그 속의 주인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심령에 성령님이 거하지 못하고 마귀가 들어오면 그때는 마귀의 종노릇을 할 것입니다.

 

 

3. 내 속에 성령님이 거하십니다.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성령님께서 내주하는 자는 성령님으로 인해 사망 권세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영이 살아나는 것만이 아니라 죽을 몸이 다시 살게 될 것을 밝힙니다. 10절에서 몸은 죄로 인해 죽게 됨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11절은 그 죽은 몸이 살아난다고 선포합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거듭난 영혼은 죽음까지도 해결됩니다. 지금은 죽지만 마지막 날에는 살아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나는 육신을 따르는 자인가? 영을 따르는 자인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의 품고 있는 생각을 지배하는 이가 성령님인가? 아니면 세상인가를 말입니다.

성령님이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내 행동을 지배합니까? 그러면 나는 영을 따르는 자입니다. 반면 세상의 것이 내 마음과 행동을 지배한다면 이는 육신을 따르는 자의 위치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육신과 영이라는 단어가 지금까지 반복으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볼 때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영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심령에 품고 있는 생각이 어떠하냐? 품은 그 생각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따라 영생과 영벌의 세계로 나누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자기 본능을 따라 살면서 지나친 교만, 욕심, 더러운 마음에 매여 있다가 결국은 자신을 파멸의 자리로 이끌어 갑니다.

 

롬 0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성령님을 따라 생각하고, 성령님을 따라 말하고, 성령님을 따라 행동하십시오.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믿음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08절을 봅시다.

 

0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믿음의 길에 서지 못하여 하나님을 근심되게 합니까? 교회에서 문제만 일으키는 걱정거리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다는 증거입니다. 내 입술이 긍정의 말을 할 수 있고 내 행동이 긍정의 행동으로 나타나고 내 생각이 긍정의 생각이 되도록 자신을 주님께 쳐서 복종시킵시다.

 

고전 0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 사람 보기에 좋은 물질의 가치를 누리며 사는 삶이 행복입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산다면 그것이 불행한 삶입니까?

역시 그것도 아닙니다. 행복과 불행은 내 가슴에 품고 있는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복을 받은 사람이다. 현재 복을 받는 사람이다. 라고 고백하면 복을받는교회의 진정한 성도입니다.

교회가 힘 있게 성장하며 이 지역을 선도하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영의 생각을 품은 엘리트가 있어야 합니다. 엘리트가 많을수록 교회는 활기찹니다.

성장과 발전의 가속도가 붙습니다. 언제나 건설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면서 적극 헌신의 자세로 교회를 받들어 섬길 때 복을받는교회는 힘 있게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확증이 있으면 변두리에서 일터로 들어오십시오. 일터에 있는 성도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 분은 교회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소금과 빛 된 역할로 쓰임을 받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일터에 있는 일꾼의 가치성을 누리며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