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2년 말씀

이제는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암 05:04~1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1. 15.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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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 때 왕의 자문관 역할을 한 사람은 거의 선지자입니다. 이 선지자들은 대부분 제사장의 아들이거나 선지자의 아들입니다. 평민보다 지식이 좀 앞선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예언은 상당히 무게감이 있었고 왕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이들보다는 신분이 좀 떨어지는 한 선지자가 있습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의 아들이 아닌 일반 평민 출신 아모스입니다(암 01:01, 07:14). 아모스는 예루살렘 남쪽 약 19km 떨어진 드고아 출신입니다.

이곳은 넓은 들판을 끼고 초목이 잘 조성되어 있어서(대하 20:20, 렘 06:01) 목축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농사와 목축을 하다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동시대에 활동한 이사야, 호세아, 미가와 같은 선지자처럼 선지자 예우를 받는 일에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 왕국 출신임에도 북 왕국 이스라엘의 벧엘로 가서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는 선지자 사역을 하였습니다(암 07:11~13). B.C. 8세기경인 당시 정치 상황은 유다 왕국은 웃시야 왕이 다스렸고 이스라엘 왕국은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북 왕국 멸망(B.C. 721) 약 30년 전입니다.

그런데 아모스의 활동상을 보면 이스라엘에 매우 부담을 주는 예언을 합니다. 대부분 선지자는 자기의 나라를 위해 일했습니다. 거기에 비교해 남 왕국 출신 아모스가 북 왕국 벧엘로 가서 일했으니 이는 완전 하나님의 능력에 이끌린 삶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조금도 보지 않고 선지자 활동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아모스는 아부하는 선지자 사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장차 될 멸망을 바라보며 예언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신변 위험을 무릎 쓰고 선포한 아모스의 메시지를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받으면서 「이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로 정했습니다.

 

 

 1. 아모스가 활동할 때의 정치와 경제 상황을 보겠습니다.

 

0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대의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살았을 것 같습니까? 당시 남 왕국은 웃시야 왕이 다스리던 시대로서 평안했고 북 왕국도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시대로서 평안과 번영을 통해 태평성대를 맞았습니다. 경제면에서 부흥을 누리는 시대였습니다. 경제가 풍요하면 좋은 일입니다.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이 풍요에는 위험한 일이 하나 따라갑니다.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영적 타락의 조건을 가지고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거하는 주민들은 사치하는 일에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경제력이 든든한 만큼 내부로는 죄악과 부패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경제의 번영은 하나님을 잊기 쉽고 사치와 타락은 더욱 하나님을 멀어지게 합니다. 05절을 보십시오. 아모스가 전하는 메시지가 나옵니다.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 나아가지 말라는 선언입니다.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가 어떤 곳이기에 찾지 말라고 합니까? 그곳으로 가지도 말라고 합니까? 벧엘부터 봅시다.

복을받는교회 여러분, 벧엘 하면 무엇이 떠 오릅니까?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챈 탓으로 에서의 복수를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도망하는 중에 만난 일일 것입니다.

야곱이 꿈에 벧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사히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단을 쌓으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➊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➋이 돌기둥으로 하나님의 집을 세우고, ➌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이라 칭했습니다(창 28:19~22).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20년 세월을 정리하고 돌아올 때만 해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고 야곱도 온 가족에게 벧엘로 올라가자고 하였습니다(창 35:01~03). 이후부터 벧엘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지(聖地)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누구나 벧엘에 와서 하나님께 제사 지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가 이 벧엘을 찾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왜 찾지 말라고 전합니까?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의 진정한 의미는 퇴색되어 우상을 섬기는 죄악의 장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는 벧엘 외에 길갈도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길갈이 어떤 곳입니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때 당면 문제가 넘치는 요단강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게 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모두가 안전하게 요단강을 건너게 되자 여호수아는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강을 건너서 첫발 디딘 곳을 길갈이라 하였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물러갔다는 뜻입니다.

이후부터 이곳에서 할례와 유월절 절기를 행하게 되므로 이스라엘의 자연스러운 성지가 되었고 의식도 전통이 되었습니다(수 05:02~10).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길갈의 의미는 퇴색되고 우상을 섬기는 외식의 장소로 전락했습니다. 이에 아모스는 벧엘과 길갈에 이어 브엘세바까지 추가하여 금지 장소로 선포합니다.

 

그런데 벧엘과 길갈에 이어 또 하나의 금지 장소가 나옵니다. 브엘세바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브엘세바도 벧엘이나 길갈처럼 특별 의미가 있는 장소입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제단을 쌓았고(창 21:33), 하나님께서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곳이고(창 26:24, 46:01~02), 사무엘이 자기 두 아들을 사사로 삼은 곳입니다(삼상 08:01~02). 이 전통 있는 브엘세바도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으로 인해 우상을 섬기는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벧엘 길갈 브엘세바 이 세 장소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지처럼 보였지만 실제는 이스라엘이 이곳에서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죄악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2. 이제는 전능하신 여호와를 찾을 때입니다.

 

08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오늘 말씀에는 찾으라는 말이 04절과 06절에 이어 세 번째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를 찾는 길을 진정 하나님을 찾는 길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는 길입니다. 제사가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등지는 길입니다. 멸망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은 잃었음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유다와 이스라엘은 부유와 평안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와 평안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능력 때문에 부와 평안함이 임했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잘 나고 내 능력이 뛰어나서 이렇게 되었다고 여기는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떠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떠나시면 어떻게 됩니까? 진노의 심판이 기다립니다.

이 사실을 안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➊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04). ➋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06). ➌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08).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희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찾는 길 외에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에서 건지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면 멸망을 만납니다.

 

묘성(昴星 כִּימָה 키마)과 삼성(三星 כְּסִיל 케실)을 만드시며. 묘성은 일곱 개의 큰 별을 비롯하여 40개 이상 별자리로 구성되어 있고 삼성은 오리온 별자리를 뜻합니다. 묘성과 삼성이 욥기에도 나란히(욥 09:09, 38:31) 나옵니다. 그 이유는 질서와 조화를 잘 이루는 우주 전체 별자리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묘성과 삼성을 통해 하늘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신다는 말은 시간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는 자연 질서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찾으라는 의미는 하나님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찾아야 합니다. 멸망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바로 선다는 뜻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이 우리를 유혹해도 믿음의 길을 잘 지켜야 합니다.

건강한 믿음을 회복할 때 신령한 감각이 살아납니다. 믿음을 잃고 세상 욕심을 따라가는 무기력한 나를 극복하는 힘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 있습니다.

 

욜 0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바른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른 예배가 무엇입니까? 바른 삶을 드리는 생활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도 하나님을 찾는 길에 서면 살길이 열립니다.

 

 

 3. 이제 사는 길은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14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하시리라.

 

선을(טּוֹב 토브) 구하고. 선이란 이익이 되는 것을 구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익입니까? 하나님은 우상의 터전으로 전락한 소위 3대 성지를 미워하십니다(05).

아모스는 거기서 나와 하나님을 찾으라고 강력한 메시지를 날립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보다 더욱 하나님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제시합니다. 선을 구하라는 제시입니다. 무엇이 선을 구하는 일입니까? 그 답이 21~24절에 나옵니다.

 

21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한다.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않는다. 22 너희의 번제나 소제를 받지 않는다. 기름진 희생 제물의 화목제도 원치 않는다. 23 겉으로는 아름답게 들리는 찬양도 듣지 않겠다. 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의 더 중요한 것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3:23). 이런 것이 없는 형식의 제사를 하나님은 원하지 않습니다.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를 찾지 말라 하신 이유가 그곳에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우상만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곳을 찾아가서 살길을 얻어보겠다는 사람에게는 장차 사로잡히고 비참하게 될 일만 기다립니다. 이스라엘이 외형은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이면에는 극심한 종교의 타락과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심이 팽배해 있습니다.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백성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유다 왕국, 이스라엘 왕국 시대를 돌아보면 나라가 멸망 길로 치달을 때 뚜렷하게 나타난 증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 일입니다.

성문은 당시 사법, 행정, 언론의 중심지로서 선지자는 이곳에서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외침에 백성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고 철저히 외면과 배척을 하였습니다.

 

10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 도다. 11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 즉….

 

아모스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는 자들을 향해 불법을 그치라고 경고합니다. 내가 너희의 많은 허물과 무거운 죄악을 다 안다.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일 하는 것도 다 안다. 불법을 그치라. 아모스의 이름 뜻이 무거운 짐을 진 자입니다. 이름처럼 아모스는 그 시대의 무거운 죄악의 짐을 지고 싸워나갔습니다.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자기 몸을 던졌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지금까지 하나님을 얼마나 찾으며 살아오셨습니까?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 얼마나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했습니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 같은 어려움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까?

 

아니면 계속 한숨만 쉬고 있었습니까? 아니면 전혀 관심을 끄고 지냈습니까? 그러면서도 불평 공장은 가동하였습니까? 지금은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국가의 위정자에게 선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불법은 맞서 싸울 때입니다. 이 정부 정권 말기가 되니 마지막 법안 차별금지법이라는 사탄의 법을 통과하려 꼼수를 벌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발전을 막는 정말 무서운 악법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각색한 주제가 있습니다. 토끼의 짝사랑입니다. 토끼가 거북이를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토끼 혼자만 사랑했기 때문에 거북이는 토끼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 짝사랑 토끼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북이가 자기의 느린 걸음을 너무 자학하는 일입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토끼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루는 토끼가 거북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어서 거북아, 나랑 달리기 한 번 해보지 않을래? 하고 물었습니다.

그날따라 거북이도 투지가 생겨서 질 때 지더라도 토끼와 달리기 경주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 한번 붙어보자며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드디어 경주가 시작되었고 순식간에 토끼는 멀찌감치 앞서갔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뒤따라오는 거북이를 생각하며 포기하면 어떻게 하지? 중간쯤 가서 기다려 주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토끼는 거북이가 자존심 상하지 않는 한 꾀를 내었습니다.

 

일부러 길에 누워서 자는 척을 하는 꾀입니다. 거북이가 가까이 와서 자기를 깨워주고 같이 나란히 언덕으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기대를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토끼를 지나면서도 깨우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자는 척하던 토끼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결국 거북이가 경주에서 이겼습니다.

이 경주가 끝난 후 동물 가족과 후세 사람으로부터 거북이는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칭찬을 들었고, 토끼는 교만하고 경솔하다는 욕을 들어야 했습니다. 토끼는 몰래 눈물 흘리며 모든 비난을 감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거북이의 기쁨이 자기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각색한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교회를 사랑하시지요. 토끼와 같은 짝사랑의 마음을 가져봅시다. 토끼와 같이 누군가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고, 누군가의 위로를 위해서 비난을 감수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봅시다.

선지자 아모스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도 큰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을까요? 공명심으로 인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을 잃은 것은 아닙니까? 정치지도자들도 국민이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바른 정치를 하라는 요구 완전 무시입니다. 그래서 더러는 교회가 썩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기뻐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 시대와 꼭 닮은 사회 현상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