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을 여는 첫 메시지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문장을 보시면 다시[副詞]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다시라는 말은 어떤 일에 대해 되풀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본문 앞장 21장에서 예수님은 오늘 말씀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는 뜻이 됩니다. 오늘 말씀 주제가 어디서 시작됩니까? 임금의 아들 결혼식장입니다(02). 임금의 아들이 결혼하는 곳에는 왕족, 귀족, 고위 관료, 외국에서 오는 사절 정도는 되어야 들어갑니다. 그래서 오늘 주제 말씀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밝힙니다. 본문을 기록한 목적이 천국을 안내하기 위함입니다(02).
혼인 잔치인 만큼 현장에는 손님이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초청을 무례하게 거부하는 사람들 모습입니다. 이들은 두 번에 걸쳐 임금의 초청을 거부합니다. 처음 초청을 받았을 때 이미 싫다고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두 번째 초청받았을 때는 완강하게 안 가게ㅅ다고 반대 의사를 밝힙니다. 05, 06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자기를 데리러 온 종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농사일 핑계로 밭으로 나갑니다.
또 한 사람은 사업이 너무 바빠서 그 현장을 떠납니다. 이보다 더 심한 반응은 남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종들을 능욕하고 죽여버립니다. 초청을 거부하면 그만이지 이렇게까지 해서야 됩니까?
이에 마음이 몹시도 상한 임금은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1차로 초청한 사람들이 거절하자 큰길로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 와 빈 자리를 채우라는 명령입니다. 임금의 명령을 따라 종들은 큰길로 가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임금의 아들 혼인 예식인 만큼 특별 예복을 나누어 주면서 들어올 때 입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습니다.
이 일에 화가 난 임금이 그 사람을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매우 슬픈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1. 예복을 꼭 입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사람은 옷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왕은 왕복을 입고, 제사장은 제사장의 옷을 입습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고 법관은 법복을 입습니다. 신분에 걸맞게 옷을 입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옷은 여러 상황과 환경을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성경은 옷을 통해서 중요한 진리를 전합니다.
성경에서 사람이 옷을 단정히 입는 것은 건강한 믿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옷을 벗은 것은 자기의 몸을 드러내었다는 강한 의미를 전합니다. 영국 속담에 깨끗한 의복은 좋은 소개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사의 나라로 불리는 영국인은 예복을 입지 않고는 고급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예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왕이 초청한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고 들어온 사람들과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복을 입은 것은 교양과 인격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품위를 높이고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정성으로 차려입은 예복은 주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02…. 혼인 잔치(γαμους 가무스). 원문에는 이 혼인 잔치가 복수로 나옵니다. 여러 날 계속되는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평균 밤낮 7일 정도 합니다. 신분과 잔치 여건에 따라 그 이상으로 하는 때도 있습니다.
임금은 아들 혼인 잔치에 초청을 거부한 사람들 자리만큼 서민 중에서 긴급하게 초청하고 예복도 동시에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복을 받고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왔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를 거부한 사람부터 다시 돌아보겠습니다. 세 부류의 사람이 왜 임금의 초청을 거부하였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의 태도로 보아 임금을 매우 무시하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임금의 초청에 우리가 안 간다고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안일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임금에 대하여 불순종하였음을 엿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0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임금이 노하여…. 불사르고. 임금의 간곡한 초청을 거절한 자들에게 임금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임금에 대한 모욕과 반역으로 보아도 됩니다. 이에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 초청장을 전한 종들을 죽인 자와 그 동네를 멸망시켰습니다.
한편 이렇게 귀한 초청을 거부한 사람을 대신해서 혼인 잔치에 들어온 사람을 봅시다. 일반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귀한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자기들이 요청해서 들어간 자리가 아닙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자리입니다. 이런 자리에 들어가는 초청장 아무나 받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 혼인 잔치에 들어간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습니다. 복이 없어서 안 입고 왔습니까? 아닙니다. 예복을 사전에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예복을 입지 않고 중요한 잔치에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은 아마 급하게 잔치에 참여하느라 예복을 입지 않은 것 같습니다.
2. 예복이 없으면 혼인 잔치에서 쫓겨납니다. |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1절을 보십시오.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 내빈을 만나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묻습니다.
12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물음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한마디도 변명 못 합니다(有口無言). 당연히 입어야 하는 자리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거나 입으면 안 됩니까? 굳이 따져야 합니까? 라는 변명이 안 통할 것을 알기 때문에 말 못 합니다.
그래도 잔치의 무게감을 볼 때 예복을 입지 않았으니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못 됩니다. 핑계가 안 통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가볍게 여긴 자체가 무례한 일이며 쫓겨나고도 남을 일입니다.
이에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좀 야박하게 느껴지는 말로 들립니까? 그까짓 예복 때문에 잔치 현장에서 내쫓는 일 너무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용히 나가도록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사환들에게 살짝 눈짓만 해도 되는 일인데 임금이 대놓고 결박해서 쫓아내라는 말을 해야 합니까? 맞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결박해서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는 말은 한국인의 정서로는 좀 맞지 않습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김삼일 가족 여러분, 많이 들어본 말씀 아닙니까? 마태복음에 3번 누가복음에 1번 나옵니다. 기억이 잘 안 납니까?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쫓겨난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마 24:51….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눅 13:28…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잔치의 무게감을 볼 때 예복을 입지 않았으니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못 됩니다. 핑계하면 안 됩니다. 그 자리를 가볍게 여긴 일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쫓겨나고도 남을 일을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진리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02절을 보시면 오늘 말씀은 천국에 대한 비유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임금의 초대 장소는 천국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거기에서 쫓겨난 곳은 지옥을 비유합니다. 그리고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믿음으로 세워지기 위해서 의의 옷, 진리의 옷을 입으라고 권합니다(엡 04:24).
엡 0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여러분은 믿음의 예복이 잘 준비되어 있습니까? 거룩한 의의 옷을 입고 잔치 자리에 나아왔습니까? 그 자리에 초청받은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의의 옷 예복이 벗겨지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잔치의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일은 더욱 없어야 합니다. 믿음의 자리 잃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자리에 합당한 옷을 입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3. 청함을 받은 자는 많고 택함을 입은 자는 적습니다. |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14절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청함을 받은 사람과 택함을 입은 사람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오늘 비유 내용도 잘 보십시오.
임금이 혼인 잔치를 거부한 자들을 대신해서 길거리에 나가 누구든지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혼인 잔치에 참여할 자의 신분 파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자체의 의미보다 신령한 상징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여기 청함을 받은 자는 누구이며 택함을 입은 자는 누구입니까?
청함을(κλητοι) 받은 자.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이니 이런 행사에는 지도자급에 속하는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주로 초청받습니다(막 06:21). 청함을 받은 자는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를 통해서 여러 지도자와 교분을 나누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청함을 받은 것으로 끝나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청함을 받은 사람은 구원의 자리에 들어오지 못한 외적 부름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라고 정의합니다(마 07:21).
택함을(εκλεκτοι) 입은 자. 택함을 입은 자는 왕의 아들 혼인 잔치뿐만 아니라 구원의 자리에까지 이르는 자입니다. 임금이 나누어 주는 예복만 입으면 가능합니다.
택함을 입은 자는 모두가 예복을 입고 있습니다. 이 예복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자만이 입습니다. 예수님은 이 옷을 입는 자의 자격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하십니다(마 07:21).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청함을 받아 교회에 나온 사람은 많지만, 그 가운데 택함을 입은 사람은 아주 적다는 사실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고 그들로 인해 잔칫집 손님이 가득 찼습니다.
이와같이 오늘날에도 교회는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은 분명히 적습니다.
오늘 복된 이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돌아가신 줄 믿습니까?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셨습니까? 믿어집니까?
그러면 택함을 입은 사람입니다. 택함을 입은 사람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이 우리의 현실에서 잘 나타나야 합니다. 무늬만 성도이어서는 안 됩니다.
마 0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약 2천 년 전에 기록된 마태복음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도 누가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인가? 누가 택함을 입은 사람인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인이 전자에 속하고 기독교인이 후자에 속합니다. 당시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대상을 보면 청함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 장로, 바리새인, 율법 학자, 사두개인 등 소위 교권자들입니다. 그들은 임금의 잔치에 초청받고도 온갖 핑계로 초청을 거부하였습니다.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종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택한 백성이라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들을 배격했습니다. 그런 전통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스라엘 역사를 상징합니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이 비유는 남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비유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고 택함을 입은 사람은 적다는 말에 두려운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구약시대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중보자 역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입니다. 이 제사장은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끊어진 두 지점을, 반드시 연결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집행하는 거룩한 삶에 있습니다. 이제 주님을 영접한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벧전 02:09).
그러면 제사장 된 우리는 누구와 누구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합니까?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자를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역할입니다. 이 일에 우리의 에너지를 기울여야 합니다.
눅 14:15~24절을 보면 비유가 나옵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상황을 보아 전체 흐름은 마태복음과 같지만 몇 가지 차이점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잔치를 벌인 사람은 임금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입니다.
사람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벌인 것을 보니 경제가 넉넉해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잔치가 열리자 초대받은 사람 모두가 거절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새로 산 밭을 보러 가겠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소 열 마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겠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나는 장가들었느니 좀 바빠서 초대에 응할 수 없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이들의 태도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사람들과 달리 정중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초대받은 사람 일부가 자기들을 데리러 온 종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고 예복 이야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전개 방식이 부분으로는 다르지만, 근본 주제를 다루는 면은 일치합니다. 잔치에 처음 초청받은 사람은 택함을 입지 못했고 처음 초청은 받지 못했지만, 나중 초청을 받아서 결국 택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교인을 이렇게 분류한다고 합니다. 감투 교인. 감투를 안 주면 교회에 안 나오는 교인, 핑계 교인. 이렇게 저렇게 항상 핑계하며 교회 모임에 잘 빠지는 교인, 시험 채점관 교인. 설교를 비평하고 남의 흠을 잡는 데 명수인 교인, 유람선 교인. 이 교회 저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교인, 묵상 교인. 예배를 시작하면 졸기 시작하는 교인
이런 형태의 교인은 청함을 받은 사람은 되겠지만 택함을 입은 사람은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교인에 속하는지 자신을 잘 살펴보십시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교회 밖에서 머무는 사람 데려오는 일에 수고하십시오. 교회 안에서 청함으로 끝날 사람을 주님의 택함을 입는 사람으로 인도하는 자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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