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0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04절을 보면 첫째 날 빛을 만드신 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טּוֹב 토브). 빛을 만드신 후 그 빛을 보시면서 감동하셨다는 뜻입니다.
좋다. 멋지다. 이런 식입니다. 이렇게 해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매일 매일 감동을 연발하셨습니다(04, 10, 12, 18, 21, 25). 천지창조를 마치신 후에는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31). 하셨습니다. 최고의 감동 표현입니다. 야, 너무 좋다, 야, 너무 멋지다. 이런 감탄사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불행하다는 말을 합니다. 왜 그런 것 같습니까? 감동과 감탄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을 보고도 좋다고 감동하는 감정을 상실했습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아닙니다. 기적입니까? 아닙니다. 감동과 감탄이 없는 삭막한 마음입니다. 공감하십니까?
김삼일 가족 여러분, 감동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마음만 먹으면 주변 어디에서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천지 만물 자연의 이치가 감동 거리입니다. 믿음 생활 원리도 같습니다.
같은 환경 같은 조건인데도 감동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감동을 느끼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감동과 감탄사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반면 어떤 조건을 세밀하게 따지고 또 따지는 사람에게는 감동될만한 일이 별로 안 따릅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 왕이 신령한 일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일입니다. 다윗은 시선이나 체면 따지지 않고 감동을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성령님의 감동이 있는 춤」으로 정했습니다.
1.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과정입니다. |
0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사울 왕 사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북에는 사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고 남에는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2년 만에 이스보셋 왕국은 다윗에게 흡수되었고 다윗은 통일 왕국으로 새롭게 출범하였습니다.
다윗이 국가 발전을 위해 우선순위로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수도로 정한 일입니다. 이전까지는 헤브론이 수도였는데 남북이 하나 되기 위해서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다음으로 예루살렘 서쪽 13km 지점 바알레유다의 아비나답 집에 70년 이상(B.C. 1075년~B.C. 1003) 모셔져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일입니다. 법궤(法櫃)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명칭과 형태를 살펴보겠습니다.
➊증거궤(출 26:33) ➋법궤(레 16:02) ➌여호와의 언약궤(민 10:33) ➍나무궤(신 10:01) ➎궤(수 03:15) ➏하나님의 궤(삼상 03:03) ➐이스라엘 신의 궤(삼상 05:07) ➑여호와의 궤(삼상 06:01) ➒거룩한 궤(대하 35:03) ➓권능의 궤(시 132:08).
이 거룩한 법궤가 개인의 집에 70년 이상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엘리 제사장이 다스리던 시절 말기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던 때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이 크게 패배하자 지도부가 모여 특별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당시 수도 실로에서 가져와 블레셋과 전쟁에 앞세우자. 그러면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삼상 04:03). 라는 결정입니다.
치열한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겠다는 생각으로 법궤를 앞세워 출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전쟁에 패하였고 법궤마저 빼앗겼습니다. 이에 블레셋은 전리품으로 법궤를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처박혀 있습니다.
놀라서 다곤을 일으켜 그 자리에 세웠는데 이튿날 아침에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곤의 얼굴이 여호와의 궤 앞에 다시 처박혀 있습니다.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흩어졌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아 있습니다(삼상 05:01~04).
법궤 때문에 아스돗과 그 주변에 독한 종기의 재앙이 임했습니다. 이에 블레셋의 방백들이 모여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의논합니다. 내린 결론은 이웃 도시 가드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
리하여 법궤가 가드까지 왔습니다. 이번에는 가드에도 재앙이 임했습니다. 이에 법궤를 에그론 도시로 보냈는데 이 에그론에도 법궤가 도착하자 하나님의 재앙이 임했습니다. 이런 과정 끝에 법궤가 벧세메스로 돌아왔습니다.
비록 불신앙으로 법궤를 빼앗겼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법궤가 돌아왔으니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이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돌아온 법궤를 환영하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동시에 법궤에 대한 호기심으로 법궤를 들여다보기 위해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들을 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런 사건을 겪은 벳세메스 사람들은 법궤를 바알레유다 곧 기럇여아림 사람에게 모셔가라고 통지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기럇여아림 사람이 와서 법궤를 가져다 산자락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하였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70년이나 되었습니다(삼상 07:01, 02).
2. 다윗은 법궤가 돌아옴을 보고 즐겁게 춤을 춥니다. |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법궤의 규격은 가로 125㎝, 세로 75㎝, 높이 75㎝입니다. 싯딤 나무를 재료로 하여 금으로 안과 밖을 싸고 위의 가장자리는 금테가 둘러 있습니다(출 37:01~05).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고 그 위에 금으로 두 그룹을 만들어 세웠습니다(출 25:20). 법궤는 두 그룹만 금이고 나머지는 조각목을 금으로 싼 궤입니다.
사면에 금으로 만든 고리가 있고 법궤를 꿰어 나르는 채(pole)는 금으로 쌌습니다. 왜 금고리와 채가 있어야 합니까? 법궤에 손을 댐으로써 부정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법궤를 만든 재료가 조각목(皂角木, acacia wood)입니다.
만일 백향목으로 만들라고 했으면 멀리 레바논까지 나무를 구하러 가야 했습니다. 참나무로 만들라 했으면 역시 팔레스타인까지 다녀와야 했습니다. 광야에는 이런 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법궤의 각 명칭 중 증거궤, 언약궤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그 안에 모세가 받은 율법의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넣어두었기 때문입니다(히 09:04).
그런데 구약 성경과 히 09:04이 충돌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법궤 안에 증거판 즉 십계명을 두라고 하셨습니다(출 25:16). 만나를 담은 항아리는 법궤 안이 아닌 법궤 앞에 두라고 하셨습니다(출 16:33).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법궤 안이 아닌 법궤 앞에 두라고 하셨습니다(민 17:10). 결국,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 판은 있지만, 만나를 담은 항아리나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있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습니다.
솔로몬 왕이 B.C. 959년 성전을 짓고 법궤를 성전으로 옮겨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역시 십계명 두 돌 판만 있었습니다(왕상 08:09; 대하 05:10). 그러면 구약 성경과 히 09:04의 충돌처럼 보이는 일을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40년 동안 자주 이동하였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법궤 안에 한시적으로 넣었을 것입니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만나와 지팡이는 썩어서 없어진 것으로 짐작됩니다. 예루살렘이 예루살렘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있어야 합니다.
이 궤가 없으면 예루살렘이 과연 하나님의 성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3만여 명의 사람과 악사들과 찬양 대원을 동원하여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된 법궤를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습니다.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다윗은 법궤가 들어오자 법궤 뒤를 따르면서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임하자 마음껏 춤을 춥니다. 음악에 맞추어서 반원을 그리며 뛰어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세마포 예복이 벗어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감동의 춤을 추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기뻐하셨고 마음껏 춤을 추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감동을 주는 축제는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축제입니다. 사람의 축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며 누리는 감동의 축제입니다. 신령한 감동은 사람 냄새 나는 즐거움이 아니라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향기로운 감동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의 춤은 체면과 형식이 아니어야 합니다. 다윗이 왕의 권위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좋아서 추는 춤처럼 우리도 그런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감동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는 춤을 춥시다. 자아와 체면 상관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이런 감동의 춤이 없는 겁니다. 성령님의 감동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감동을 무시하면 복이 떠납니다. |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사울의 딸 미갈. 미갈은 직전 왕 사울의 작은 딸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사위가 되는 조건으로 블레셋 사람 백 명을 죽여 포피를 주고 맞은 아내입니다(삼상 18:25~27). 그런데, 사울 왕이 다윗을 박해해서 쫓아낸 후 발디에게 주었습니다(삼상 25:44).
그 후 세월이 한참 흘러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권을 잡자 미갈을 북 왕국 아브넬 장군을 통하여 발디에게서 찾아 왔습니다(삼하 03:14, 15). 이런 미갈이 예루살렘에 법궤가 들어오던 날 하나님의 감동을 입어 춤을 추는 다윗의 모습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집으로 들어올 때 미갈이 한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방탕한(רֵק 레크) 자가 염치없이. 방탕한 이 말은(רֵק) 천박한, 가치 없는 이런 뜻입니다. 바로 이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 곧 신약의 라가(ῥακα 마 05:22)입니다.
미갈은 남편 다윗에게 가장 천한 종의 종이란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품위 없이 행동했다며 경멸합니다. 미갈은 법궤를 안치하는 과정에서 다윗이 무게 잡기를 바랐는데 체통 없이 춤을 추니 마음이 상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모르니 나오는 불평입니다. 신령한 은혜를 알지 못해서 나오는 불신자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사회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법궤의 가치를 그렇게도 모릅니까? 한 마디로 불신앙 수준의 부모님 영향 때문입니다(대상 13:03). 다윗을 업신여기는 미갈의 말에 다윗이 어떻게 반응을 보이는지 21절로 보겠습니다.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미갈의 심중에 담긴 칼날 같은 말을 다윗이 왜 모릅니까? 미갈의 말에 다윗이 어떻게 대꾸를 하는지 보십시오. 매우 까칠합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 춤을 추는 것은 그대의 집안을 마다하고 나를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뽑아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내가 춤을 추는 것은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입는 이상 계속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겠다고 말합니다. 성령님과 함께 추는 춤입니다.
이때 다윗 왕의 아내 미갈이 창문으로 남편의 춤추는 모습을 봤지 않습니까? 남편이 저렇게 좋아하고 백성들이 기뻐하면 미갈도 함께 뛰쳐나가 춤을 춰야 합니다.
다윗이 집으로 들어올 때 참 기쁘시죠? 당신 춤추는 걸 봤을 때 나도 뛰쳐나가 함께 춤을 추고 싶었어요.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미갈이 한다는 소리가 혀를 차면서 그게 뭐요. 왕의 체통이 있어야지 체통. 복을 받을 기회를 놓쳐버리는 미갈입니다. 하나님은 미갈의 복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이스라엘 사회에서 복을 받지 못한 첫 증거가 자식을 갖지 못한 일입니다. 미갈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였고, 하나님 은혜의 상징 법궤에 대하여 무지하였고, 입술을 함부로 놀려 자식 없는 삶으로 인생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교만한 자, 신령한 면에 어두운 자 감동이 없이 자기의 감정만 따라 사는 자는 결국 신령한 복에서 탈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법궤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이루어지는 속죄소입니다. 우리 주님의 속량을 상징하는 시은소입니다. 성막에서 가장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물입니다.
싯딤나무 조각목 자체가 귀하거나 금이 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귀한 것이 되었습니다. 통상으로 교회에서 사용하는 기구를 성구라고 부릅니다.
나무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그 쓰이는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서 의자에만 앉아도 감동이 오고 눈물이 나는 것은 성구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감동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억지로 만들어진 감동, 진정한 감동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삶에서는 예수님의 믿음의 향기가 울려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님으로부터 나오는 감동이 없으니 거의 불신자 수준과 다름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성령님의 감동 안에서 믿음 생활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다윗 왕처럼 신령한 것을 체험하고 감동이 오면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표현하십시오.
다윗 왕의 생애 최고의 감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예루살렘 성막에 안치한 일입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일입니다.
법궤는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이루는 속죄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곳이 신령한 면에서 법궤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광채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 말씀이 새겨져서 믿음으로 뛰놀고 감동 있는 교제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성도를 감동하게 하고 세상을 감동하게 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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