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1년 말씀

구원을 등한히 하면 떠내려갑니다(히 02:01~0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1. 6. 1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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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특별한 성경입니다.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변증서이며 신약의 레위기로 불리기 때문입니다. 13장으로 구성된 그 핵심 내용은 구약의 율법이나 제사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에 방점을 찍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늘의 영원한 대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단어가 대제사장인데 본서에 무려 16회나 나옵니다(02:17, 13:11). 본서를 기록한 특별 목적이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해 온 성도들이 유대인의 위협과 핍박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바로 이들에게 흔들리지 말라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로 기록되었습니다. 유대교의 모세보다 기독교의 예수님이 더 우월하다. 정죄하는 율법에 비해 복음은 생명을 구원하는 길이다. 어느 것을 택할 것이냐? 이런 안내입니다.

 

안내의 내용은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말씀으로부터 표류하지 말라(02:01~04). 둘째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03:07~04:13). 셋째 말씀에 게으르지 말라(05:11~06:20). 넷째 말씀을 멸시하지 말라(10:26~39). 다섯째 말씀에 반항하지 말라(12:14~29). 이 다섯 가지 내용을 다시 압축하면 탁월하신 예수 그리스도,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님이란 뜻입니다.

오늘 말씀은 5대 메시지 가운데 첫째 메시지 말씀으로부터 표류하면 안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구원을 등한히 하면 떠내려갑니다」로 정했습니다. 은혜의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모두가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시대입니다.

 

0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히브리서를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불신자가 아니라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입니다. 01절을 잘 보십시오. 들었다는(ἀκούω 아쿠오) 말이 나옵니다. 무엇을 들었다는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 계시 복음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각종 제사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이어지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는 부분도 잘 보십시오. 들은 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들었으면 그 들은 것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들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듣고 배운 성경 진리는 믿음으로 진지하게 받아야 합니다.

 

본서가 기록될 당시 기독교는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성도를 계속 흔들기 위해 온갖 계략과 핍박을 동원하였습니다. 당시 사회 환경을 보면 로마의 5대 황제 네로가[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37.12.15~68.6.9] 기독교를 무지막지하게 박해하는 때였습니다.

일부는 흔들려 다시 유대교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은 위험하다는 공감대까지 형성되었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굳건하게 붙잡지 않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여러 환경으로 인해 일부 성도들은 믿음을 포기할까? 말까? 라는 회의감에 빠졌습니다. 구원을 등한히 여겼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다는 부분을 보십시오. 꼭 우리 사회를 향한 메시지처럼 보입니다. 현재 우리를 담고 있는 사회는 어떻습니까? 건강합니까?

구석구석 전반이 첨단 문화의 병으로 신음합니다. 부정과 불법을 무관심하게 여기는 사회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환경에 많은 성도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믿음 생활 오래 하였다고 자부심을 가진 사람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구원의 도를 매우 가볍게 여깁니다. 생명의 복음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예배의 자리에 나옵니다. 은혜와 감격의 예배가 아니라 형식으로만 참여합니다. 그것도 주일 오전 한 번만 말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배 참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립니다(요 04:24).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감격과 기쁨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자신을 믿음의 제물로 드립니다.

 

오늘 말씀 02장을 시작하는 첫 부분이 무엇입니까? 접속 부사 그러므로입니다. 앞의 내용이 뒤에 나오는 내용의 이유나 근거가 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02장에 연결된 히 01장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에게 집중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요 14:06).

예수님에 관하여 무관심한 것은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무관심한 일을 멸망의 길이라고 경고합니다.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은 복음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에 참석도 하고 설교도 듣고 찬송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믿음으로 지키지 않고 세상의 것과 바꾸고 말았다는 의미입니다.

 

 

 2.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떠내려갑니다.

 

0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구원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롬 03:10, 23). 많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걱정 없다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 진리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01절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는 권면입니다. 이어지는 말씀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다는 말씀도 눈여겨보십시오.

 

떠내려가지(παραῤῥυέω 파라레오) 않도록. 중요한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금이 간 물항아리에서 물이 새어 나간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구원을 관리하지 못해서 그만 흘러 떠내려 보내는 것과 같을까 걱정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구원을 아울렛 매장에서 쉽게 물건 구하는 것처럼 여깁니다.  

만일 많은 돈을 들여 구원을 샀다면 등한히 여기겠습니까?  우리가 생명의 구원을 돈을 들여서 살 수 있습니까? 살 수 없습니다. 혹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 구원을 살 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없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이론으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구원의 길이 믿음이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 구절도 잘 암송합니다.

 

엡 02:0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생각해 봅시다. 내가 만든 믿음으로 구원받아도 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만 구원이 이루어지게 합니까? 예,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면 겸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생성해 내는 성화 과정의 믿음은 언제든지 흔들리고 변질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가 잃었다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구원입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만일 등한히 여기는 자는 영혼이 떠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심령이 죽은 자는 떠내려갑니다. 어디까지 떠내려갑니까? 지옥까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믿음 생활은 영혼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죄악에서 헤엄쳐 나오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몸부림치며 잘 관리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믿음 죽은 믿음 구분 점이 무엇입니까?

물살이 가파른 강의 물고기와 같습니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그슬러 올라가고 죽은 고기는 물살에 떠내려갑니다.  우리의 믿음도 같습니다. 세상의 물살이 얼마나 거센지 모릅니다. 믿음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 떠내려갑니다. 병든 믿음도 역시 지옥의 강으로 떠내려갑니다.

 

 

 3. 구원을 등한히 하면 그에 대한 보응이 있습니다.

 

0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어찌 그 보응을. 보응(報應)이 무엇입니까? 악한 일에 대하여 그 원인과 결과를 따라 대갚음 받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보응은 믿음을 상실하고 표류하는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합니다. 심판의 대상에는 무늬만 성도일 뿐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가룟 유다 같은 사람도 들어 있습니다.

믿음의 감각 없이 예배당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들어 있습니다. 구원을 등한히 하면 바로 저주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심판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심판을 도무지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무시하면 심판이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왜 큰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합니까?

구원이면 구원이지 다른 특별한 구원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습니다. 큰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주신 율법의 구원 사역과 비교하여 큰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구제의 방법도 없습니다.

 

01절의 흘러 떠내려간다는 말에서 표류하는 배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소망의 항구로 나아가는 반대편 용어입니다. 성도는 소망의 항구를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닻을 가지고 있습니다(히 06:19).  이 닻이 복중의 복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그분이 이루신 십자가의 죽음도 압니다.

만일 예수님이 누구인가? 대속의 죽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항로를 잃고 표류하는 배와 같습니다. 표류하는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입니까? 멸망의 세계입니다. 영원한 지옥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 세밀한 자기진단이 필요합니다. 내 영혼이 믿음의 자리를 이탈하여 표류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진단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까?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믿음 감각이 완전 무디어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십시오. 세상의 것에 너무 집착하여 주위 사람으로부터 혹 근심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닌지 자신을 냉정하게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 할 때 그 구원에는 영혼의 성숙과 성장이 들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성장과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았다고 말을 하면서도 신령한 일에 변화가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마치 아기가 자라는 것처럼 자랍니다. 자라는 것이 구원의 증거입니다. 구원은 창세 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일입니다(엡 01:04). 그 예정 속에 우리가 교회로 부름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합당한 믿음의 행적이 나타나야 합니다. 현재 우리는 믿음 관리를 어떻게 합니까? 영혼의 성장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전혀 자라지 않습니까? 혹 흘러 떠내려가고 있습니까? 그러고도 나는 구원을 받은 천국 백성이라고 말합니까? 구원은 말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삶에서 구원의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구원은 계속 성화 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이론에 불과한 값싼 구원일 것입니다.

 

빌 0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한 젊은이가 논산훈련소에서 늦은 밤 PX의 빵을 훔쳐먹다가 시찰 나온 사단장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사단장이 화가 나서 어떻게 군인이 빵을 훔쳐먹을 수 있냐며 질책합니다. 훈련병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영창에 들어갈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훈련병이 사단장에게 물었습니다. 사단장님, 저를 아십니까? 사단장이 알 턱이 있습니까? 훈련병이 하나둘 아닌데 말입니다. 내가 자네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 말을 들은 훈련병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쳤다고 안 잡히겠습니까? 누가 지어낸 이야기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피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매 주일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까? 무기력한 믿음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무디어진 신앙 감각을 계속 품고 있으면 세상 물결에 떠내려갈 수 있습니다. 허물과 실수를 계속 안고 있으면 그 허물이 내 스타일로 자리 잡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앞날을 바꾸어 주시는 분입니다.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으로부터 잘 쓰임 받도록 무디어진 심령을 깨뜨립시다. 믿음의 초점을 주님께 맞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익숙하고 편안한 안전지대를 만들려 합니다. 자신의 안전지대를 굳게 지키려 합니다. 그 안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안전지대에 거하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게으름과 나태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최선의 노력과 모험을 안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안일함에 빠져 버리면 믿음의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점점 형식의 신자로 추락합니다.  김삼일 가족은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을까 돌아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게으름을 몸을 쳐서라도 깨뜨려야 합니다. 나태함도 깨뜨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