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대부분 사람은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제 삼의 장소에서나 아니면 전자기기만 있으면 어떤 장소에서도 근무하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컴퓨터만 켜만 웬만한 일은 다 처리할 수 있습니다. 상거래도 무난하게 이루어집니다. 한나절 반나절 하며 교통 시간을 논하던 시대는 옛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화상회의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든지 전화 한번 통화로 모든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아주 편리한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거리마다 곳곳마다 자판기 설치되어 있습니다. 계절에 상관없이 원하는 것은 가능해진 철없는 시대에 철없는 사람들이 철없는 식료품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좋은 세상, 편리한 세상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세상 환경이지만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하나의 위험한 사상이 다가옵니다. 무사 안일주의 사상입니다. 이 사상이 교회에 깊이 들어와 미래에 대한 신앙의 도전과 모험심을 마비시켜버립니다. 신앙의 절대 위기입니다.
그저 현실에만 적당하게 안주하려는 생각에 갇혀 버리면 어쩌면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도 교회와 복음의 가치도 세상 물결에 빠져들지 모릅니다.
기독교의 신령한 경건미는 사라지고 형식만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습이(마 23:13~29) 바로 우리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일이 되어도 그 신령한 의미와 가치는 점점 무디어져 갑니다. 예배는 주일 오전 한 번만 참석하면 주일 지켰다는 식으로 자위합니다. 형식만 앞세우다 보니 귀한 은혜가 값싼 은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앞날에 두 가지의 문(門)과 두 가지의 길(道)이(마 07:13, 14) 있음을 소개합니다. 두 가지의 문은 좁은 문과 넓은 문입니다. 두 가지의 길은 좁은 길과 넓은 길입니다.
넓은 문을 통과해서 넓은 길을 가는 사람은 마지막이 멸망입니다. 반면 좁은 문을 통과해서 좁은 길로 가는 사람 앞에는 생명입니다. 문제는 이 두 문이 다 계속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내 닫히게 됩니다. 그래서 좁은 문은 곧 닫힙니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왜 좁은 문이며 왜 좁은 길입니까? |
마 0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①죄의 짐을 벗어버리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 왕정 시대는 성읍 시대였습니다. 성읍 옆에는 큰 성문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문이 하나 있습니다.
큰문은 아침에 열고 저녁이 되면 닫는 문입니다. 혹 긴급한 일로 늦다거나 짐을 지고 온다든지 하여 큰문이 닫혔을 때는 작은 문을 이용하면 됩니다. 그러나 작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짐을 반드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일 그러하지 못하면 그 짐 때문에 문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내려놓을 것이 많습니다. 명예와 돈 현실의 모든 욕망을 짊어지고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앞에 놓인 문과 길이 좁다고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통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좁은 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길입니다. 그 길을 가는 도중에도 생명과 희열이 있고 그 길을 다 간 후에는 영생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세상의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좁은 길을 통과하여서 얻을 수 있는 생명 세계의 것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목적으로 사는 성도는 죄와 더불어 살 수 없으므로 죄의 짐을 홀가분히 벗어 버립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가는 성도는 죄의 짐을 벗어 버려야 하므로 선택의 폭이 그만큼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는 문과 가는 길을 좁다고 표현하였습니다.
행 0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②주님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통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멸망으로 나아가는 문은 길이 넓고 편안하여 걸림이 없습니다. 세상의 것을 마음껏 취하고 즐기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주님의 뜻에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자에게는 이 모든 것들을 절제하기 때문에 그 절제의 삶 자체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③구원을 얻는 자 외에는 찾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과 구원의 길이 좁을 수밖에 없는 것은 둘이나 셋 혹은 단체가 한꺼번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넓은 세상의 문과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문으로서 한 가정이나 한 집단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 부모가 잘 믿는다고, 혹 형제자매 친척 가족이 잘 믿는다고 덤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므로 좁은 문이요 좁은 길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 라고 고백한 베드로처럼 개인의 신앙고백을 통하여서 들어가기 때문에 찾는 이가 무척 적습니다.
2. 좁은 문을 향한 나의 각오가 어떠하여야 합니까? |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맞는 생명의 길과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 맞이하는 사망의 길 이 두 가지의 길은 우리에게 자유롭게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길, 방탕의 길에서 방황하는 것은 아닙니까? 조금만 더 있다가 천천히 돌아서서 생명의 문으로 생명의 길로 걸어가려고 말입니다. 살려면 지금 돌아서야 합니다.
동물의 세계에 자주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철새가 겨울이 다가오자 이동할 시기가 되어 다른 철새들은 날아가는데도 먹이의 욕심에 이끌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며 먹다 그만 살이 찌고 비대하여 날지 못하고 추운 겨울에 얼어 죽은 일 말입니다.
좁은 길을 향하는 길은 신령한 하늘나라의 만나를 먹는 참된 희락이 있습니다. 그 길을 다 간 후에는 영생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 좁은 길을 다 달리고 난 후의 일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딤후 04:0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0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0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좁은 문을 향해 나아가는 각오는 언제나 겸손이어야 합니다. 좁은 문이란 작고 좁으므로 머리를 숙여야 들어가는 문입니다.
천국 문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의 머리와 허리를 겸허하게 숙이고 굽혀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겸손하게 섬기는 자가 되어 사랑의 위치에 설 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사람은 머리를 숙일 수 있고, 허리를 굽힐 수 있습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삶은 곧 섬기는 삶입니다. 남을 높여 줄 줄 아는 성도가 진정 복된 삶을 누립니다. 우리는 좁은 문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좁은 문에 들어왔다고 당장 천국과 같은 영광의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넜다고 즉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복지에 이르기까지 40년간의 어렵고 힘든 광야의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주님의 좁은 문에 들어온 우리 믿음의 가족들도 주님과 함께 좁은 길로 동행해야만 합니다. 그 길이 개인의 형편에 따라 무척이나 힘들 수 있습니다. 그것까지도 각오해야 합니다.
3. 이제 좁은 문이 곧 닫히려고 합니다. |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모든 일에는 때가 있음을 아시지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습니다(전 03:01).
만일 그때를 잃으면 땅을 치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일명 열 처녀 비유를 보십시오. 매우 안타까운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을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마 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한 번 주인이 문을 닫아 버리면 그 문을 열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문은 공간만 좁은 것이 아니라 시간상으로도 좁은 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닫아 버리면 다시 들어갈 기회가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 문임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 좁은 문 앞에서 우리는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를 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에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열어주소서 하여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서 있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리고 창 07장에 기록된 노아 홍수에 관한 이야기를 오늘 중 읽으십시오. 심판의 물을 피하여 방주 가까이 와서 노아 할아버지 우리에게 이 방주의 문을 열어 주소서 하며 애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노아 때 심판의 복음과 방주 짓는 일을 보고도 무관심하게 넘겼던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아무리 애원해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마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나에게 내 부모에게 내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녀에게 친척에게 아직도 구원의 문 생명의 문이 닫히지 않았다면 이대로 있을 때가 아닙니다. 안전하게 그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준비를 다 하여야 합니다. 차일피일 미룰 때가 아닙니다.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자동차를 운행할 때 반드시 교통법과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만일 교통 법규를 따르지 아니하면 사고가 나기 알맞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 항로도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입니다. 내 길에 빛입니다는(시 119:105) 말씀의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자리에 왔으면, 좁은 문으로 들어왔으면 이탈하지 않고 잘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성도 여러분은 각자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 십자가가 여러분의 노후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십자가를 잘 감당하십시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 삶 전부를 통하여 내가 지고 갈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주님 기뻐하시는 사명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사명이라면 능히 감당할 힘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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