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놈현(노무현) 탓이라는 말이 회자했습니다. 비가 와도 노무현 탓, 비가 안 와도 노무현 탓, 우연한 사고가 터져도 노무현 탓, 자연재해가 나도 노무현 탓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지하 단칸방에 전세 사는 사람마저도 종합부동산세에 살림 거덜 난다며 노무현을 성토하였으니 국민들 모든 나쁜 현상은 대통령 탓으로 돌렸습니다.
요즘 정치에 관한 일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대통령을 막 욕합니다. 야당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 경제를 망쳐놨다고 야단입니다. 자기들이 국회를 등한히 하고 밖에서 열심히 놀며 먹고 즐겼으면서도 정부를 탓하고 대통령을 탓합니다.
저는 정부를 두둔하거나 대통령을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즘 정부의 하는 여러 일이 마음에 안 들어 열 받을 때가 한두 번 아닙니다. 정부 반대 시위라도 하고 싶지만 국가 권력은 불신 세계일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롬 13:01~05). 성경은 신자에게 불평보다 오히려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안내합니다. 그러나 그 권력이 믿음의 걸림돌 되고 신앙을 억압하거나 짓밟으면 그때는 얼마든지 항거할 수 있습니다.
나라에는 대통령이 문제이고, 학교에는 교수들이 문제이고, 회사에는 오너가(Owner) 문제이고,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문제라고 합니다. 또 교회에 가면 목회자가 문제이고 중직자가 문제이고 그래서 교회가 문제라고 합니다. 사실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은 말씀에 비취어 보아 나 자신이 더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답게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이 썩었고 어둠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내가 제일 문제입니다」. 로 정했습니다.
1. 주님께서 화를 선언하시면 역사에서 지워집니다. |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대부분 사람은 자기 허물을 책망하는 것보다 다독거려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 욕심에 사로잡힌 이기주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못에 대하여 책망과 함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21절과 23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특별히 권능을 많이 행하신 세 지역을 책망하십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와(21절) 가버나움입니다. 얼마나 권능을 많이 행하셨는지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주님의 행적을 볼 때 아주 많이 권능을 베푸셨습니다.
고라신(Χοραζίν). 이 도시는 신약에서 본문과 눅 10:13에만 등장하는 지명(地名)으로 그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약 2마일 떨어진 오늘날의 키르베트 케라제(Kirbee Keraze)에서 옛날에 파괴된 고라신의 유물이 많이 발견됨으로 고라신일 거라 짐작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지 가버나움과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에서 고라신 전도를 위해 예수님은 많은 시간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벳새다(Βηθσαΐδά). 이곳은 안드레, 빌립, 베드로의 고향으로서(요 01:44) 갈릴리 호수와 강둑 위에 위치하였습니다. 일찍이 분봉왕 빌립이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딸 줄리아(Julia)를 기념하여 벳새다 줄리아스로 명했던 곳입니다. 열두 제자 중 여러 제자를 배출하였고 오병이어 기적도 이곳 벳새다 들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가버나움(Καπερναούμ). 예수님의 복음 활동의 센터입니다(마 04:13). 주변 여러 지역 사람이 와서 각종 병 고침과 은혜를 받은 곳입니다. 어느 지역보다 권능을 더 많이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개인이나 국가에 대해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책망과 회개의 경고는 감사한 일로 받을 때 복이 됩니다. 그 이유는 회개함으로 심판을 면하게 되고 구원의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은혜를 거절하면 역사에서 지워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현재 이 세 곳은 폐허로 남아 있습니다. 면적으로 볼 때 작은 땅을 가진 이스라엘, 오늘의 경제 규모라면 얼마든지 폐허를 화려하게 개발할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폐허로 방치하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지워진 지역이 되었습니다. 가버나움은 세관이 있었고 백부장도 주둔하던 지역입니다. 그러면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이 세 지역이 왜 폐허의 현장이 되어 있습니까? 주님으로부터 화를 선언 받았기 때문입니다.
화(οὐαί). 신약 성경에서 화라는 말은 매우 슬프다. 화가 있을 것이다. 라는 말로 47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화가 있다고 선언하시면 그때는 대단히 무섭습니다. 그 화는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권능을 많이 나타내셨음에도 세 지역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이적이 눈앞에서 아무리 펼쳐져도 하나님,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 길은 멸망입니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2.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야 살길이 열립니다. |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주님은 고라신과 벳새다에 특별한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도 구원의 자리 회개의 자리에 들어오지 않고 예수님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가버나움도 고라신과 벳새다처럼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가버나움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주거지요 복음의 센터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고 복음의 귀를 막으면 아무리 권능을 나타내어도 안 믿어집니다.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두로와 시돈 두 도시에 대해서는 가끔 들어보셨죠? 갈릴리 북부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페니키아의 항구도시입니다. 바알을 섬기는 우상의 도시입니다. 주님께서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베푼 그런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나타내었다면 그들이 진작 구원의 자리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단정하십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사람을 향한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아직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어떤 기회인지 보겠습니다.
베옷(σάκκος)을 입고. 베옷(sackcloth)은 낙타의 짧은 털로 짜 만든 올이 매우 거친 직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슬픔을 당했을 때 비탄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맨살에다 이 옷을 입었습니다(삼하 03:31; 왕상 21:27; 욘 03:05~08).
재에(σποδός) 앉아. 고대 이스라엘 사람은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을 베옷을 입은 것 외에 재(ash)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재를 머리에 뿌리거나(삼하 13:19; 애 02:10), 재 위에 앉거나(욘 03:06) 그 위에 눕고(에 04:03) 그 위에서 구르기도 하였습니다(렘 06:26; 미 01:10).
베옷을 입는 것과 재에 앉는 두 행위는 회개와 애통함을 상징하는 증표입니다. 살길이 있다는 복음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회개의 자리로 초청하시는 전능자의 말씀으로 들려야 살길이 열립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경고를 선언하시는 분의 말씀을 들어야 살길이 있습니다(히 12:25).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이 베옷을 입고 재에 앉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역시 마음이 완고해져 있습니까?
히 0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목회 활동에서 안수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안수기를 하면서도 마음이 무척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안수기도의 한계 때문입니다.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기도를 받는 당사자가 풀어야 할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에 관한 일입니다.
안수기도가 능력 있을지라도 그 능력이 회개를 대신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권능을 많이 베푸심으로 각종 병자가 낫고, 귀신이 떠나가고, 지역 전체가 진동하는 은혜가 임할지라도 회개의 몫은 당사자입니다.
회개는 예수님도 대신에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셨다는 말은 회개하고 믿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문을 잘 여는 것, 회개하는 것, 은혜를 받는 것은 다 나의 몫입니다. 이런 것까지 주님께서 다 해결하시면 우리는 로봇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입니다.
3. 내가 제일 문제입니다. 라고 고백 합시다. |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ὑψόω 휩소오)?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인격체가 아닙니다. 따라서 가버나움 내의 사람을 말합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활동 무대인 만큼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많은 이적을 나타내셨고 어느 성읍보다 많은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마 04:13~16).
그런데 가버나움은 하나님 나라가 이 성읍에서 확장되어가고 있음에도 오히려 교만의 머리를 하늘로 쳐들고 있습니다. 23절 말씀을 잘 보십시오. 바벨론 멸망의 예언(사 14:12~15) 구절과 유사합니다. 결국 저들 스스로 생명의 길이 아닌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구절입니다.
음부(ᾅδης)에까지 낮아지리라. 여기서 음부를 뜻하는 원어 ᾅδης(하데스)는 1차로 무덤을 가리킬 때 쓰였으며 2차로는 보이지 않는 영들의 세계를 뜻합니다(눅 16:23; 계 01:18).
따라서 이 말은 22절의 심판 날과 조화를 이루어 교만한 자들이 처하게 될 굴욕과 저주와 핍절과 멸망의 장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예언은 신령한 의미뿐만 아니라 역사에서도 성취되었습니다. 로마군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그 전쟁으로 인해 완전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이 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 권능을 보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간략히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전하신 메시지와 치유 사역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삼 년을 천국에 맞추시고 천국을 보여주시는 사역이었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시는 구원 사역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메시지와 많은 능력 행하심을 세상의 관점으로만 이해할 할 뿐 메시아의 천국 사역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볼 때마다 예수님이 천국을 전하시는구나. 나도 천국에 들어가야겠다. 천국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고 반응해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도 천국을 소개하는 첫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03:02, 04:17). 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천국에 대해 알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회개와 겸손의 자리에 들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세상 소원을 들어주고, 아픈 문제를 해결해주고, 정치 문제나 해결해주는 분으로 알면 그 어떤 사람도 천국을 보지 못합니다.
정리하면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 가버나움 사람들의 신앙관이 세상 관점에서 천국 관점으로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회개의 자리로 오지 못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완악한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변화가 일어나기를 두려워하는 내가 제일 문제인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제일 문제입니다. 라고 고백합시다. 우리 모두 남을 탓하는데 익숙해 있고 자신은 안 그러는 척 두꺼운 가면으로 포장된 실체를 보아야 합니다. 나부터 가면 쓴 그리스도인 외식자를 고백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만 죄인 중의 괴수입니까? 나는 더욱 죄인의 괴수 아닙니까? 세리만이 죄인이 아니라 나는 더욱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제일 문제입니다. 라는 고백과 함께 내 탓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사는 길이 열립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발생했던 항공기 납치 동시다발 자살 테러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로 인해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국방부 펜타곤이 공격받아 일부가 파괴되었습니다.
약 2,996명이 사망하고 최소 6천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한 사건인데 약칭 9·11 테러입니다. 그때의 미국 대통령 근황을 살펴보았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 조지 W. 부시인데 9·11전 대통령 8월 평균 지지율은 56%였으며 9·11 테러 바로 전(9월 7~10일)에 측정한 지지율은 51%로 취임 후 최저치였습니다. 그러나 테러 직후 조사에서 9월 14~15일 86%, 9월 21~22일 90%이었습니다. 미국 국민들은 9·11 같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대통령을 더 믿어주고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이 여론조사를 통하여 확인되었습니다.
가정법이지만 만약 한국에 9·11 같은 대형 사건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국민 여론은 당장 대통령은 책임지고 사면해라. 청와대 안보실장,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관계자들 즉시 구속해라. 등 별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남 탓하며 공격하는 건 문제 해결에 하나도 도움 안 됩니다. 모두가 내가 제일 문제입니다. 라고 고백하여야 문제가 해결되고 환경도 개선됩니다. 교회생활에서 헌금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 중에 바르게 헌금하는 자가 별로 없고, 기도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 중에 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전도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 중에 바르게 전도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이 자리에 내 이름을 넣어 읽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회개의 자리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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