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2년 말씀

[종려주일] 지금은 모두가 통곡할 때입니다(눅 23:27~31).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4. 9.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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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부활주일 전 주일을 종려주일(棕櫚主日)이라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많은 사람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며 뜨겁게 환영하였습니다(마 21:01~11, 막 11:01~11, 눅 19:28~38, 요 12:12~19). 구약성경 슥 09:09에 예언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교회마다 이날이 되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시가행진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날을 호산나주일 또는 고난주일이라 부릅니다. 오늘은 사순절(四旬節)의 여섯 번째 주일에 속합니다. 요일별로 보면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오후 3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므로 이번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일 년 중 가장 경건하고 엄숙한 주간이 바로 이번 주간입니다. 이번 주간은 새벽을 깨우는 주간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나무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실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을 가는 그 현장에 많은 사람이 동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구경 나온 사람도 있고, 열두 제자도 있고, 예수님의 고난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 말씀을 중심으로 지금은 모두가 통곡할 때입니다. 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1.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무리가 있습니다.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열두 제자도 있고 칠십 제자도 있고 조용하게 헌신하던 여자들도 있습니다. 이 중에 특별히 여자들은 자기들의 물질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 좋아서 기쁨으로 감당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받는 일 너무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누리는 은혜는 천국 생활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헌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유대인 교권자들에 의해 십자가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어서 왕궁 내 수비대 뜰 브라이도리온으로 끌려가 치욕스러운 일을 당합니다.

 

막 15:16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8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깁니다. 대신 자색(紫色) 옷을 입힙니다. 가시관을 엮어 씌웁니다. 그 앞에서 희롱의 절을 합니다. 무자비하게 구타합니다. 침을 뱉습니다. 모욕을 줍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고 조롱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날 평소 원수 관계로 지내던 빌라도와 헤롯왕이 친구가 됩니다. 원수 관계로 지내던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마음을 합쳤다는 뜻입니다(눅 23:12).

빌라도의 명으로 예수님을 채찍질한 후 골고다를 향해 십자가 형틀을 지고 가게 합니다. 전날부터 고문당하시고 잠을 못 잤으니 가다가 쓰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마침 그곳에 구경을 나온 구레네 시몬이 로마 군인에 의해 지명을 당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구레네는 현재 아프리카 북부 지방 리비아의 트리폴리입니다. 이곳에 살던 시몬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교통이 불편했던 그 시절 시몬이 구레네에서 예루살렘까지 먼 거리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왔다면 그 종교의 열정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여자들은 안타까움을 더욱 가누지 못합니다. 마음이 여린 여자들이다 보니 슬픔을 억제하지 못해 통곡합니다.

 

27절의 문장 구조를 보면 여자들만 애통하여 운 것이 아니라 따르는 많은 사람이 애통하여 울었습니다. 이 가운데 여자들 눈물이 더욱 애절하였을 것입니다. 약한 여자들이니 정치력이 없습니다. 경제력도 미치지 못합니다. 육신으로도 예수님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시몬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며 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슬픔의 눈물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는 예수님을 위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는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해서 웁니다. 가슴이 터지도록 아파서 웁니다. 나를 위한 슬픔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슬픔입니다.

아름다운 슬픔, 귀한 슬픔입니다. 이 여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제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의 눈물이 나와야 합니다. 이 여자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이 이러하여야 합니다.

 

 

 2.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28과 같은 여자들의 애통함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누가가 가지고 있는 여자에 대한 독특한 관심의 표현입니다(눅 01:26~56, 02:36~38).

여자들의 행적을 다른 복음서와 달리 드러내는 누가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당시 세계에서 무시를 받던 여자들의 믿음을 통해 구원과 하늘나라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자도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전하려 함입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예수님의 골고다행을 따르는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우는 것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31절까지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이 말은 울며 십자가 뒤를 따르는 여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더 넓혀 적용하면 많은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딸과 여자로 혹은 시온의 딸로 묘사한 점으로 보아(사 01:08, 미 04:03, 슥 02:10)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➊첫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을 믿는 자를 위하여 속죄 제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애통하고 슬퍼해야 할 일이나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마땅히 져야 할 일입니다. 이 길만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 53:0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➋둘째, 애통해하는 관심의 대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작 마음 아프고 가슴을 칠 일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그 결과를 내다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가까이 다가가셔서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자기 죄에 대한 무지(無知)입니다.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믿음의 눈이 감겨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외친 가상칠언(架上七言) 아시지요. 이 가운데 첫 말씀을 보겠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용서의 종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처절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뜻을 이루시는 고난입니다. 실패자의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살길을 열어주시는 죽음입니다. 따라서 2천 년 전이 아닌 현재 우리는 찬송가 305장을 불러야 합니다.

➊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➋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고난 없는 영광은 헛된 일입니다.

 

눅 23:43(구원의 종교), 요 19:26(효도의 종교), 막 27:46(고난의 종교), 요 19:28(생수의 종교), 요 19:30(완성의 종교), 눅 23:46(소망의 종교).

 

 

 3. 예수님은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십니다.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울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자녀들의 속 썩임으로 인한 울음, 육신의 질병으로 인한 울음, 신세 처량함으로 인한 울음 등입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 의한 울음보다 더 중요한 울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울음입니까? 자신의 불신앙으로 인한 안타까움의 울음입니다.

불신앙의 결과로 만날 파멸을 염려하는 울음입니다. 이런 울음은 회개의 열매를 맺습니다. 28절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자는 심판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의 근거가 29절에 나옵니다.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보라(ιδου) 날이(ημεραι) 이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비롯하여 따르는 무리를 향해 특별 메시지를 전하실 때 사용하는 용어가 보라입니다. 주목하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주목해야 합니까?

이어지는 문구를 보십시오. 어떤 날, 특별한 날이 곧 온다는 표현입니다. 특별한 날은 종말을 의미합니다. 눅 17: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31 그날에, 21:23 그날에는,

이 표현은 좁게는 A.D. 로마의 Titus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을 예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넓게는 장차 임할 세상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는 당연히 심판을 만납니다. 그들 때문에 나라 전체에 심판이 임합니다. 심판을 이기는 길은 회개의 눈물뿐입니다. 회개의 눈물은 미래의 심판을 막아줄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행 02:36….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러면 우리 모두 얼마나 울어야 합니까?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다윗은 이렇게 울었습니다. 내가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06:06).

예수님은 다윗과 같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05:04).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나 자신을 위해 울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는데, 나는 십자가를 외면한 일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일거리를 외면한 일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그 외에도 울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불순종하는 일로 울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일로 울어야 합니다. 믿음 없는 일로 울어야 합니다. 은혜에서 멀어진 일로 울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영혼에 무관심한 것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교회보다 나를 더 중하게 여긴 것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로 울어야 합니다. 곁길로 가는 자녀의 영혼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1945년 10월 독일 히틀러 치하에서 억압받던 독일교회는 세속화된 신앙을 재정비하고자 십자가 앞에 모여 참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선언문인데 그 선언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➊첫째, 더욱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지 못한 죄를 자백합니다. ➋둘째, 더 진실하게 기도하지 못한 죄를 자백합니다. ➌셋째, 더 감사와 기쁨에 넘쳐 살지 못한 죄를 자백합니다. ➍넷째, 더 뜨겁게 사랑하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신앙고백도, 진실한 기도도, 감사와 기쁨에 넘치는 삶도, 뜨거운 사랑도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만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의 통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위기는 곧 십자가 믿음의 위기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기독교의 진리도, 생명도, 능력도, 복음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믿음은 생명도 능력도 없는 쭉정이 믿음입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아 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눈물 흘려야 할 여러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주님으로 인해 내 믿음이 새롭게 회복되는 은혜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심령에 잘 새깁시다. 냉철하게 자기를 돌아보고 무디어진 믿음의 감각을 눈물로 잘 다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