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2년 말씀

내 속에 천국 소망이 있습니다(벧전 03:13~1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1. 22.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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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인도의 한 시골 날라마람에서 사역한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한 인도 여자가 매 주일 낡고 지저분한 옷을 입고 왔습니다. 선교사님은 적절하지 않은 예배 자세라고 생각하여 몇 번을 망설이다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부인은 매주 왜 이렇게 남루한 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합니까?

그러자 그 부인은 이 옷이 자기의 옷 중에서 제일 좋은 옷이라고 했습니다선교사님은 당신은 그렇게 가난합니까? 라고 묻자 그 부인은 선교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이전에는 돈과 좋은 옷들과 보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의 권력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저의 재산을 다 빼앗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버리면 빼앗은 재산을 다 돌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선교사님은 재산을 다시 찾아 부유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고개를 흔들며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불신자로 사는 것보다 주님 안에서 사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사람은 얼마나 가졌느냐에 따라 행복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생명을 길게 살지 않습니다. 가진 만큼 길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가슴에 어떤 소망을 품고 있느냐? 꿈을 어떻게 펼치느냐에 따라 행복의 질이 결정됩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산 소망을 품고 살아가십니까? 내 속에 어떤 인생 설계도가 있습니까? 잠깐 있다가 사라지고 마는 세상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영원한 복에 속하는 산 소망입니까?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기를 깨끗하게(요일 03:03) 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내 속에 천국 소망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천국 소망을 품은 자는 고난도 잘 극복합니다.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고난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그 누구도 인생의 고난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본서를 기록할 당시 예수님을 믿으면 혹 죽음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말씀대로 살려는 이상 피할 수 없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믿음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무시당하거나 따돌림당하는 일 혹은 핍박당하는 일과 같은 고난을 만나 보았습니까?

고난은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이나 국가에 따라 매를 맞거나 투옥되거나 살해당하는 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지만, 후로는 어떤 고난을 만날지 알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본서를 쓸 당시 유대인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가정과 사회에서 모든 것을 잃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완전 매장인 셈입니다.  또 로마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기의 주님인 황제를 부인하고 스스로 반역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고난이라는 배경이 근저에 깔려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힘으로 제압하고 협박하는 위협을 말합니다.

당시 로마 정부와 지방 정부, 그리고 로마인들과 유대인들까지 합세해서 기독교인을 협박하였습니다. 그 협박이 가정과 가족, 직장과 기업과 삶의 터전, 그리고 안전과 건강과 생명까지 빼앗겠다는 위협입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 복을(마 05:10) 베드로가 인용한 말씀입니다.

 

마 0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복이 있다는 말은(μακαριοι) 베드로가 자신의 서신에서 사용하는 형태(벧전 04:14)입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일에 대한 미래지향의 복입니다. 베드로는 수신자에게 고난을 만날지라도 잘 이겨내십시오. 하늘나라의 상급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힘내십시오. 라는 메시지입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도 주님께 헌신하신 분은 흔들리지 말고 확고하게 서 있으십시오. 근심에 잠기면 안 됩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라고 응원하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팔 복 중 8번째 말씀을 인용하게 된 것은 예수님과 그 말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천국의 소망을 품으라고 안내합니다. 소망을 품고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함부로 해하겠는가? 라고 안내합니다.

 

천국의 소망을 품고 선하게 나아가는 사람은 함부로 해를 받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가 언제입니까? 갈릴리 바닷가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때입니다. 

다음 조업을 위해 그물을 손질할 때입니다. 이후 예수님으로부터 삼 년 훈련을 받고 복음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신 줄 알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난 베드로는 특별한 고백을 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 이 고백으로 베드로는 미래지향의 인물로 거듭납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신임을 받은 일꾼이 됩니다.

 

 

 2. 우리가 가진 소망은 전도자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우리가 천국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험한 세상일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성도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구분된 삶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가끔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휴일만 되면 교회로 가니 인생을 무슨 재미로 사나?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소유한 복 중의 복입니다(벧전 01:03, 21). 예수님을 잘 모르는 사람, 그리스도 밖의 사람(엡 02:12)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동력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받아보았습니까? 거기에 대한 적절한 답은 전도로 연결됩니다.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대답에 대한 단어부터 보겠습니다. 이 단어는(απολογιαν 아폴로기안) 법정 용어로서 공식 변호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행 22:01, 25:16).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목적을 언제든지 답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소망이 넘치고 기쁨이 넘쳐야 누가 물어나 봐 줄 것인데 사는 것이 별로 신통하지 않으니까 물어보지도 않습니까?

 

기쁨을 회복합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성도와 세상 사람과는 삶의 차원이 다릅니다. 구별되어 살아갑니다. 불신자는 신령한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수준으로 묻습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수호 차원에서라도 소망을 분명히 말해 주어야 합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항상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준비는 하고 있는데 누가 물어봐 주지 않으니 답답합니까? 아니면 말을 해 줄 기회가 없습니까? 그러면 답을 가지고 만나러 가십시오.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온유는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나오는 성품을 말하며(딤후 02:24, 25)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02:17). 믿음의 사람이라면 사람의 질문에 대해 변론하는 것처럼 대하지 마십시오. 

자기주장과 감정선을 잘 처리하여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의 삶이 기쁘고 즐겁고 소망이 넘치는 그런 모습이 생활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소위 좀 성공했다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복을 받습니까? 라고 질문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답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기도를 좀 많이 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제가 헌금 생활을 잘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제가 금식기도를 해서 우리 남편 사업이 잘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소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절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나의 체험을 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 소망에 관한 이야기 영원한 생명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라고 권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초자연의 기도와 응답보다 영생과 소망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는 일입니다.

 

 

 3. 천국 소망을 품은 자는 선한 양심으로 불신자를 제압합니다.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말과 행동만을 보지 않고 그 마음의 동기까지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마음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선한 행실과 함께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모습이 선한 양심으로부터 나와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행이 됩니다. 

우리의 소망은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영원한 천국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준비를 위해서는 삶의 목적이 천국을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세상을 살면서 선한 양심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 사람이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하기 위함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선한 양심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삶을 말합니다(24:16). 이런 선한 양심이 복을받는교회 가족의 생명력입니다. 세상 사람과 논쟁을 하고 논리에 맞는 답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 양심이 선하지 못하면 천국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습니다.

 

딤전 0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많은 교회와 많은 성도가 천국 복음 영원한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지 않습니다. 세상 물질을 오히려 주제로 삼습니다. 그만큼 세상에 물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예정 속에 천국 백성 되었음을 확신하고 살아갑니다. 선한 행위와 관계없이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소망을 가진 사람도 얼마든지 비난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 앞에서 우리는 선한 양심을 앞세워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상이 갈수록 악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악한 세상에 대하여 무엇으로 맞서 싸워야 할 것인지를 안내해 줍니다. 사람은 다 자기가 살아온 배경을 바탕으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양심이 선한 양심일 수도 있고 악한 양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이 가질 양심은 내가 생성하는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되고 훈련된 선한 양심이어야 합니다. 이 선한 양심을 따라 천국 소망을 이야기하고 천국 소망을 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많은 선행을 하고도 칭찬은 적게 받습니다. 잘못은 작게 하고도 큰 욕을 먹습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욕을 먹었으면 이제는 욕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욕을 먹어도 선을 행하고 먹어야 합니다. 잘못해서 욕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1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너희의 선한 양심이라 하지 않고 너희의 선행이라 말합니다.

선한 양심에서 자연스럽게 선한 행동이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선한 양심이 있으면 선한 행동은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선한 양심의 판단기준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성령님의 감동입니다. 성령님만이 우리의 무감각해진 양심을 살려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데이 C 셰퍼드의 세 가지 황금 문이란 글을 보면 언어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충고 합니다. 다른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세 개의 좁은 황금 문을 지났으면 말하라.

➊첫째, 그것은 사실인가? ➋둘째, 그것은 필요한 이야기인가? ➌셋째, 그것은 친절한 말인가? 이 세 개의 문을 통과했다면 그 이야기를 해도 좋다. 그러나 통과하지 못한 말이라면 하지 말라.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되면 대부분 사람은 무엇인가 바뀌고 형편이 좋아지리라는 기대를 합니다.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면 큰 기대를 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그런데 냉정히 내다보십시오.

올해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위기의 때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님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오늘 말씀을 17절로 정리합니다. 선을 행하다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났다. 사실 악을 행하고 받는 고난은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악을 행함으로써 고난받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함으로써 고난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일은 악한 세상에서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큰 뜻과 선한 계획이 있어서 우리에게 선을 행함으로 고난 당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허용하실 때는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됩니다. 천국 소망과 천국 복음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 지역에 십자가 불빛을 밝히고 복음 활동 속에서 천국 소망을 전하는 사명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