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2년 말씀

[부활주일] 예수님 부활의 증인으로 삽시다(눅 24:44~49).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4. 16.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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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은 매년 지키는 날짜나 주일이 다릅니다. 그래서 더러는 이렇게 물어보는 분이 있습니다. 5월 첫째 주일은 어린이 주일, 둘째 주일은 어버이 주일, 7월 첫째 주일은 맥추감사 주일, 11월 셋째 주일은 추수감사 주일로 절기가 고정되어 있는데 유독 고난주일과 부활주일만은 3월에 지키기도 하고 4월에 지키기도 합니까?

이렇게 된 이유는 325년 6월 19일 콘스탄티누스 1세의 니케아(Nicaea, 현재 터키의 이즈니크) 별궁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에서 정한 특별한 부활주일 계산법 때문입니다.

이때 공의회는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로 인정받습니다. 당시 부활주일을 결정할 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견해가 달랐습니다.

서방교회는 복음서대로 주일을 부활절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마 28:01) 동방교회는 유대인의 유월절을 기준으로 하여 니산월 14일을 부활절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양쪽 주장을 절충하다 보니 특별한 계산법이 나왔습니다. 바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3월 21일 춘분이 지나고 난 후 오는 보름날(음력 15일) 다음 주일을 부활주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이 계산법에 따르면 3월 22일부터 4월 25일 사이에 지켜집니다. 만일 보름날과 부활주일이 같으면 그다음 주일이 부활주일이 됩니다.

이 법칙을 따라 부활주일을 계산하면 가장 늦게 오는 부활주일은 2038년 4월 25일이 됩니다. 반면 가장 빠른 부활주일은 2285년 3월 22일이 됩니다. 그러면 2022년 부활주일을 계산해 보겠습니다. 춘분인 3월 21일이 음력 2월 18일입니다. 그러면 3월 보름은 4월 15일입니다. 이 보름을 지나 맞이하는 첫 주일 부활주일이 오늘 4월 17일입니다.

 

저에게 2022년 4월 17일은 뜻깊은 주일입니다. 45년 전인 1977년 4월 17일 교회 일을 위하여 사역자로 출발한 첫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본문은 고전 09:16~17절이었습니다. 공적으로 첫 예배를 인도 하다 보니 얼마나 긴장이 되었던지 예배를 마치고 나니 옷에 땀만 가득 배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지낸 일 돌아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제가 강단에 설지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만큼 서게 되겠지요.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저는 새롭게 믿음으로 무장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도 새롭게 믿음으로 무장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예수님 부활의 증인으로 삽시다」로 정했습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많은 사람이 부활에 대해 오해합니다. 살아나면 부활이라는 오해 말입니다. 성경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가 9회 정도 나옵니다.

➊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일(왕상 17:17~24), ➋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수넴 여자의 아들이 살아난 일(왕하 04:32~37), ➌죽은 선지자 엘리사의 뼈에 한 죽은 사람의 시체가 닿자 살아난 일(왕하 13:21),

➍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눅 07:12~15), ➎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막 05:35~43, 눅 08:53~55), ➏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일(요11:43~44),

➐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무덤들이 열리어 많은 사람이 살아난 일(마 27:52~53), ➑베드로를 통해 다비다(도르가)가 살아난 일(행 09:40), ➒바울을 통해 유두고가 살아난 일(행 20:09~12). 이상의 사람들 이야기는 부활이 아닙니다.

 

죽었다 다시 죽을 몸으로 살아나는 것은 소생(蘇生)이라고 합니다(막 05:35~43 참고). 부활이란 살아난 후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고전 15:04, 52) 것으로서 오직 예수님에게만 적용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저절로 부활한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라고 밝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사건을 계속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사건은 인류의 구속사(救贖史) 차원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예정과 섭리임을 나타내려 하심입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은 성령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쓰인 기간은 약 1,600년의 시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모세가 기록한 오경부터 말라기 선지서까지 B.C. 약 1,500년 동안에 기록되었고 마지막 성경 요한계시록은 A.D. 약 10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1,600년의 시차가 있지만 놀랍게도 초점은 오직 하나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부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05:39). 구약성경의 전체 흐름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힙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라는 말씀도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일이라고 밝힙니다.

 

마 12:39…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

고전 15:0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0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2.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증인 되어야 합니다.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널리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하여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요 11:25~26)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➊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➋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할 만큼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란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계 01:18 새번역).

 

사람의 앞날에 두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생명과 길과 사망의 길입니다. 당연히 생명의 길을 택해야지요. 이웃에게 전해 주어야지요. 한 마디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사실이면서도 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일이 더러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그 흔적이 사라지거나 아니면 환경상 보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증명하기 힘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나 또 그들의 마지막 삶 순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전하는 담대한 말씀을 한 번 볼까요.

 

행 05: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베드로는 유대인을 향하여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새번역 행 03:15) 라고 담대하게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 01:38).

예수님의 사역은 생명을 구하기 위한 전도의 삶이었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삶의 가치관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최고 가치를 부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삶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믿음의 가족은 예수님을 전하는 삶, 증인의 삶에 얼마나 힘을 기울입니까? 예수님을 알지 못하여 죽어가는 사람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어떻게 전합니까?

우리 모두 그날이 되면 세상을 떠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문제는 병든 몸으로 오래 살면 뭐 할 것이며, 세상에서 목에 힘을 좀 주는 생활을 했으면 뭐 합니까?

의인으로 서게 될 것이냐 멸망하는 죄인으로 서게 될 것이냐? 가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날에는 내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심판대 앞에 서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행 05:32).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거침없이 전했고 사람들은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02:37). 하며 반응합니다. 즉각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님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38). 이런 반응이 나오도록 담대한 증인이 됩시다.

 

 

 3. 예수님 부활의 증인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우리는 가끔 길가에 목격자를 찾습니다. 라는 현수막을 봅니다. 주로 교통사고가 났는데 확실한 목격자가 없어서 억울하게 피해를 본 자의 현수막입니다.

목격자의 신실하고 확실한 증언이 있어야 누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죄를 뒤집어썼거나 억울하게 피해를 본 자의 하소연이고 보면 잘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또 증인이 있다고 해도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바를 증언해 주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증언해도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면 사기가 될 수 있고 자기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직무 유기가 됩니다. 보고 들은 것을 알고 있다면 사실대로 말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 부활을 전하는 삶도 같습니다.

 

우리는 본 대로 들은 대로 사실대로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도 모두가 그런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증인의 삶을 삽니까? 그 답이 바로 49절인데 자세히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예수님의 마지막 약속입니다.

여기서 내 아버지의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약속(επαγγελιαν 에팡겔리안)은 대부분 성령님과 관계되어 사용됩니다(행 01:04, 02:33, 갈 03:14).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고 하신 말씀으로 보아 그 능력은 복음의 증인에게 약속된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능력(δυναμιν). 앞에서 약속한 것이 성령님을 전제할 때 이는 성령님의 성격에 대해서 암시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은 성령님입니다. 증인이 갖추어야 하는 힘은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능력을 얻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은 행 02:01~04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왜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 합니까? 그 이유는 47절에서 말한 대로 선교 활동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방 세계로 확장되어 나가기 위함입니다(행 01:08).

 

오순절 날 성령님 능력이 임함으로 사도들 모두가 능력을 입었습니다. 그 능력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력입니다. 이 능력 앞에 많은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의 심령이 열려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러자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및 전직 대제사장들까지 산헤드린 공의회에 모였습니다.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은 내립니다.

 

행 04:15….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이 중지를 모아 내린 결론을 사도들에게 전합니다. 이제부터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협박합니다. 이들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합니다.

행 0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이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물을 주고 가꾸면 됩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주님이십니다.

열두 사도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다 갖은 핍박과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해 제자들의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무서워서 은신처에 숨어 문을 꼭 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는 그 근심이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눅 24:52~53, 요 07:05, 행 01:14, 09:01~21).

그들의 설교 핵심도 오직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이제 승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재림(再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확실히 있습니다.

 

마 0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