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2년 말씀

메시아를 기다리고 만나고 전하고(눅 02:36~38).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2. 26.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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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만이 유일한 사실입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변하고, 평생을 같이할 것 같던 우정도 변합니다.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가치와 기호가 생겨납니다. 따라서 욕구에 대한 우선순위도 자연스레 바뀝니다. 그래서 영원히 변치 말자던 맹세조차도 물거품 됩니다. 사람인 이상 변심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변치 않는 약속이 있습니다. 변치 않는 약속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가치 있는 약속입니다. 꿈과 희망에 대한 약속은 인간의 모든 불행을 치료할 수 있는 명약입니다.

 

혹은 그런 꿈이 시들면 때로는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꿈과 기다림은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은 더 좋은 날, 더 기쁜 날, 더 건강한 날, 더 행복한 날, 더 보람된 날을 기대하는 꿈으로 살아갑니다. 이 꿈이 어려운 현실을 극복해 나갑니다. 꿈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 공동체에도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스라엘은 일찍부터 민족 공동체의 꿈을 품고 있었습니다. 바로 메시아를 대망하는 꿈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꿈을 현실에서 체험하고 이웃에게 전하며 살아가는 한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 할머니 이름은 안나입니다. 마침내 그 영광스러운 평생의 꿈이 이 할머니에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메시아를 기다리고 만나고 전하고」로 정했습니다.

 

 

1. 메시아를 기다리는 안나가 있습니다.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Ἄννα). 안나는 구약성경 한나(삼상 01:02)의 히브리어 음역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하면 기억나시지요. 안나의 이름 뜻은 은혜, 은총 이런 의미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안나는 그 시대 상황에서 보면 나이가 매우 많은 분입니다. 거기다 남편을 일찍 여윈 과부입니다. 눅 02장을 보면 오늘 본문에 앞서 또 한 사람의 노인이 나옵니다. 시므온 할아버지입니다(25). 안나와 더불어 성전 중심으로 평생 메시아를 기다리며 경건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본서 저자 누가는 이 시므온을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전합니다. 이 시므온에 대해서는 2010년 3월 14일 주일에 설교하였습니다. 오늘은 안나를 중심으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안나가 살던 신구약 중간기에 해당하는 시절 예루살렘은 평화와는 상관없는 암흑의 도시였습니다. 그런 때에 메시아 오심을 기다리는 삶을 산다면 이는 대단한 경건입니다. 36절을 중심으로 이 안나에 대한 인적 사항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안나의 소속은 아셀 지파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이스라엘은 열두지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 옛날 족장 시대 때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네 아내를 얻었고 거기에서 난 열두 아들이 지파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열두지파 유래를 보면 열두 아들 중 레위가 제사장직을 감당하기 위해 지파에서 빠집니다. 요셉도 빠집니다. 대신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이 각 지파로 참석하여 열두지파를 이루었습니다.

안나가 아셀 지파라 하였으니 아셀 지파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셀은 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으로 열두 아들 중 여덟 번째 아들입니다(창 30:13). 뜻은 행복한, 축복받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아셀 지파에 대해서는 2021년 5월 23일 성경 예언대로 이루어진 아셀 지파(신 33:24~25)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아셀 지파 영역 해양에서 기름이 나오므로 이스라엘은 산유국이 되었고 그 결과 경제 대국이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안나 아버지 이름이 뭡니까? 바누엘(Φανουήλ)입니다. 바누엘 이름의 의미가 좋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브니엘(창 32:30~31)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입니다.

 

안나라 하는 선지자(προφῆτις 프로페티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예언하는 직분입니다. 아마 안나가 젊을 때 이런 사역을 한 것 같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봐도 여자 선지자는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이로 보아 안나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 경건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는 이스라엘이 주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나머지 열 지파의 행방은 불투명했습니다. 이는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다 귀환(歸還)한 자 대부분이 이 두 지파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나가 속한 아셀 지파는 명맥만 겨우 이어가던 지파입니다. 이런 소수 지파에서 선지자라는 굉장한 인물이 나온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아셀 지파가 분배를 받은 땅은 갈릴리 산맥 서쪽 지중해로 이어지는 경사 지역 에스드렐론 평야 일부와 악고 평야 지대의 땅입니다.

남으로는 갈멜산 이남까지, 북으로는 두로 연안까지, 동으로는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지파에 접하는 비옥한 땅입니다. 그러면 안나가 어떻게 자기 지파의 땅이 아닌 예루살렘에서 지내고 있습니까?

이는 몇 대조 조상 가운데 예루살렘에 와서 유월절을 지킨 일이 있습니다. 이후 성전 중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문 것이 현재 안나가 태어난 배경입니다.

 

 

 2. 안나는 메시아 오실 것을 기다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7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7절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 개정판과 개역판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막에 함께 띄어 주십시오.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어느 부분을 택하느냐에 따라 안나의 추정 나이가 달라집니다. 개역판으로 해석하면 당시 유대 사회의 처녀 조혼 풍습에 비추어 볼 때 안나는 14세를 전후로 결혼하였을 것입니다. 거기다 결혼 생활 7년을 하였습니다(36).

그러면 안나의 나이는 결혼할 때가 14세, 결혼 생활이 7년, 과부 된 지 84년 이렇게 하면 약 105세가 됩니다. 반면 개정판으로 해석하면 안나가 결혼할 때가 14세, 결혼 생활이 7년 여기까지는 같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되고 현재 84세라 하였으니 혼자 산 세월이 63년입니다. 안나의 나이가 37절 해석 여부에 따라 21년 차이가 납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납니까? 이는 37절을 해석하는 방향 때문입니다.

원문은 안나가 예수님을 만난 때가 84세 때인지 아니면 혼자 된 지 84년이 된 해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안나의 전체 나이를 84세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안나가 과부로 지낸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원문에서 전치사로 사용된 ως(ἕως)를 [~까지 ~동안에] 이해하는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일단 우리는 개정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 고령자 연령을 참작할 때 84세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현재 한글 개정판은 개역판 해석을 배격하였습니다.

안나는 거동하는 일이 힘든 나이임에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과 기도로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마음에 말할 수 없는 외로움과 어려움이 있다는 뜻입니다.

안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 마음을 위로해주셨습니다. 안나는 메시아가 오셔서 온 세상을 구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해 주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이 소망 하나만으로 외로움도 슬픔도 생활고도 다 참고 기다렸습니다.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육신의 섬김보다는 메시아가 오셨다는 소식을 시므온의 찬양으로(눅 02:28~32) 깨달은 것 같습니다. 안나는 메시아 만나기를 고대하였습니다. 

이때의 기간은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가기 전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산모는 자녀를 낳은 후 율법에서 정한 기한이 되면 제사장에게로 가서 규례대로 예물을 드려 속죄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산모는 부정하게 된 것으로 여기고 산모와 아이를 위해서 정결하게 될 수 있는 일종의 제도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 기간이 남아는 40일, 여아는 80일입니다(레 12:01~05). 산모는 정결 예식으로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드렸고, 속죄제는 출산에 따른 부정(不淨)을 제거하는 뜻에서 드렸습니다. 이때 각 예물은 번제로 양, 속죄제는 비둘기였으나 가난한 경우 번제물도 양 대신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레 12:01~08, 눅 02:24).

 

 

 3. 안나는 메시아를 만난 복을 이웃에게 전했습니다.

 

38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고뇌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도무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때입니다. 소망의 끈이 끊어졌을 때입니다. 사람은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내일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메시아를 소망하는 기대도 흔들리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복 중의 복입니다. 안나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동안 자신의 모든 고통이 단번에 이해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날의 복을 주시기 위해 성전에서 계속 금식하고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감사(ανθωμολογειτο 안도몰로게이토)를 올렸습니다. 여기 안나의 감사는 그저 평범한 감사가 아닙니다. 찬양하다, 무엇인가를 신앙으로 고백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안나의 감사는 신앙 고백이 이루어짐에 대한 감사입니다.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속량은 예수님께서 이루실 새로운 구원의 개념입니다(롬 03:24, 엡 01:07, 골 01:14).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 이스라엘은 별 소망이 없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압제가 계속되어 해방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현실과 미래 모두 불투명하였습니다. 로마의 힘은 너무 강해서 이스라엘의 해방은 물거품처럼 여겨졌습니다.

이런 희망 없는 현실에서 안나는 마침내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에게 전하는 사명자의 삶으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행복한 삶이 무엇입니까? 먼저 내가 구원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나는 일입니다. 그 예수님을 이웃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불행한 삶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삶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몰라서 예수님을 이웃에게 소개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 등장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에 많은 사람이 당신이 메시아이냐며 궁금해했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였습니다(요 01:23).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무명의 청년 예수님을 많은 사람에게 메시아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담대히 선포하였습니다.

 

요 0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안나는 자기 위치가 어디인지 알았습니다. 그분을 전하는 삶이 자기의 일임을 알았습니다. 이 복음 전하는 기쁨을 삶의 최고 행복으로 알았습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안나처럼 우리도 이웃에게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분입니다. 라고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영생을 주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라고 전해야 합니다. 이 일을 감당하는 일이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안나는 84세까지 버텼습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로 밀고 나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연로한 이 과부의 행동을 이상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나는 세상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복음만 전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복을 두 가지 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복과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누리는 경제, 지위, 건강, 학벌 등은 눈에 보이는 복입니다. 이런 것에 비하여 믿음, 소망, 사랑, 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입니다. 이 두 가지 복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복이 더욱 소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집, 많은 재물, 아름다움, 명예 등은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그러나 없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덜 중요합니다. 반면 믿음, 구원, 천국은 없으면 안 됩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구원받은 자는 교회관이 다르고 구원관이 확실합니다.

 

안나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소망으로 살았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내 슬픔 내 고통 다 사라질 것이야, 그분을 만나면 내 인생의 한이 다 풀릴 거야, 그분을 만나면 참으로 행복할 거야. 라는 꿈으로 살았습니다.

메시아를 소망하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 줄 대망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삶은 행복합니다. 어떤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품고 살 수 있는 버팀목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삶의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다시 오실 소망의 주님을 이웃에게 전하는 삶입니까?

흔히 말합니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과 시간이 있어도 건강이 없더라. 작은 시간과 작은 물질과 작은 건강이라도 있을 때 복된 사명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사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