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이름 있는 한 고등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한 교포의 아들이 하버드 의과대학에 지원하였습니다. 결과는 그만 불합격이었습니다.
자식 교육에 목숨을 거는 한국 어머니가 그 학교에 가서 전 과목 A를 받은 아들이 왜 떨어졌느냐고 항의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교 당국에서 당신의 아들은 고등학교 성적은 미국에서 최고입니다. 성적만으로는 당연히 합격입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3년을 다니는 동안 한 번도 헌혈한 적이 없습니다. 의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남을 도우려는 마음 없이 지식만 가지고 어떻게 의사가 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불합격 시켰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크게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형벌과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을 가지고 살면 이웃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는 심판이 있습니다(약 02:13).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을 중심으로 「나는 긍휼이 여기는 자입니다.」라는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긍휼이 무엇입니까? |
0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矜恤)이라는 단어는 요즘 그리스도인 외에는 잘 쓰지 않습니다. 그러면 먼저 긍휼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헬라어의 원문(ἐλεήμων 엘레에몬) 의미는 동정, 불쌍히 여김 이런 뜻으로서 27회 정도 사용되는 말입니다.
긍휼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람의 긍휼이 다릅니다. 사람의 긍휼은 그냥 동정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사랑과 은혜와 용서가 포함되는 동정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말로 표현하면 가엽게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 라는 뜻입니다. 조건 없는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나타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인간의 양심 가운데 있는 인류애라는 것 때문입니다.
약한 자를 보면 도와주고 싶은 측은지심입니다. 믿지 않아도 이런 마음으로 남을 도와주고 사랑을 베푸는 분이 더러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지 말고 받은 은혜를 나누며 살라는 의미에서 자비를 많이 강조합니다.
불신자나 타 종교가 말하는 측은지심이나 자비심은 성경이 말하는 긍휼과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의 긍휼은 그 목적이 자기 의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반면 성경이 말하는 긍휼, 오늘 말씀의 긍휼은 그 출발점이 내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로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함입니다.
기독교의 초점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이 바로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긍휼의 증표로서 친히 십자가의 사랑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아버지, 그 집에서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 사람이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추수할 곡식이 많아서 낫이 필요하니 급히 좀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마침 아들이 이 광경을 보고는 아버지가 어떻게 하시는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웃에게 선뜻 낫을 빌려줍니다.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며칠 전에 제가 낫을 빌려 달라고 할 때 저 집에서는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빌려주십니까?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다고 우리도 빌려주지 않으면 그것은 복수하는 거란다. 내가 필요할 때 당신은 내게 낫을 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낫을 빌려줍니다. 하고 말하면 그것은 증오이다.
그러나 거절당한 것을 다 잊고, 과거와는 아무 상관 없이 그냥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주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란다. 긍휼은 복수가 아닙니다. 사랑과 관용과 용서입니다.
엡 02:0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김삼일 가족 여러분, 누구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까? 이 순간에도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 관점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도 합니다. 남의 죄와 허물을 들춰내면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것은 바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의 입장이 되고,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2. 나는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까? |
0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옛날 로마인들은 덕목으로 지혜, 정의, 절제, 용기의 네 가지를 말했습니다. 긍휼은 그들의 덕목 속에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도 타인에 대하여는 긍휼히 여기는 개념이 매우 약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긍휼과 자비를 외면하였습니다. 비판과 정죄하는 일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과 로마인이 이웃을 철저하게 외면한 긍휼이 얼마나 가치 있는 덕목인가를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잘 알고 지킨다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 가장 강하게 지적하신 일이 바로 긍휼의 결핍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세관에서 일하던 마태를 제자로 부르실 때입니다.
마태의 집에서 식사하시자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0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성 프랜시스(St. Francis 1182~1226)는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도시 아시시(Assisi)에서 태어난 청빈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이 분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나환자가 프랜시스를 찾아와서 하룻밤을 재워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 얼굴과 손을 보니 모두 문드러져 있었습니다. 또 해어진 신발 사이로 상한 발가락이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프랜시스는 자기 옷을 벗어 그를 감싸 안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따뜻한 물로 진물 나는 그의 상처를 정성껏 씻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극진히 대접한 후 하나밖에 없는 한 칸 방에서 함께 잠을 잤습니다. 그날 밤 프랜시스의 꿈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프랜시스의 손을 잡으며 프랜시스야, 오늘 대접 잘 받았다. 고맙다. 깜짝 놀라 프랜시스가 잠에서 깨어보니 같이 잠을 자던 나환자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향기만 진하게 났다고 합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씌울 때도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김삼일 가족은 그런 상황을 만날 때 어떤 마음을 품습니까? 미움과 증오의 감정이 마음에 자리를 잡을 것입니다. 긍휼과 사랑의 마음은 그만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마귀의 종노릇에 얽매일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마 0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우리를 긍휼하게 여기셔서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그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긍휼히 여겨주심을 실천하십시오.
3.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의 복을 받습니다. |
0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 하나님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신다는 조건적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당연히 이웃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나의 처지에서 조건이 없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우리에게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도록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얼마든지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요즘 시대를 눈물이 점점 말라가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긍휼이 점점 메말라가는 시대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긍휼의 흔적들이 줄어들고 있음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무게 있게 받읍시다.
김삼일 가족은 이 말씀을 따라 긍휼함을 받는 일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긍휼을 베푸는 일에 마음을 두십시오. 긍휼을 베풂으로 복을 받은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992년 4월 29일 미국 LA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은 한인 교민들에게 큰 충격과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한인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로드니킹이라는 한 흑인을 백인 경찰관들이 무리하게 체포하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체포 장면이 폭로되면서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불만에 불을 지른 결과가 되었습니다. 특히 경찰들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무죄 판결을 내리자 흑인들의 항의가 폭동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이 폭동으로 많은 한인 상가와 한인 타운이 약탈과 방화의 큰 피해를 받았습니다.
그 원인은 폭동이 일어난 곳이 한인 타운과 가까운 곳입니다. 거기다 평소에 흑인들이 한인 교민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습니다. 흑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흑인들을 무시하고 돈을 많이 번 후에는 인색하게 구두쇠 노릇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폭동의 혼란 중에서도 피해를 보지 않은 한인 상가가 몇 곳 있습니다. 이런 가게들은 오히려 흑인들과 주민들이 가게 앞에서 보호하고 지켜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가게 주인들은 평소에 어려운 흑인들을 긍휼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흑인 중에 돈이 없어서 장례식을 걱정하는 것을 알고 찾아가 장례식을 치르게 해 주었고, 가난한 집 아이는 자식처럼 돌 보고 공부를 시켜주었습니다.
흑인들이 고마움을 기억하고 이 폭동의 혼란 가운데서도 자원해서 그런 가게들은 골라서 보호해 주었다고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입니다.
긍휼을 베풀면 그만한 긍휼을 받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 사랑의 긍휼을 베푼 것이 이런 큰 환난 앞에서도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된 좋은 예입니다.
약 0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이 없는 곳에는 생명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불쌍히 어김이 없는 곳에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참된 긍휼이란 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정말로 포근히 안아 주길 원합니다. 편안하게, 진심으로 따뜻하게 사랑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안아 주는 사람이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마음으로는 다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김삼일 가족도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안아 주십시오. 그러면 그분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아 주신 것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안으십시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자녀로 세움을 받고 교회를 믿음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은 증거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작은 글이 하나 있습니다. 퇴근길에 남편이 불쑥 노란 국화꽃 한 다발을 내밀었습니다. 당신한테 주는 가을 편지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아내는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아무 이름도 붙지 않은 날,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아닌 날, 꽃을 선물 받아보기는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꽃병에 꽂아두자 남편도 흐뭇해합니다. 다음 날 퇴근길에 남편은 또 꽃을 사 왔습니다.
문제는 그 후에 생겼습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퇴근하는 남편의 손엔 어김없이 국화 꽃다발이 들려 있었습니다. 마침내 집안이 온통 꽃으로 가득 찼습니다.
꽃밭이 되었습니다. 꽃을 둘 마땅한 장소도 이제는 없게 되었을 무렵 아내에게 의심이 생겼습니다. 혹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꽃을 사 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오늘도 꽃을 사 오면 꼭 따져봐야지 하고 잔뜩 별렀습니다. 다행히도 이날은 꽃을 사 들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꽃 대신 옷에 넣는 고무줄과 옷핀, 좀약을 좀 사 들고 들어왔습니다. 아내는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남편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더는 참을 수 없는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 도대체 왜 그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그 내막을 이야기합니다. 얼마 전부터 회사 앞 골목에 할머니 한 분이 어린 손녀를 데리고 나와 장사하는데, 처음엔 국화꽃을 팔더니 사흘 전부턴 목판에 고무줄, 옷핀 같은 걸 늘어놓고 팔았습니다. 남편은 그것이 너무 딱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사 왔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이 긍휼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잊힌 곳을 향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아직 눈물 자국이 마르지 않은 사람을 찾아가서 껴안고 사랑과 긍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긍휼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삶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1961년 4월 12일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인 소련의 유리 가가린(Yurii Alekseevich Gagarin, 1934,3,9~1968,3,27) 공군 소령이 보스토크 1호로 명명된 우주선을 타고 1시간 29분 동안 우주의 공간을 유영(遊泳)하였습니다. 지구를 한 바퀴 돌고 귀환하였는데 그가 유명한 두 마디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도 회자 되는 말입니다. 지구는 푸르다. 우주 어디에도 신은 없더라.
그로부터 10년 후인 1971년 7월 30일 미국의 아폴로 15호를 타고 달에 다녀 온 제임스 어윈(Jams B. Irwin, 1930,3,17~1991,8,8)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월면차(月面車)를 이용하여 달 표면을 시속 11km로 9,6km를 주행하였는데, 역시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우주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달을 주행하면서 우주 모든 곳에 가득 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황홀한 지구를 바라보면서 요 03:16절을 반복하여 묵상하였습니다. 이후 어윈은 나사에 사표를 내고 복음 전도자로서 20년간 세계를 복음으로 누비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번은 한 공산주의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고 난 뒤 한 학생이 질문을 합니다. 소련의 우주인들은 달나라에 다녀와서 아무리 살펴봐도 하나님은 안보이더라고 하는데, 당신은 어째서 우주에 나가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고 합니까?
이에 어윈은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답을 대신하였다고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오늘 우리는 성경 어느 곳에 있는 말씀보다 더 위대한 말씀을 살펴보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보는 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만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전도하는 데 놀라운 결과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복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1.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
0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이란 세탁이 되어서 깨끗한 옷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새것이 아니라 더러워진 것이 깨끗하게 씻어진 것을 말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청결은 더러워진 마음, 찌들어진 마음, 구부러진 마음, 변질된 마음이 회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씻어진 상태입니다.
마음이 오염되지 않고, 탐욕스럽지 않고, 깨끗하고,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청결한 마음에 도달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죄로 얼룩진 마음을 씻어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탁기에 빨랫감을 넣고 돌리지 않습니까? 세제가 풀어지면 묵고 찌든 때가 아닌 이상은 깨끗하게 세탁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 묵고 찌든 때라면 손으로 박박 비비면 됩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 죄의 요소들은 말씀이 들어와서 세제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엡 05: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의 온갖 죄악으로 인해 찌든 마음을 깨끗하게 씻는 방법을 안내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심히도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을 깨끗하게 세탁하여야 합니다. 계속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이 내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를 하도록 말씀을 담아야 청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왜 때가 묻고 더러워지는 것입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는데, 오히려 반대의 생활을 하게 됩니까?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인 예수님의 말씀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이 손도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보고는 더럽고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비난을 한 일이 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렘 17:09)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더러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마음을 더럽게 하는 구체적인 요소들을 땅에 있는 지체라고 하면서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즉 우상숭배라고(골 03:05) 하였습니다. 여기에 다시 마음을 더럽게 하는 요소를 추가를 합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01:29~31).
이런 깨끗하지 못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더러워진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마음이 청결한 수준만큼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마음입니다. 기독교는 속사람이 변화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2. 나는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까? |
0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인생의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마음의 청결입니다. 우리의 당면한 문제를 푸는 길은 마음의 청결에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진단해 보십시오. 내가 보기에는 다 바른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다릅니다.
마음이 청결해지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주님께서 주신 기도문 가운데 한 부분을 읽겠습니다.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 부분은 악한 풍습과, 악한 마음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혹 자신을 좀 의롭다고 여깁니까?
오히려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이스라엘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행적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고, 도덕적으로 훌륭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식적인 모습에 힘을 쏟을 뿐 속은 탐욕이 가득한 그들에게 엄히 책망을 하십니다.
마 23:27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우리는 옷에 묻은 때를 제거하려면 주로 계면활성제나 표백제를 사용합니다. 비누와 같은 계면활성제는 때를 지우고, 표백제는 화학 반응을 통해서 때를 분해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에 있는 더러운 죄를 씻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씻어낼 수 있습니까? 성경은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는 방법 밖에 다른 방편은 조금도 안내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죄는 어떤 짓거리를 해도 제거되지 않습니다. 자선 사업을 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고행을 한다고 제거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만 됩니다.
예수님은 왜 청결해야 할 것을 계속적으로 말씀합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레 11:44),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시 24:03,04).
청결은 나와 하나님 관계를 두텁게 하여 은혜의 바다에 깊이 들어가게 하는 요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질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청결에 대해 좀 오해를 합니다. 청결을 더럽지 않고 깨끗한 것으로만 이해하여 악한 것들을 마음에서 비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 해결책이 아닙니다.
비우고 버리려는 관점에서 요즘 인기를 끄는 것이 불교의 템플 스테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간으로 찾아가서 절에서 시키는 방법대로 명상을 하면서 마음을 비우는 노력을 합니다. 마음을 아무 것도 없는 무, 공의 상태로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과연 옳은 방법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비우려는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비움과 함께 채움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청결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지만 예수님은 비워야 할 것은 비우되, 그 다음에 말씀으로 가득하게 채울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청결하게 함에 있어서 스스로 허물을 씻으려는 노력보다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의 청결을 위해서 거짓을 제거하여야 합니다. 남을 속이면 내가 이기는 걸로 아는 착각이 문제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은 곧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복을 받는 길에서 이탈하는 행위입니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것 같고, 위험한 것 같아 보여도 결국은 성공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반면 거짓은 나를 죽이는 무서운 독약과도 같습니다.
3.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보는 복을 받습니다. |
0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팔복의 출발이 심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심령(pneu'ma)은 곧 영혼(spirit)으로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마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의 주체는 육체가 아니라 심령, 곧 마음입니다. 육체는 약하고 병들어도 견딜 수 있지만, 마음이 약하고 병들면 결코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마음이 청결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08절을 같이 읽읍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말씀입니다. 믿음의 대박이 터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 때 유대인들 세계에서 누가 가장 복 받은 사람이라고 여겨집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아주 모범적인 삶을 살았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금식과 기도도 많이 하였고, 구제도 많이 하여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정도의 믿음처럼 보였으며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들이 사회적으로 그렇게 성공한 것이 믿음생활을 잘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한 번도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화를 당할 사람들, 저주받을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그들을 향하여 화 있을 진저라고 선언하신 말씀이 무려 8번이나 나옵니다. 왜 예수님은 화를 당할 사람들, 저주 받을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외식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하는 모습을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8). 예수님은 이런 영적 불감증 상태로는 하나님의 은혜는 고사하고, 하나님과 영적 관계가 단절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적 눈으로 보고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엄청난 복을 받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영이시지 않습니까? 뭐가 보인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몇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①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 자녀로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②영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눈에 보인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마음이 더러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이제는 보는 것입니다.
③하나님 편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인생의 문제들이 풀리는 실마리가 됩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채워져 있어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자연의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느끼고,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권태로운 삶 대신 매일 매일의 은혜생활이 하나님을 보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특별히 신비스러운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삶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깨닫고 그분 안에 있음을 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시 01:01 복 있는 사람은(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0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만날 수만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만 하나님을 만나려는 방법이 그러나 무속적이고 기복적인 경향이 많습니다. 위험합니다. 황홀경 즉 무아지경이나 혹은 꿈이라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역시 대단히 위험합니다.
탈무드를 보면 천국 한쪽 구석에 기도는 못했지만 울 수 있었던 사람, 눈물을 흘렸던 사람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일단 눈물을 흘린 사람은 그 만큼 가슴과 마음이 세척된 청결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눈물 흘리며 마음을 씻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비누로는 몸을 씻고, 눈물로는 마음을 씻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말씀으로 마음을 씻어서 청결한 자가 됩시다.
야곱은 물질에 대한 욕심, 자녀에 대한 욕심 등 욕심이 보통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얍복강변에서 하나님과 일대 일로 마주하면서 다 포기를 합니다. 자녀를 건네 보내고, 재산을 건네 보내고 홀로 남아서 기도하는 가운데 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었음을 알 때 마음이 청결해졌습니다. 드디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말입니다.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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