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0년 말씀

지나친 물욕은 파멸입니다(딤전 06:09~10).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0. 10. 3.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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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건국자요 초대[3대] 수상을 지낸 벤 구리온 인물이 있었습니다[David Ben Gurion 1886.10.16.~1973.12.1.]. 폴란드 출신 정치인입니다. 이스라엘의 건국을 도우며 두 번 총리를 역임하였는데 이분이 수상직을 마치는 날 기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차를 네게브 사막으로 몰아라.

네게브는 남방지역 불모지 수준의 땅을 말합니다. 벤구리온이 네게브 지역 키부츠 스데 보케르(Sde Boker)에 도착해서 외친 말이 유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앞으로 희망은 사막 개척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이 사막을 개척하여 이스라엘에 쓸모 있는 땅을 한 평이라도 늘리겠습니다. 나는 이 광야에서 우리의 창조능력과 개척정신의 유무를 테스트받겠습니다. 얼마나 좋은 생각입니까? 그의 나이 77세 때의 일입니다.

 

키부츠에서 그에게 4평짜리 방 하나를 제공하였습니다. 벤구리온이 87세에 숨을 거둘 때까지 10년간 사막을 농토로 개간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남은 것은 옷 한 벌과 신발 한 켤레 밀밭으로 개간한 작은 토지가 전부였습니다. 물욕을 비우고 살았기에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를 존경하여 텔아비브에서 15km 정도 떨어진 로드[Lod] 국제공항 이름을 벤구리온[Ben Gurion International Airport]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물욕을 비움으로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하였고 사람에게는 본보기가 된 인물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 서두에서 이 벤구리온에 대해 말씀드린 것은 물욕을 비웠기에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었음을 전하려 함입니다.

반면 오늘 말씀은 물욕을 내려놓지 못한 길 마지막에 오는 결과가 어떠한지를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지나친 물욕은 파멸입니다.」 정했습니다.

 

 

 1. 지나친 물욕은 파멸에 이릅니다.

 

0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부하려 하는[βουλομενοι]. 의도하다, 갈망하다, 결정하다. 의 뜻으로서 부자가 한 번 되어야겠다는 지나친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시험[πειρασμον]과 올무[παγιδα]. 시험은 유혹을 의미하며 올무는 덫이나 함정을 뜻합니다. 이렇게 시험과 올무에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재물에 대한 지나친 욕구는 영혼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됩니다. 여기까지 이르면 어떻게 됩니까? 09절 마지막을 보시면 됩니다.

멸망에 빠지게(βυθὶ ζουσιν). 배가 바다 깊은 곳으로 침몰하는 상태의 묘사입니다. 지나친 물욕은 건전한 분별력을 무너뜨립니다. 다음으로 마귀의 올무에 걸려듭니다(딤후 02:26). 이후의 결과는 쉽게 예측됩니다. 파멸과 혼돈입니다. 마귀가 설치한 이 파멸의 덫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걸려들었습니까?

 

본서의 기록자 사도 바울은 물질에 대한 욕구 자체를 죄악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바울 자신도 금욕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Hendriksen). 그러면 물질에 대한 바울의 의중 즉 물질관에 대한 견해가 어떠합니까? 먼저 파멸(개역판 沈淪)과 멸망 이 두 단어를 보십시오. 파멸[ολεθρον]과 멸망[απωλειαν]은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파멸 멸망 이 중 한 단어만 사용해도 충분히 뜻이 통합니다. 그런데도 굳이 같은 뜻의 단어를 중복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나치게 물질에 집착하면 멸망을 만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물질에 대한 과한 욕심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가득 차 있으면 발생합니다. 내 속에 세상의 쓰레기가 가득 담겨 있으면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천국은 마음을 비운 자 곧 심령이 가난한 자가 얻게 되는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05:03, 08).

김삼일 가족 여러분, 아무리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그릇이 있습니다. 어떤 그릇일 것 같습니까? 걸인의 동냥 그릇입니다. 이 그릇은 아무리 부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그릇이 하나가 또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 그릇입니다.

사람은 더 가지고 싶고, 더 채우고 싶은 불만족의 그릇을 안고 살아갑니다. 성경은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파멸을 만난 사람을 곳곳에서 소개합니다. 그 대표 인물이 발람과 유다입니다.

 

행 01: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25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벧후 02:15 그들이 바른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 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물욕은 갈증을 느낄 때 짠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물욕이 마음에 자리 잡으면 세상 어떤 것을 소유해도 불만족입니다. 물욕은 마음의 병이기 때문입니다. 돈은 일상생활의 매개체로서 사람의 품위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물질을 지나치게 주목하면 불행의 길로 치닫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한편으론 제일 미련한 것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사람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몸에 필요한 만큼 받아드립니다. 혹 섭취하였을지라도 그것이 불필요하면 이내 배설해버립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불필요한 것은 몸속에서 독이 되어 생명을 단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런 적절한 조정이 잘 안 됩니다. 결과는 생명 단축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09절에서 밝힙니다

 

 

 2. 지나친 물욕은 악의 뿌리가 됩니다.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 자체는 악한 요소가 아닙니다. 선도 악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탐욕을 품을 때 그곳에서 악이 발생할 뿐입니다. 우리가 평소 돈을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가끔 합니다. 사람이 인격이 고매하여 그 재물을 잘 관리하면 돈은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

사실 돈으로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많이 할 수 있습니까? 믿음 없이 돈으로만 무엇을 하려고 할 때 문제가 일어날 뿐입니다. 건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면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바울은 돈 자체를 일만 악의 뿌리라 하지 않습니다. 돈을 사랑하는(φιλαρ γυρια) 그 마음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일로 발생하는 극단의 불행을 미리 일러주는 말입니다. 끝없는 욕심을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돈에 대해 얼마나 집착하면 바울이 돈을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였겠습니까? 또 돈을 사랑하면 어떤 문제가 일어납니까? 돈에 대해 집착이 탐욕으로 바뀌면 그때부터 그 탐욕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똬리를 틀게 됩니다.

결과론으로 돈을 사랑하면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우리에게 돈은 필요합니다. 다만 돈을 사랑하는 그 집착이 탐심으로 바뀌면 그때는 멸망입니다. 행복은 욕망을 채우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는 데서 옵니다.

마음을 조금만 낮추어도 삶의 행복은 높아집니다. 자족하지 못하면 현실 불만족이 생깁니다. 불만족의 노예가 됩니다. 감사가 우리 입에서 사라집니다. 마음에 욕심이 자리를 잡은 것도 자족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자족하는 마음을 품을 때입니다.

 

마 0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1세기 철학자 세네카(Seneca, Lucius Annaeus B.C.4~A.D.65)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돈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부자로 만들어주지 못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도 자기의 부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환경에 적응하고 때로는 그 환경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령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족한 환경에도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돈을 잃었습니까? 큰 것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친구를 잃었습니까? 더 큰 것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믿음을 잃었습니까?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믿음을 사랑하고 지켜야 합니다. 이 세상에 믿음을 지키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히 13:0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나는 돈을 정말 사랑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 분 있습니까? 예 그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대단히 귀한 말을 한 것입니다. 대단히 복된 말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이런 고백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부터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귀한 예배를 돈으로 바꾸지는 않습니까? 돈 때문에 일 때문에 교회 일에 등한히 하는 것은 아닙니까? 성경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졌을지라도 그 속에 들어 있는 진리가 삶에 적용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3. 지나친 물욕은 자기 눈을 찌르는 일입니다.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것을 탐내는(ορεγομενοι) 자들은. 항상 돈을 갈망하는 사람, 사모하는 사람은 믿음의 초점을 맞추지 못합니다. 신앙을 잃고 방황합니다. 돈이 꼭 필요함에도 가지지 못하여 고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으로 인한 어떤 환경을 만나도 돈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돈을 잘 관리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돈은 우리의 삶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만일 탐욕을 이기지 못하면 불행의 길이 열립니다. 다음 문구를 보십시오.

 

미혹(πλανάω)을 받아. 미혹이란 길을 잃게 하는 행위입니다. 길을 잃으면 별이 일정한 궤도에서 이탈하여 떠도는 것처럼 방황의 길에 들어섭니다. 사람의 지난 흔적은 어떤 모습으로든지 열매가 맺어집니다.

살아온 대로, 행한 대로, 말한 대로 마음에 품고 있는 대로 하나님 앞에 쌓입니다. 탐욕이 마음에 가득 채워진 사람은 행복이 와도 그 욕심 때문에 행복을 보지 못합니다. 보지 못하니 그 행복을 누리지도 못합니다.

지나친 욕심 때문에 믿음의 길을 잃고 떠도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약 01:15) 시대가 되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근심(οδυναις)은 깊은 슬픔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찔렀도다 (περιεπειραν)라는 단어는 꿰뚫어 관통하였다는 뜻입니다. 이 관통이란 뜻은 주로 고기를 쇠갈고리로 꿸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결국, 지나친 탐욕을 품은 자는 극심한 근심에 사로잡혀 마침내 자기 눈까지 찌릅니다.

돈에 빠진 자의 말로는 불행입니다. 돈에 빠지면 믿음 관리가 안 되니 불행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러면 재물에 대한 현재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열심히 일해서 정당하게 물질을 소유한다면 이는 좋은 일입니다. 당연히 권장해야 할 일입니다. 10절 말씀은 부해지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는 자에 관한 경고입니다.

 

탐욕을 줄이지 못합니까? 마귀의 시험과 올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여러 가지 해로운 물욕을 제어하지 못합니까? 파멸의 길이 기다립니다. 거짓과 사기로 부해지려는 사람, 남의 가슴에 못질해서 부를 누리려는 사람,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심판 날에 다 날아가 버리는 쭉정이 신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이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평강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믿음은 뒷전입니다.

불신의 일을 위해 믿음도 감추어버립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는 사람을 보면 그 원인은 다 돈입니다. 왜 근심합니까? 돈 때문입니다. 왜 우울합니까? 돈 때문입니다. 왜 삶이 무력합니까? 돈 때문입니다. 왜 믿음에서 떠납니까? 돈에 대한 애착 때문입니다.

 

약 0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는 근심을 지울 수 있는 대상이 있습니다. 재물이 아닙니다. 근심을 지우고 찬양할 수 있는 예수님입니다. 이분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교회는 의미 없이 왔다가 갔다가 하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 위로받고 은혜받는 곳입니다. 세상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승부를 거는 곳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로서 새 단장을(계 21:02) 하는 성도이지 예수님을 그냥 따라다니는 팬이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옛날 조선 시대 때 목이 왼쪽으로 90도 돌아가서 앞을 볼 수 없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부자가 침을 잘 놓는 용한 침쟁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와서 목을 제대로 돌려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자 침쟁이가 5천 냥만 주면 고쳐주겠다고 하자 5만 냥이라도 줄 테니 목만 바로 돌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드디어 침쟁이가 부자의 목에 침을 한 대 놓자 금방 정상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이 부자가 이렇게 쉽게 돌아온 목을 보니 비용이 아까웠습니다. 밑천도 안 드는 일에 천 냥도 많지만 그래도 준다면서 침 값을 천 냥만 하자고 박박 우깁니다. 이 침쟁이가 생각해보니 너무나 괘씸합니다.

이에 침쟁이는 재발하지 않도록 침을 한 대 더 맞아야 한다며 부자 목에다 침을 탁 찌르니 그만 본래 90도로 홱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재미있으라고 꾸며낸 이야기이겠지요?

 

사람은 너도나도 욕심이 가당찮습니다. 지금은 모든 욕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입니다. 세상 것에 아무리 욕심을 내어도 그것을 가지고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재물 타령할 때가 아닙니다.

물욕에서 벗어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삶을 단순하게 바꾸어야 할 때입니다. 조금만 더 삶에서 조금만 덜 삶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제가 목회의 길로 들어섰을 때가 44년 전 일입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세상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이 차고 넘칩니다. 물질과 문화의 풍요도 넉넉하게 누립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부족함 없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불만족입니다. 지나친 물욕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의 가족 모두가 이 지나친 물욕부터 고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