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 가운데 이런 유형이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고, 술과 담배를 앞세운 유흥도 마음껏 즐기고, 하고 싶은 일 마음대로 하고, 가고 싶은 곳 마음대로 가는 짧고 굵은 인생을 살겠다는 사람입니다. 누가 뭐래도 한 번만 사는 인생, 내 하고 싶은 대로 강렬하게 살겠다는 그 삶을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남의 인생을 놓고 함부로 참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우리 믿음의 가족은 세상일이 아무리 혼탁해도 세상을 벗어나 살 수는 없습니다. 지구를 떠나지 않는 한 세상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삶의 현장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고 사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과 어울리다 보면 세상 유혹에 물들기 알맞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복된 곳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 믿음의 가족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특별히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는(마 05:13~14) 말씀입니다.
이 메시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 것 같습니까? 세상 사람과 구분된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구분된 삶입니까? 그 구분된 삶의 지침이 오늘 말씀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오늘 말씀은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성도의 먹을거리에 대한 지침을 다시 반복하는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구분되는 삶이 되는지를 안내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복을받는교회 가족은 구별되어 살아갑니다.」로 정했습니다. 은혜받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복을받는교회 가족은 믿음의 정체성을 잘 지킵니다. |
0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오늘 말씀의 제1 수신자는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생활 방식을 안내하는 메시지입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이 부분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녀임을 밝힙니다. 제2 수신자는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 믿음의 가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복을받는교회 가족이 여호와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잘 지켜나가야 하는지 그 생활 방식을 자세하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자녀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신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백성은 거룩한 속성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DNA가 있습니다(레 11:45).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베지 말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자해(自害)하는 행위는 고대 이방인들 풍습입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죽은 자를 위하여 고행(苦行)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교도들은 장례식을 행할 때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음부(陰部)의 신을 위한다며 특별 행위를 하였습니다.
그 행위가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는 일입니다. 자학과 고행을 통해 자기가 섬기는 신의 마음을 움직여 동정을 얻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행위를 바로 미신(迷信)이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게 구별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런 우상 숭배의 행위와 장례 풍습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레 19:28). 또 눈썹 사이의 이마 위 털도 밀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관습상 머리털을 밀지 않았습니다. 대머리는 수치와 멸시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왕하 02:23).
예외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머리털을 깎는 일은 있었으나 지나친 상제(喪制) 행위는 절제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나의 구원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까? 믿습니까? 진실한 성도는 세상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삽니다. 이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성도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을 때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도의 우선 특징이 세상과 구별된 삶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구별된 삶이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은 오감(視聽嗅味觸)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냄새를 맡습니다. 육신 속에는 타락한 성품이 있습니다. 도덕의 차원에서 보면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이 가득 차 있고 종교의 차원에서 보면 우상 숭배와 이단과 술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과 구별된 길을 갑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속성인 원수 맺는 것과 당 짓는 것과 투기와 시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탐심에 기웃거리는 마음이 늘 떠나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탄식이 나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궁전 문화 중심에서 살았지만 믿는 자의 정체성을 잘 지켜나간 인물입니다. 우리도 다니엘처럼 구분된 삶을 살기 원합니까? 성도의 정체성을 내가 속한 삶의 영역에서 잘 지켜나가기를 원합니까? 이런 마음이 강렬하게 일어날 때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일 01:0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2. 복을받는교회 가족은 구별된 삶을 삽니다. |
03 너는 가증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04 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의 정체(正體)성은 여호와의 자녀입니다(01). 02절 중심으로 보면 여호와의 성민입니다. 여기서 용어를 정리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자녀와 여호와의 성민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둘을 합쳐 하나님의 자녀로 통일하겠습니다.
02절의 여호와의 성민에 이어 나오는 말씀이 어떠한지를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자기 기업의 백성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보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길을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나아가는 길에 복되고 즐거운 일도 있습니다. 때로는 믿음을 흔드는 불편한 상황도 찾아옵니다. 세상 유혹이라는 불편입니다. 불편하면서도 구별된 삶은 절제로 무장하여야 합니다.
성령님의 9가지 열매 중 마지막 열매인 절제(갈 05:23)로 무장하면 그 삶이 복됩니다. 03절과 04절 말씀을 문자 자체로 보면 하나님 자녀에 대한 음식 규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을 수 없는 동물에 대한 구별입니다.
먹을 수 있는 동물은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어야 하고 새김질을 하여야 합니다. 소, 양, 염소, 사슴, 노루 등이 해당합니다. 이 두 가지 특성 중 한 가지만 가지고 있으면 먹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먹는 동물 중 이에 해당하는 것이 돼지입니다. 돼지는 발은 쪽발이나 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에 먹지 못하는 동물로 구분하였습니다(08).
유대인과 이슬람인 입장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돼지고기나 족발 먹는 것 보면 혐오할 것입니다.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물에 사는 물고기도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기준이 있습니다(09).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모든 것은 먹을 수 있습니다. 동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지느러미나 비늘 이 가운데 한가지라도 갖추지 못하면 먹지 못합니다.
비늘 없는 고기 중에 무엇이 있습니다. 장어, 갈치, 오징어, 낙지, 문어, 고등어, 꽁치, 조개, 미꾸라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 가운데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이 11~20까지 자세하게 나옵니다.
여러분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먹을 수 있는 새는 정결한 새입니다. 반면 먹을 수 없는 새는 독수리 계열과 까마귀 종류와 학 종류와 날기도 하고 기어 다니기도 하는 조류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을 보면서 혹 의문점은 들지 않습니까? 왜 어떤 동물은 먹을 수 있고 어떤 동물은 먹지 못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점 말입니다. 좀 더 세밀하게 왜 발의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면 먹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는 못 먹는가 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모른다 입니다. 오래전부터 이런 질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왔지만 확실하게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단정할만한 해석은 아직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머리로 다 이해하고 믿으려면 낙심하기 알맞습니다
건강한 성도는 자기 견해와 지혜로 다 이해되지 않아도 그대로 순종하고 따릅니다. 왜냐하면 세상일은 사람이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거리 가지고 이리저리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지킬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그대로 수용하였습니다.
3. 복을받는교회 가족은 거룩의 길을 가야 합니다. |
레 11: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은 평행 본문이 레위기 11장입니다. 이곳에 보면 땅에 기는 짐승과 물속의 고기와 하늘에 나는 새에 대하여 나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신명기는 이 부분을 생략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같은 내용이지만 마지막 대지를 레위기에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순종은 기적을 이끌어오나 핑곗거리는 고통을 가져옵니다. 김삼일 가족은 주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오라 하시면 오고, 하라 하시면 함으로써 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에 계속 어둠이 머뭅니까? 하나님 왜 제게 이렇게 시련을 주십니까? 라고 묻지 말고 그대로 수용하십시오. 어차피 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믿는 자에게는 해결책이 보입니다.
막 0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 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자녀가 갖추어야 할 기본이 무엇입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말씀이 이해가 잘 안 돼도 그대로 믿고 따를 때 복이 임합니다. 성경에는 이해가 잘 안 돼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한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애굽과 구스에 대한 심판의 징조를 나타내기 위해 3년 동안 벗은 몸 벗은 발로 다녔습니다(사 20:03). 에스겔 선지자는 왼편으로 390일, 오른편으로 40일을 모로 누어 새우잠 자듯 잤습니다(겔 04:05~06).
왜 선지자들이 이런 삶을 살았습니까?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고 하시면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거룩한 삶이 무엇입니까? 외식하는 자들처럼 겉으로 점잖은 모습을 갖추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까?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진정한 거룩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기를 몸부림치는 삶이 거룩의 중심입니다. 말씀을 떠나지 않으려는 삶이 거룩입니다.
거룩한 믿음은 말씀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룩을 외형에 속하는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거룩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말씀과 찬양을 입에 달고 살면 거룩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기도만 따라가면 거룩한 믿음이 됩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과 환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신령한 것을 거룩이라 합니다.
엡 0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라.
하나님은 세상과 구분되어 살기 원하는 자를 특별히 사용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의 삶과 신령한 삶을 비교하여 구별했습니다. 육체의 삶은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이고, 신령한 삶은 성령님 안에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지구촌 안에는 여러 형태의 민족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형태는 육으로 사는 사람과 영으로 사는 사람 두 종류입니다. 육으로 사는 사람은 종말을 맞을 때 한평생 인생살이가 아침 안개처럼 끝나 버리고 영으로 사는 사람은 종말을 소망으로 맞이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초대교회 시절 베드로가 특별히 남긴 메시지가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고 살라는(벧전 01:16) 메시지입니다. 세상 욕망을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목적은 명예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충성을 위함입니다. 불평을 일삼으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섬기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목적을 마음에 잘 담고 지켜나갈 때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삶을 위해서 우리 모두 믿음의 울타리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 사람과 달리 구별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구별된 삶의 길을 가는 사람을 나실인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자라는 뜻입니다.
현재 교회로 부름을 받아 믿음 생활을 하는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실인입니까? 이 호칭은 신약시대에 와서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정신은 나실인처럼 각오하고 있어도 그런 호칭은 이미 파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는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하였다. 라는 식으로 자녀들 장래 걸림돌 되지 마십시오. 성경은 나실인 서원과는 상관없이 믿음 생활 잘할 것을 강권합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모두가 믿음으로 구별된 삶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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