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예수님의 팔복

[팔 복⑦] 나는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마 05:09).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9. 1. 12. 22:01
728x90

1200년대 초 유럽은 십자군 전쟁이 막 일어나려고 할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나라마다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무슬림에 대한 미움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사람들 마음에 무슬림(Muslim)을 죽이자.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서 무슬림을 몰살해야 한다. 이런 분위기들이 결국은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파병되는 십자군의 행렬을 어느 젊은 수도사가 바라보면서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 십자군 전쟁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미움과 적개심이 동기가 되어 시작된 전쟁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패배할 것이다.

미움과 증오에 혈안이 되어 사람을 죽이러 떠나는 병사를 보는 젊은 수도사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나름대로 십자군을 조직했습니다. 바로 평화의 십자군입니다.

 

칼과 창 대신 성경을 들고 적군을 품에 안으며 그들에게 사죄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주님 앞에 무릎 꿇고 훗날 유명하게 된 기도를 드립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누구의 시입니까?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랜시스(Francesco) 기도문입니다사람은 누구나 평화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인사할 때도 안녕하십니까? 하고 평안을 묻습니다. 이런 인사는 유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전쟁에 시달렸고 나라가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간 경험이 있으므로 평화(살롬)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오직 평화입니다. 그들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평화라는 의미의 살롬하고 인사합니다. 우리도 옆에 분들과 따뜻하게 인사를 합시다. 살롬.

저는 오늘 팔 복 중 7번째 복인 화평에 대하여 강론하겠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나는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로 정했습니다. 은혜받는 귀한 시간 되기를 축원합니다.

 

 

1. 화평하게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0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하게(ειρηνη 에이레네) 하는 자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이 말은 평화를 도모하는 자를 뜻합니다. 영어로는 peace maker라고 합니다. 이 평화는 두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첫째는 수동적 자세입니다. 예를 들면 다툼을 좋아하지 않는 것, 다툼을 잘 일으키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 등입니다.

 

이 정도는 김삼일 가족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혹 내가 이렇게 했다가는 집안에 무슨 분란이 나는 것은 아닐까 싶어 절제하는 것 잘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능동적 자세입니다. 평화를 만들어가는 적극 자세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러나 화평, 살롬 이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더 나은 평화를 위해서 애를 쓰는 것, 정말 좋은 일이지만 자기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 물질 들여가면서, 내 시간을 들여가면서, 이런저런 오해를 받고, 별별 소리를 다 들어가면서 하는 것이 어렵긴 하나 이것이 꼭 필요합니다. 입술로서 하는 것은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화평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갈등과 다툼이 일어날 상황 속에서 화평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사람이야말로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의 주변 환경을 보십시오. 전쟁까지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다툼과 갈등이 공동체 안에 끊임없이 일어납니다나라 안에, 지역 안에, 직장 안에, 가정 안에, 심지어 교회 안에 다툼과 갈등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을 종말론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두 가지의 나라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와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는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불신자들이 득세하며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신령한 나라입니다. 이 가운데 세상 나라는 특징 면에서 다툼, 갈등,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들이 일어납니다.

 

제가 문제를 하나 냅니다. 어떤 단어인지 맞히어 보세요. 산에 가면 칡넝쿨이 있습니다. 이 칡은 오른쪽으로 나무를 감아올려 갑니다. 반면 등나무는 왼쪽으로 나무를 감아 올려 갑니다. 그래서 칡넝쿨과 등나무가 함께 얽혀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무엇입니까? 갈등(葛藤)입니다. 칡 갈()과 등나무 등()입니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어 결국은 자르지 않고는 풀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불화를 일으키는 상태가 갈등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갈등의 관계를 풀려는 방편으로써 화평을 제안하십니다. 그러면 이 갈등의 관계를 풀기 위한 화평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화평이고, 이웃과의 화평이고, 자신과의 화평입니다성도 여러분, 왜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화평의 마음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까왜 두렵고 떨림과 걱정과 근심으로 살아갑니까한 마디로 세상 나라에 마음이 빼앗겨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된 이유를 놓고 인간의 근본적인 죄 때문이라 말합니다죄는 하나님과는 단절을 가져오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불화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선 제자들에게 평안을 회복할 것을 권합니다. 이것이 회복되어야 이웃과의 화평도 이루어집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 나는 화평을 만드는 자입니까?

 

0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의 주변을 보면 보십시오. 불화를 일삼는 사람, 사람의 마음을 언짢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다툼이 있는 곳이라도 그 사람만 들어가면 웃음의 바다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또 좋은 분위기일지라도 그 사람만 들어가면 갈등 관계가 생기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화평을 만드는 사람입니까아니면 화평을 깨뜨리는 사람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바울 자신의 역할을 놓고 이런 편지의 내용을 보냈습니다. 나는 갈등 관계를 풀고 화목을 조성하는 사람이다. 라고

 

고후 0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화평을 이루어가는 사람의 특징을 아십니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혹 원치 않는 불화가 있으면 그것을 놓고 괴로워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 불편한 일이 해결될 때까지 끊임없이 근심하고 기도하면서 해결책을 찾아 나섭니다.

자기의 주변에 있는 사람 간에도 서로 미워하거나 다투는 모습이 보이면 그 둘 사이에 중재자로 들어갑니다. 어떻게 해서든 화해시키려 힘을 씁니다.

때로는 그 화해의 과정에서 자기가 좀 손해를 보아도 서로 화해하는 모습을 보고 위로받습니다. 이런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필요한 곳에 김삼일 가족이 들어갈 수는 없습니까?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을 뭐라고 부릅니까? peace breaker입니다. 계속 문제를 일으켜 시끄럽게 하는 사람은 trouble maker입니다이런 사람은 가는 곳마다 문제를 달고 다닙니다.

평안하던 마을에, 평안하던 교회에, 평안하던 공동체에 술렁거림이 오고, 분위기가 어색한 징조가 나타나고, 상처받았다는 말이 나오고, 네 편 내 편이란 편 가름이 나타납니다.

성도 여러분, 혹 사탄이 좋아하는 위치에 내가 참여하는 것은 아닌지 자기를 날마다 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가 peace maker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의좋은 형제공원이란 곳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형제애의 내용을 기념하기 위한 공원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형은 가난했지만 새로 살림을 난 동생을 위해 곡식 단을 동생네 곡식단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동생은 식구가 많은 형님이 걱정스러워 형님의 곡식단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보니 곡식 단은 그대로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형제는 다음 날 밤에도 서로 곡식 단을 옮기다가 그만 만났습니다. 그때야 곡식 단을 옮겼어도 그 곡식단이 그대로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의좋은 형제는 실제 인물로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인 세종 때에 이곳에서 호장을 지낸 이성만, 이순 형제애가 본보기가 된다고 하여 연산조 3년에 우애 비를 건립했다고 합니다.

 

매우 행복한 이야기입니다. 이 형제는 물질로는 그렇게 부유하지 못해도 얼마나 행복한 마음을 가졌습니까? 나를 위한 탐욕은 행복에서 이탈하는 지름길입니다.

이처럼 서로를 배려하면서 화목할 때 눈물겨운 행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화평을 무너뜨리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과시라는 욕망입니다. 즉 자기를 높이고 자기가 제일이라 여기는 자세입니다. 둘째는 소유라는 욕망입니다. 조금만 더 가지려는 욕심입니다. 셋째는 기득권이라는 욕망입니다. 이미 가진 권력이나 재산을 지키려고 놓치지 않으려는 집착입니다.

 

잠 17:0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3. 화평을 만드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받습니다.

 

0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으니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자기가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복이 어디로 연결이 되는지 0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 이거 어마어마한 말 아닙니까? 아무나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께 적용되었습니다. 일반인에게는 전혀 적용될 수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예수님께 적용된 예를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세 부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으셨습니다. 간단 간단히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요단강에서 올라올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03:17).

둘째는 베드로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전도하러 가셨을 때입니다. 제자들과 대화 중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16).

셋째는 이방인 백부장입니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27:54).

 

주님은 화평케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이거 완전 대박 아닙니까? 큰 복 중의 큰 복입니다.

왜 큰 복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다는 말은 우선 예수님과 일종의 동급(?)이 수준이 되기 때문입니다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대통령 자녀나 측근들, 혹 피붙이들 권세가 어떠했습니까? 5공화국, 6공화국,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때의 아들들, 측근들이 나라를 마음대로 주물렀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권력의 아들이나 측근들보다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아들의 신분으로 불린다면 이야말로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면 이는 내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또 믿음의 형제들에게도 인정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이 호칭은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는 것과는 별개로 받는 또 다른 복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복인 데 비해, 아들의 칭호를 받는 것은 구원과는 또 다른 복으로서 주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오늘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듣는 여러분, 구원의 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대단한 복입니다. 그러나 이왕 교회 생활에서 충성하려면 권세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위치에 서서 일도 하여야 합니다.
이런 자리에 세워지는 것은 물질이나 학식이나 세상의 배경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사랑하고 섬기려는 열정으로 되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탄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아십니까? 분쟁을 만들고 평화를 깨는 일입니다. 오해를 만들어 내고 사이를 벌려 놓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는 자는 사탄이 뿌려놓은 불화의 잡초들을 하나하나 제거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마 0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안이숙 여사의 글 가운데 그럴 수도 있잖아요? 라는 글 일부를 소개하면서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화평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줍니다.

 

못 생기고 모양 없다고 흉보지 마세요. 그를 지으신 분이 그렇게 만드신 것일 테니까. 그럴 수도 있잖아요. 화 잘 낸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일 때문에 피곤하고 신경이 늘어지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늘 상 늦는다고 수군거리지 마세요. 일이 많아 바쁘고 전화 통화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설사 한가했더라도 시계를 보지 않다가 그럴 수도 있잖아요.

욕심이 많다고 욕하지 마세요. 매번 다른 사람 생각을 미처 못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무식하여 아무것도 모른다고 멸시하지 마세요.

배울 수 있는 길이 제한되어 못 배웠으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인색하고 사랑이 없다고 미워하지 마세요. 경제에 시달릴 때를 염려하여 절제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이제부터 가정의 화평, 교회의 화평, 직장의 화평, 이웃과의 화평과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깨지는 일이 없도록 삽시다이제부터는 어떤 상황이라도 화평을 만드는 사명자로 삽시다. 나로 인해 화평이 조성되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