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 워런[미 Rick Warren, 1954.1.28.] 목사가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첫 페이지에 의미 있는 삶을 위한 목적 선언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시기 전부터 우리를 마음에 품으시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계획하셨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줍니다. 동시에 나는 왜 세상에 존재하는가 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생의 항해를 시작합니다. 나고 자라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망망대해 같은 삶을 엮어갑니다. 그러나 오대양 육대주를 가로지르며 다니는 배도 항상 항해만 하지 않습니다.
가끔은 항구에 돌아와서 점검하며 다시 항해할 수 있도록 각종 식료품과 기름을 채웁니다. 사람도 계속 일만 해서는 안 됩니다. 가끔은 쉼터에서 휴식하며 인생 지도를 놓고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의미 있는 삶의 항해가 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건강한 삶이 무엇입니까?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기에 대한 답은 각자 신앙 체험을 바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도와 함께 지중해 연안 그레데 섬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날 때 디도를 두고 떠나 왔습니다.
이후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에 거하면서 디도에게 교회의 일꾼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성도의 신앙 훈련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편지로 안내하였습니다. 그 편지가 디도서입니다. 이 디도서를 통해서 오늘 말씀 제목을 바울이 디도에게 전하는 성도의 양육원리를 따라 「은혜와 양육으로 단장하십시오」로 정했습니다.
1.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구원을(σωτηριος) 주시는. 구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테리오스는(σωτηριος)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혹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보편성 때문입니다. 11절을 액면 그대로 보면 분명 오해가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문구 때문입니다.
더러는 이 구절을 만민구원설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정말 근거가 된다고 봅니까? 되지 못합니다. 이 말씀의 기본 원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사람은 누구를 지칭하는 말입니까? 역사 속의 모든 인류입니까?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모든 사람을 교회에 소속된 각 계층의 모든 사람으로 설명합니다. 불신자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믿는 모든 자라는 뜻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호의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救贖)을 의미합니다(롬 03:24).
디도가 목회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길 주제가 이 은혜입니다. 교회에서 설교할 때 가장 강조해야 할 부분이 이 은혜입니다. 바울이 디도서를 기록한 목적도 이 은혜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반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이 진리는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를 통해 로마교회에 전달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에 편지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를 최고로 강조하였습니다. 엡 02:08, 09절 같이 읽읍시다.
엡 02:0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0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성경에서 하나님 은혜라 할 때 본래 의미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허리를 구부려 호의를 베푼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고 할 때의 의미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代價)를 받지 않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대가 없이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시고, 우리의 삶을 영생의 삶으로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은혜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특별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긍휼(矜恤)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일반으로 해석하면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긍휼이란 의미는 구원의 은혜를 말합니다.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내는 긍휼입니다(시 51:01; 사 33:02; 단 09:18). 하나님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성품을 표현하는(시 25:06) 단어입니다.
이 긍휼이 가장 완전하게 나타난 사건이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당하신 사건입니다(엡 02:04; 벧전 01:03). 디도서 03:05 절에 이 은혜의 중요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딛 03:0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03:05 절을 우리가 같이 읽었습니다. 잘 보십시오. 은혜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고 대신 같은 개념을 가진 긍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사랑이고 긍휼은 죄로 인해 죽을 자를 불쌍히 여겨 은혜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긍휼과 은혜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2. 구원받은 성도는 믿음의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 되었습니다.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디도서가 전하는 은혜와 긍휼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본서의 중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그 은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전합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신앙 원리를 배울 것을 전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은혜를 받았다 하면 어떤 신비한 일을 체험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삼일 가족의 믿음 생활 테두리에서 은혜라는 개념은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은혜는 바로 구원받은 은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은혜입니다. 오늘, 예배에 오신 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셨습니까? 건강한 믿음도 가졌습니까? 그러면 이 물음에 대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아멘입니까?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2절을 시작하는 우리를 양육하시되(παιδευουσα 파이듀오사) 라는 부분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믿음의 훈련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도 영화의 나라에 들어가는 날까지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 양육은 믿음이 성숙하고 성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엡 0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세상 정욕(ἐπιθυμίας)을 다 버리고. 정욕이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세상의 쾌락과 악독과 다툼 소유욕 등을 말합니다(03:03; 요일 02:16).
기독교 윤리는 세상과 분리된 환경에서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훈련하는 실천 도장(道場)과 같습니다. 세상 정욕을 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12절 마지막 부분인 이 세상에 살고. 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여 양육하시는 현장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일상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받드는 신앙생활 원리를 경건하게 유지하여야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양육과 보호가 필요합니다. 만일 미숙아로 태어났으면 인큐베이터 안에서 보호받으며 자라다 때가 되어 어머니에게 인계됩니다. 그럴수록 어머니는 지극한 정성으로 아이를 양육합니다. 만일 시간이 지나도 아이가 정상으로 자라지 못해 장애인 수준에 머물면 어머니는 온갖 근심에 싸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원리도 신령한 출생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이고 마귀의 따뜻한 보호를 받으면 마귀의 앞잡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음을 믿습니까? 그럴지라도 미숙아처럼 믿음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근심 대상이 됩니다. 속히 그 자리를 탈출하여야 복된 길이 열립니다.
엡 0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 양육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합니다. |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복스러운(μακάριαν) 소망과(ελπιδα). 우리 믿음의 가족에게 복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일단 사업이 한 방 터지는 일입니까? 그리하여 큰집으로 이사도 하고, 집안 식구들 챙겨주고, 교회에 헌금도 많이 드리고, 세상 떠나는 그 날까지 건강하게 사는 일입니다. 그리하고도 물질의 여분이 있으면 목사의 차도 한 대 사주겠지요?
이런 소망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여러분 이런 복 받기를 바랍니다. 사실 세상에 떠도는 복은 개인의 역량과 믿음에 따라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비중을 잘 두지 않는 복을 안내합니다. 어떤 복입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소망하는 복입니다. 예수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소망이야말로 복 중의 복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삶의 가치관입니다. 바울은 이런 소망을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라고 안내합니다(골 01:05).
신약성경이 형성되어 가던 시절에는 대부분 성도가 재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천사들이 이 소망을 선포하였습니다.
행 01:10…. 흰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그 방법까지도 자세하게 안내하는 말씀입니다. 이 재림의 약속은 제자들이 복음 전하는 일에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천국 들어갈 준비를 잘하였습니까?
아니면 준비하는 중입니까?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는 잘 되어있습니까? 이 역시 아직 안 되어있습니까? 시간은 나에게 계속 머물러 주지 않습니다. 시간이 나를 떠나는 게 아니라 내가 시간을 떠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에 바빠 죽겠다고 더러 말합니다. 사실 자기만 바쁩니까? 이런저런 이유를 내놓으면 안 바쁜 사람 어디 있습니까? 김삼일 가족 여러분, 말씀 듣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다시 오실 주님 만날 기대감으로 믿음 생활하십시오. 재림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의심은 안 하겠는데 아직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까?
아니면 세상일에 너무 쫓겨 예수님 맞을 준비 전혀 할 여유가 없습니까? 아니면 나는 당일치기에 강하니 마지막 그때 가서 속히 맞을 준비 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전에는 조금 준비했는데 지금은 안식년(?)에 들었습니까? 김삼일 가족 여러분, 지금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준비를 안 해도 혹 당장은 별일 없이 지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기 몫입니다. 재림의 주님을 소망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오직 믿음만은 앞세우고 나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내가 균형 잡힌 믿음을 잘 유지하여야 합니다. 제대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믿음의 잠을 자다가 그만 믿음이 형편없이 다운되면 마귀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구, 조금만 더 있다가 해도 돼, 너무 서두르지 마, 나하고 친구 하자구, 하면서 다정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런 자가 마지막 심판 때 탄식하며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계 06: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B.C. 5세기 중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B.C. 405~323)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학자가 가끔 대낮에 등불을 켜 들고 아테네 거리를 다녔습니다.
하루는 사람들이 선생님, 왜 대낮에 등불을 켜고 다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이 사뭇 진지했습니다. 캄캄한 세상에 혹시 사람다운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서야.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디오게네스처럼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을 찾고 있구나. 맞습니다. 오늘 대낮에도 등불을 켜고 예수쟁이를 찾으러 다니십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08)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그렇습니다.
진정한 풍요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김삼일 가족은 하나님을 보물의 근원으로 알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 생활이 더욱 힘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이런 권면을 하였습니다.
벧전 02:01, 02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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