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예수님의 팔복

[팔 복⑧] 나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입니다(마 05:10~1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9. 1. 12. 22:02
728x90

국제오픈도어선교회는 201517일 세계의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기독교 박해순위를 발표하였습니다. 연중 정밀조사를 통해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얼마만큼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지를 측정한 순위인데 북한이 13년 째 1위로 선정되었습니다.

기독교 박해순위 상위 10개 국가를 보면 북한 다음으로 2위부터 10위까지는 근본주의 이슬람 국가들인 소말리아,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수단, 이란, 파키스탄, 에리트레아, 나이지리아 순입니다. 이중 수단, 에리트레아, 나이지리아는 작년에 비해 새롭게 10위권에 포함됐습니다.

 

기독교 박해가 가장 심한 북한 지하교회의 성도들은 집회로 모일 때마다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예수님의 전사들 수칙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천대받게 되어 있다. 그것이 긍지요 기쁨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요 승리이다. 칭찬 받는 것보다 욕먹는 것을 먼저 배워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인민의 눈물을 닦아 주고, 서로 눈물을 닦아 주며, 주위의 모든 고통당하는 자들의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

사랑이 사랑을 낳고, 또 그 사랑이 새로운 사랑을 낳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의 전사로 만들어야 한다. 성경이라는 잣대로 자기가 먼저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복 있는 사람에 관한 팔복 중에서 이 마지막 말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일곱 가지 말씀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할 것임이요. 라는 3인칭 형식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팔복을 말씀하시고는 곧 2인칭 형식으로 바꾸어 보다 길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팔복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마음 다스림의 문제에서 시작한 팔복이 이제 외적 육신의 문제에 고통을 받는 데까지 왔습니다. 마음과 육신이 박해를 당하는 일도 복을 받는 일이라면 그 일을 어떻게 맞아야 복이 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나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입니다. 로 정했습니다.

 

   

 1.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예수님께서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딱 한 가지 조건의 박해를 받은 자로 제한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입니다. 의를 위한 박해를 믿음의 차원에서 보면 이는 곧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받은 박해를 말합니다. 11절에서 예수님은 의라는 말을 나라는 예수님 자신으로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을 좀 더 넓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당하는 박해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러면 의를 위한 박해, 교회를 위한 박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으로 살려 하고, 말씀대로 살려 하고, 특별히 계명을 잘 지키며 살려는 일에 대한 모든 고난들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박해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서 오는 고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는 고난입니다. 주일 성수를 위해서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절함으로서 오는 고통,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 진력하다가 고초를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 주님을 위한 진정한 고난은 자원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내가 고난을 피할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고난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일부러 고난 앞으로 나가는 부분이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주님께서 하실 때의 상황이나 주님 승천하신 후의 로마의 식민지 상황에서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심히도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1세기 때 로마제국의 정치상황 아래서 이 말씀을 우선 살펴보겠습니다. 성도들은 말씀대로 살기 위한 당면 문제가 바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과,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이는 일입니다.

 

공적인 축하 행사들과 성전에서 행하는 행사들이 거의 이교도 신들의 식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진실한 성도들은 식사 모임을 일절 거절해야 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직업도 그렇게 많지를 않았습니다. 특히 성도들은 노예들을 그들의 형제로 여기고 대우한데 비해, 로마제국은 노예제도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노예들을 계속 무자비하게 부렸습니다. 그들은 또한 성도들에 대하여 로마의 노예제도를 허무는 항의로 인식을 하였습니다.

 

자연스레 성도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약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고난도 점점 깊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상대적으로 로마제국의 권력자들은 국가적인 정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성도들을 표적으로 희생양을 삼기 시작했습니다.

가령 가뭄이 와도 성도들이 신들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큰 화재가 발생해도 성도들이 국가에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벌인 일이다. 이런 식입니다. 심지어는 성도들을 박해하는 구실로 삼은 것 중의 하나가 성찬식에 관한 일입니다. 성도들이 공적 집회 때 행하는 떡과 잔을 문자적인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왜곡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식인종이다.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죽여 버려라. 이런 식입니다.

 

이런 큰 박해를 내다보신 주님은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0:16).하셨습니다. 성도는 비본질적인 요소 때문에 박해를 받지 않도록 지혜롭게 처신하여야 하며, 비본질적인 일에 연루되어 본질적인 것이 훼손되지 않도록 더욱 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2. 나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자입니까?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과,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은 다르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왜 남으로부터 박해를 받습니까?

크게 두 가지 이유일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 때문에 받는 박해와,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박해입니다. 일단 자기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성경이 말하는 박해가 아니라, 엄격한 의미에서 처벌입니다. 박해와 처벌을 이렇게 구분하면 어떨까요?

박해란 좋은 일을 한 것에 대하여 나쁜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고, 처벌은 나쁜 일을 한 것에 대하여 좋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라고. 우리의 잘못된 행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성경이 말하는 박해가 아닙니다. 성도가 법을 어기거나 불의를 행해서 고난 받을 때, 이것을 의를 위해 받는 박해라고 포장하지 마십시오.

 

또 성도가 지나친 믿음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과, 예수님 때문에 박해 받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성도가 믿음을 핑계로 마땅한 책임을 등한이 하여 비난 받을 때, 이것을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럴 때 흔히들 자기를 위해 이런 성경을 차용해 오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03:12). 중요한 것은 의를 위하여 미움과 고난과 박해를 받는 것이라면 이는 예수님의 제자 됨의 표시이며, 동시에 내가 받아야 할 박해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키면서 이런 말씀을 예언적으로 들려주셨습니다.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믿음으로 살수록 더욱 고난과 박해를 당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두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각 교회들을 지도하기 위한 편지를 쓰면서 이와 같은 내용들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 03:13)고 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벧전 02:19)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무능함과 불성실함으로 오는 고난이나 혹은 박해, 직장에서 일을 감당하지 못하여 당하는 욕은 박해가 아니라 그냥 무능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의 경건한 성도들은 이중적인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단으로 몰려 박해를 받았고, 로마제국으로부터는 황제숭배를 거부한다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의 풍조에 순응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결국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반면 그에 따른 박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이 감당 못할 고난을 허락하지는 않습니다(고전 10:13).

 

나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입니까? 경건한 성도로 살면 여전히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우리 시대에도 박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단순히 감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박해가 현재 공산권이나 이슬람권에서 믿음 때문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거나 순교를 당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함으로 받는 모든 제약과 어려움까지도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명예가 실추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통제를 받거나 자유롭지 못한 것까지도 말입니다.

 

   

 3.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천국의 상급이 있습니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팔복의 마지막은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역설적 논리입니다. 박해를 당하는 것은 불행한 일인데도 예수님은 박해를 큰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혹 우리 중에 남에게 박해를 당하신 분, 또 공격을 계속 당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러면 내가 받고 있는 공격이 복된 일인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박해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12절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합니까? 예수님은 원치 않지만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그것은 복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슬람권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하면 사형을 선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2010년 이란에서는 33살의 유세프 나다르카니(Yousef Nadarkhani)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목사가 되었다는 이유로 라쉬트 지역 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 사형 판결은 20119월 이란 최고법원에서 뒤집혀 사형은 면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박해가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 속에서 누구나 교회에 나올 수 있고, 불교나 무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한다고 해서 감옥에 가는 것도,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직장을 잃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가끔은 주님의 은혜 안에 살려고 하는데 상은 고사하고 욕과 박해와 중상모략을 당함으로 고민에 빠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고민이 오고 의문도 일어날 것입니다만 이럴 때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큰 위로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런 저런 상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천국에서 받을 상이 없다면 그것은 결코 복된 인생이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상급도 필요하지만 하늘에서의 영원한 상급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박해를 당할 때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합니까? 믿음의 박해를 당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12).

지금도 박해를 받는 분들이 있습니까? 제가 즐거워하세요. 하면 화가 나겠지요? 아니 고통스럽고 괴로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니? 지금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 박해 자체는 절대로 기쁜 일이 아닙니다. 즐겁지도 않습니다.오히려 고통스러운 입니다. 그런데도 박해를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박해를 받으면 세상이 제공하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고, 세상의 쾌락도 물리쳐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고, 거기다 주님께서 의를 위한 고난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이상은 분명히 축복이요 즐거운 일에 속합니다.

즉 지금의 현실의 문제만 볼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결과를 내다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천국이 그런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10). 주님 때문에 받은 고난은 영광이기 때문입니다(11).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앞서 간 믿음의 선배들과 같은 반열에 오르기 때문입니다(12).

 

0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제자들과 그 시대의 일꾼들의 순교자적인 삶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칼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길바닥에 끌려 다니다 죽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에서 올리브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내던져진 후 매를 맞아 죽었습니다. 안드레도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설교를 하였습니다. 맛디아와 바나바는 모두 돌로 맞아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네로에 의해 로마에서 교수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재앙과 어려움이 피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칭찬만 듣고 내 뜻대로 모든 일이 되지 않습니다. 만일 믿은 자에게 이 모든 것이 물러간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미신적인 믿음일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내 삶에 적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 것을 기대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환경은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공존합니다. 고통도 아픔도 여전히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통해서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잘 만나는 관계를 인연이라고 말하고, 고난스러운 관계를 악연이라고 합니다. 인연과 악연 속에 일이 계획대로 잘 될 때도 있는가 하면 잘 풀리지 않는 때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일이 잘 안 될 때의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느냐가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