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India)의 위대한 영혼으로 불리는 간디(Karamchand Gandhi, 1869.10.2.~1948.1.30.)에게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선생님, 제 아이가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서 이가 다 썩을 지경입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 아들은 선생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 아이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여자의 이야기를 다 들은 간디는 한 달 있다가 다시 오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야기해주기를 바랐지만, 간디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여자는 한 달이 되자 아이를 데리고 간디에게 다시 갔습니다.
그런데 또 한 달 후에 오라고 말을 합니다. 간디의 말에 마음이 상했지만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한 달이 지난 후 아이를 데리고 간디에게 갔습니다. 간디가 아이에게 말합니다.
얘야, 사탕을 많이 먹으면 이빨이 상한단다. 건강에도 안 좋고 고치려면 돈도 많이 드니 이제부터 사탕을 그만 먹어라. 이에 아이는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자가 못마땅한 듯 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데 왜 세 번이나 찾아오게 하십니까? 그러자 간디가 말합니다.
사실 저도 사탕이 이빨에 안 좋은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저도 두 달 동안 사탕을 끊기 위해 노력하여 끊었다는 확신이 들어서 이제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간디는 자신이 변화되었다 확신이 들 때 비로소 아이의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아무리 옳은 가르침이라도 자신이 행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것은 위선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본을 보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이 말로만 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였습니다(마 23:13~29). 우리도 그런 모습일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합시다」로 정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설교 제목처럼 가꾸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권합니다. 오해하고 들으면 바울의 말이 좀 거만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하며 삽시다. 라는 제목을 놓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그럴만한 인품도 자격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람도 이 제목 앞에 당당할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은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보자는 자기 각오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본받을 만한 분을 일러 스승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사람들에게 지도자, 아버지, 스승이라 불리기를 즐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23:08). 그러면 혹 바울이 자기를 돋보이려고 이 말을 합니까?
사람으로부터 좀 존경을 받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고린도교회를 향해서도 같은 식으로 이미 하였습니다(고전 11:01). 자기 우월감이 아닙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헌신에 대한 실제 권면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바탕에서 바울은 나는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입니다. 당신들도 내 모습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라고 자기 추천을 하였습니다. 육체와 세상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갈 05:24)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갈 02:20)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할 정도의 인물이 자기 외에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울은 그들을 눈여겨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그들을 눈여겨보라는 말을 할 때 여러분은 그 복수의 헌신자가 누구인지 짐작이 갑니까?
빌립보서에 나온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빌 02:19, 25)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이 두 사람은 바울의 사역을 돕는 동역자입니다. 이 가운데 에바브로디도를 보겠습니다.
빌 0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이 헌신자에 대하여 인적 사항이 자세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전해지는 이야기나 빌립보서를 보아 빌립보교회의 대표자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이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로 갇혀 있을 때 빌립보교회가 바울을 위로하기 위해 준비한 선물을 전달하였습니다(빌 04:10~18).
당시 마케도니아에 위치한 빌립보교회에서 바울이 갇혀 있는 로마까지의 거리는 1,500km가 넘습니다. 걸어서 간다면 40일 이상 걸립니다. 그런데도 에바브로디도는 복음을 전하다 갇혀 있는 바울을 돕기 위하여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로마 감옥까지 왔습니다. 바울의 옥중 뒷바라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병이 들었습니다. 바울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이런 근심거리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빌 02: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말을 그대로 본받았습니다. |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세상 모든 장점을 배설물처럼 내려놓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빌립보교회에 전한 바울의 메시지는 성도들의 심령을 흔들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삶의 이유였고, 삶의 소망이었고, 삶의 즐거움이었습니다. 복음을 들고 세계를 누빈 사명자의 나를 본받으라는 메시지에 반응한 빌립보교회 성도들 모습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바울의 말을 그대로 실천하였다는 뜻입니다. 이 부분만 해도 빌립보교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할 때 그 말을 불편함 없이 받아들인 배경이 무엇입니까?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한 일입니다. 바울과 빌립보교회 사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13권의 서신서에 등장하는 교회 가운데 가장 모범 된 교회가 빌립보교회입니다.
더러는 본이 되는 교회가 있습니다. 섬기는 일로 즐거워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본받는 삶과 섬기는 삶이 복된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본을 보여주는 삶과 본을 받는 사람 모두가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이를 요즘 통용하는 말로 하면 멘토(mentor)와 멘티(mentee)라고 합니다. 한 사람을 성공자의 길로 이끌어주고 신앙으로, 인격으로 인생을 격려하며 지도하는 상담자를 멘토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조언자, 상담자, 후원자 말입니다.
또한 멘토의 활동을 통하여 도움을 받는 사람을 멘티라 합니다. 이 멘토라는 단어가 우리 교회 성도 모두에게 적용되면 좋겠습니다. 신앙과 인격으로, 믿음과 사랑으로, 지혜와 지식으로 이끌며 영향을 미치는 믿음의 멘토가 되라는 뜻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교회의 성숙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멘토의 활동(mentoring)에서 나옵니다. 흔히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험한 세상이라고 합니다. 틀린 말 아닙니다.
그래서 위로하고 돌보는 멘토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함께 논하고 신앙과 인격과 성품을 다듬어주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힘들게 살아도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 없습니까?
의논할 사람 없어서 문제를 혼자 풀어가려고 머리를 싸맵니까? 힘에 부쳐 포기하려는 마음이 생깁니까? 그럴수록 이들에게 따뜻한 멘토가 필요가 합니다.
그 역할이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 교회에서 성공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 곁에는 항상 좋은 조언자 멘토가 있습니다. 이끌어주는 사람, 밀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덜 외롭습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요즘 유행하는 말 가운데 소확행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의 줄임말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소소한 행복이 있어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의 소확행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공동체에 속한 자체가 소확행입니다. 나를 본받으라는 바울의 메시지에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그대로 반응한 것처럼 성경을 따라서 주님을 본받는 생활이 소확행의 출발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 중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이 떠난 후에도 바울의 메시지라면 잘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의 믿음과 인품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3. 말씀을 본받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19절을 잘 이해하기 위해 연결 절인 18절을 봅시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해 내가 지금까지 여러 번 말했습니다. 다시 눈물로 말합니다. 여러 사람이 십자가 길을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말씀에서 이탈하면 마지막은 멸망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빌립보교회를 사랑하는 바울이 하는 말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απωλεια). 멸망은 구원의 반대 개념으로서 사악한 자에 대한 형벌입니다. 영원한 파멸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마 07:13, 벧후 03:07).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배척하는 마지막 길은 멸망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추구하는 삶이 자기만을 위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 시민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부터 보십시오. 멸망으로 치닫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생존 경쟁을 합니다. 남보다 빨리 성공하고, 남보다 앞지르고, 더 많이 소유하고, 오직 인생을 즐기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달려야 합니까?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인생 갈림길에서 잘못 살았다고 후회하며 다 헛된 일이라고 탄식할 때는 어쩌면 늦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제3차 선교 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가 잡혀서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와 많은 고급 관리 앞에서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 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나를 본받으라는 신앙인답게 고백하는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기를 원하였고 예수님을 만난 후 일생을 복음 전파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미래를 예측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세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세상 그 어떤 지식보다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자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둘째, 내 나이는 몇 살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자기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나이는 믿음의 나이를 말합니다. 믿음의 연륜만큼 성숙하였느냐 말입니다.
셋째,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20년 30년 후 인생 황혼기에 나는 어떤 삶에 처해 있을지를 예측하고 살아야 합니다. 천국 소망이 확실하냐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천국에 대한 관심을 끄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삶이 신령한 것보다 더 좋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액세서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외식자로 전락합니다. 믿음 감각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자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분에게 베드로가 전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벧전 0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성경 번역을 집중으로 하는 위클리프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s) 소속 미국인 더그 멜란드(Doug Meland) 선교사 이야기입니다. 멜란드 선교사 부부는 브라질의 오지(奧地) 풀니오(Fulnio) 인디언 마을에 들어가 의료 활동을 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이 처음에 멜란드 선교사 부부를 보고 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원주민들이 말하는 백인은 오래전부터 그들을 총칼로 괴롭힌 자에 대한 증오의 말입니다. 그런데도 멜란드 부부는 비난을 감수하며 병들어 죽어가는 원주민들 질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원주민들이 존경할 만한 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멜란드 부부는 원주민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10년 만에 인디언 언어를 배워 그들과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는 이상 원주민들의 풍습을 따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원주민들이 그들을 보고 백인 인디언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번은 선교사 부부가 무릎을 꿇고 더러워진 원주민 소년의 피 묻은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는 추장이 선교사 부부에게 지금까지 인디언 원주민의 발을 씻어 준 백인을 본 적 없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때로부터 선교사 부부가 원주민들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브라질의 성자로 불렸습니다.
인디언 원주민들이 멜란드 선교사 부부에서 하나님을 보았듯이 복을받는교회 여러분도 좋은 별명을 얻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모두가 인정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별명은 전도의 확장 기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호칭을 받아야겠습니까? 먼저 교회 안에서 저분은 복을받는교회의 진짜 기둥이야 라는 별명을 얻어야 합니다.
밖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이란 별명을 받을 수 있도록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디서든지 나를 본받으라며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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