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없는 길을 행복인 줄 알고 달려갔던 사울, 예수님 믿는 사람을 학대하였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오히려 예수님을 자랑하는(고후 12:05) 길을 걸었습니다. 사도로 쓰임을 받은 바울 곁에서 동역한 사람 중 한 사람을 제하고는 모두가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복을 받지 못하였습니까? 데마라는 사람입니다. 이 데마에 대하여 바울이 이런 평가를 하였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04:10).
김삼일 가족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을 잘 만나는 일입니다. 만나는 사람이 내 삶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우리는 데마처럼 믿다가 낙심하는 자리,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자가 아닌 예수님과 동행하는 인생길에 들어섰으니 이 복을 잘 관리하여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사람의 생애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얼마나 재물을 많이 모았느냐? 어떤 직위에 올랐느냐? 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특별 기준이 있습니까? 주님 안에서 무엇을 하였느냐? 어떤 업적을 남겼느냐? 어떻게 삶을 마무리하였느냐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팔레스타인 통치자 아그립바 왕이 총독 베스도와 정치 거래 인사를 나누기 위하여 가이사랴에 왔다가 일정에 없는 바울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현재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로 인해 가이사랴 감옥에 구류되어있는 처지입니다.
평소 바울에 관한 소문을 들은 아그립바가 바울을 재판하는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이어서 바울에 대해 여러 말로 질문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 현장을 통해서 아그립바에게 자기의 지나온 삶에 대한 간증과 함께 복음을 힘있게 전합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거절합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걷어차 버립니다. 영생 얻는 길을 포기하였습니다. 이 일이야말로 불행 중의 불행입니다. 저는 아그립바가 영생 얻는 길을 포기하는 현장을 보면서 「영생의 길을 외면한 아그립바」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사도 바울을 심문하는 아그립바가 누구입니까? |
0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사도 바울 앞에서 근엄한 무게를 잡는 아그립바가 누구입니까? 그의 행적을 살펴보는 것이 오늘 말씀을 풀어가는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아그립바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면 헤롯의 가계도(家系圖)부터 보아야 합니다. 로마 제국 당시 팔레스타인과 주변 지역을 다스리던 인물 중에 헤롯이 여러 명 등장합니다. 일명 헤롯 왕가인데 이 헤롯 왕가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보겠습니다.
안티파스 2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에돔 족속 이두메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잠시 받아들이는 기간에 이스라엘에 편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신임을 얻어 유대 총독이 되었고 둘째 아들을 갈릴리의 통치자로 세웠습니다. 그가 성경에 처음 나오는 헤롯 왕입니다.
헤롯(Ἡρώδης B.C. 37~3) 대왕. 유대인에게는 잔학무도한 왕으로 취급되었으나 그는 건축과 경제 부분에서는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의 업적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을(헤롯 성전) 확장한 것으로 그 확장 공사는 거의 50년이 걸렸고 지중해변에 항구 도시 가이사랴를 건설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과정에서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 궁으로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마 02:01, 02).
이에 헤롯 왕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는데 그때는 이미 천사의 지시를 받고 예수님과 그 부모가 애굽으로 피난한 후였습니다. 이에 동방박사에게 속은 줄 안 헤롯 왕은 후한을 끊기 위하여 2살 이하의 유아를 학살하였는데 이 잔인한 왕을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헤롯 대왕이라 부릅니다.
헤롯 1세(ἈντίπαςⅠ B.C. 3~A.D. 39). 헤롯 대왕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 사후 갈릴리와 베뢰아의 영주가 되었고 세례요한 및 예수님과 관계가 깊습니다. 자기의 형제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함으로 세례요한의 충고를 받았으나 오히려 세례요한을 죽이는 일까지 하였습니다(마 14:01~11). 또 빌라도로부터 송치된 예수님을 심문도 하였습니다(눅 23:07~09). 그는 성격이 교활하고 방종하여 예수님께서 여우라고까지 하셨습니다(눅 13:32).
아그립바 1세(ἈγρίππαςⅠ A.D. 10~44). 헤롯 대왕의 손자로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통치하였으며 복음이 왕성하여 가는 길목에서 열두 제자 중 야고보를 죽였습니다(행 12:01). 이로 인해 유대인들이 기뻐하자 베드로까지 죽이려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무교절이라 그 절기를 마치고 베드로를 죽이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베드로를 능력으로 석방하게 하셨습니다. 이후에도 아그립바 1세는 교만하게 날뛰었으며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가로챈 일로 인하여 벌레에 먹혀 죽었습니다(행 12:21~23).
아그립바 2세(ἈγρίππαςⅡ ~A.D. 27~100).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서 어려서 로마의 황실에서 자라났으며 아버지가 죽을 때 나이가 17세였습니다. 너무 어려서 아버지의 영토를 이어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총독 관할 하에 들어갔고 A.D. 50년경 클라우디오 황제에 의해 팔레스타인 북부 칼키스(지금의 레바논 지역) 지방 분봉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 53년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오가 빌립이 다스리던 땅과 교환하여 주었고 후에 네로가 황제가 된 후에는 디베료를 포함한 상당한 지역을 받아 다스렸습니다. 베스도가 총독으로 왔을 때 아그립바는 로마와의 밀착된 관계 속에 특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누이 버니게와 함께 아부 인사를 위해 가이사랴에 왔다가 바울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2. 아그립바는 영생의 길을 외면합니다. |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 도다.
지금 바울이 아그립바와 마주하고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총독 군영이 있는 가이사랴의 감옥입니다. 바울은 자기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아그립바에게 율법서와 예언서를 들추면서 불편한 법정을 전도의 현장으로 꾸립니다.
먼저 아그립바에게 자신이 과거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을 때 믿는 사람을 잔인하게 박해하였던 일을 거론합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유대교와 율법에 충성하는 일인 줄 알고 그리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나고 보니 그때의 일이 크게 잘못되었기에 이제는 그 박해하던 예수님을 주님으로 전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긴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의 이런 간증을 듣는 가운데 베스도 총독이 바울의 말을 차단하며 크게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구나.
그러자 바울이 과감하게 말합니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합니다. 미쳤다고요? 아닙니다.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미쳤다면 내가 아니라 당신이 미친 겁니다. 라고 단호하게 대항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배경을 잘 모르는 총독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기의 생명 구명하는 일이 별 소득 없음을 알고 대화의 대상을 다시 아그립바에게로 돌립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제가 간증하는 이 일의 의미를 아시지 않습니까?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지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26, 27) 다시 말해 구약시대 선지자의 메시지를 믿는 이상 예수님이 바로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아라고 믿어야 하지 않느냐는 강력한 복음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누구나 구약시대 선지자의 메시지를 받아들입니다.
설령 아그립바가 속으로는 믿지 않아도 여러 사람 앞에서 선지자를 안 믿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그립바는 헤롯 대왕의 증손자로 비록 유대인과 에돔 혼혈 출신이지만 스스로 이스라엘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자로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아그립바는 메시아에 관한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되었음을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대교의 편견과 주변 사람의 눈치 때문에 복음을 받고도 거부합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 도다. 아그립바는 남의 시선 때문에 영생의 길을 차버립니다. 방탕하게 살았던 그는 복음을 받아들일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립니다. 자기를 향한 바울의 구원의 길을 단번에 거절하였습니다. 세상의 체면과 세상의 물질과 세상의 권력에 마음을 빼앗기면 영생의 길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예가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지내다 지옥에 간 부자를 들 수 있습니다(눅 16:19~24).
눅 16: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사람은 세상 사는 동안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떻게 믿음의 교분을 나누고 어떻게 믿음의 일을 하다 어떤 결과를 남겨놓고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영생의 동반자입니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파트너입니까?
외로울 때 말벗 되어주는 위로자입니까? 그 무엇보다 영생을 논하며 믿음의 벗이 되어주는 사람이 최고입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세상에서 최고의 복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복을 관리하는 일에 전심전력하기를 축원합니다.
3. 아그립바는 부끄러운 역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전 03:11). 이런 영생에 관한 마음은 신 불신 간에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영생을 찾는 대상이 다를 뿐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은 아그립바와 베스도 총독과 그 법정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구원의 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그립바는 법정을 나서며 총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바울의 무죄를 입증해주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홀로 법정에 섰을지라도 자신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옥으로 달려가는 이웃의 영혼을 살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을 못 들은 체하고 돌아선 아그립바의 앞날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복한 길이 잘 열렸습니까?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답게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선용하여 믿음의 인생 마무리를 잘하였느냐 말입니다. 믿음으로 마무리 잘했으면 좋았겠지요? 비록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로마에 대항하는 통치자의 모습을 보였다면 그 마지막 행적 하나로 영원히 기억되는 사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1세기 중반경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식민통치에 민중의 거센 반발이 일어났고 로마 제국의 대처도 더욱 강경하였습니다. 힘없는 이스라엘은 로마에서 파송된 군병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더욱 고난을 겪었습니다. 특히 A.D. 66년 제1차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아그립바가 이를 진압하려는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를 지지하면서 이스라엘에는 큰 고통을 안겼습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아그립바는 권세 획득을 위해 로마 제국이 요구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거리낌 없이 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 크나큰 상처를 입혔다는 뜻입니다. 아그립바는 유대 지역 직접 통치자가 아닌데도 예루살렘 성전을 관리하고 대제사장의 임명 및 파면 권한 등을 행사하였습니다.
신분을 망각하고 부귀영화를 위해 로마 제국에 아부하였고 A.D.70년 로마 장군 디도(Titus)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하자 바로 로마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지내는 중 A.D.75년 행정관으로 임명되어 살다 A.D. 100년경 죽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각자의 삶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 것 같습니까? 백 년을 산다고 한들 잠깐 지나가는 세월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왕 우리 모두 세상에 왔으니 영생의 길에서 목적 있는 삶을 삽시다. 물욕과 권세 때문에 영생을 잃어버리는 아그립바와 같은 인물이 되지 말자는 뜻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마 19:16~22).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물질 문제에 해방되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그러자 이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영생의 길 탈락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요 14:06) 하신 주님께 나아왔으면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가야지 왜 그냥 돌아간다는 말입니까?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김삼일 가족 여러분, 신앙에도 일류가 있고 이류가 있고 삼류가 있다는 말 들어 보셨습니까? 제가 간단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삼류 신앙은 세상에 한 발 교회에 한 발, 그렇게 양다리는 걸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교회에 다니기는 합니다만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나 구원의 기쁨이 없습니다.
이류 신앙은 열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모임에도 참석합니다. 그러나 기쁨이 없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여 능력이 안 나타납니다.
일류 신앙은 영생의 소망을 누리는 신앙입니다. 기쁨과 감격이 있고 은혜가 충만합니다. 어떤 어려운 환경을 만나도 극복하면서 복음의 증인으로 사는 신앙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예수님 없이 가면 간만큼 헛수고입니다. 예수님 없이 돈을 쓰면 쓴 만큼 헛수고입니다. 예수님 없이 올라가면 올라간 만큼 헛수고입니다. 아그립바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마지막 구원받을 수 있는 길, 영생의 길을 세상의 것들 때문에 외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답게 로마 군대와 장렬하게 싸우다 죽었으면 만고의 충신이 되었겠지만, 오히려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동족을 팔았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영생의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통치자로서 이스라엘 역사에 부끄러운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영생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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