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권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는 모습을 표현할 때 노래한다고(Birds are singing)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새가 운다고 합니다. 새들만 우는 것이 아니라 벌레도 울고, 매미도 울고, 심지어는 주먹까지도 운다고 합니다.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고 힘들게 살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이 울음이 우리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인은 일본 강점기를 지나면서 살기 위해 이를 악물었고 또 울음도 참아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남자는 울지 않아야 남자답다는 생각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남자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넘어져서 울고 들어오거나 싸워서 울고 들어오면 어른들이 이렇게 말을 해 줍니다.
뚝, 남자는 우는 게 아니야. 남자가 울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국민 정서 속에 자리 잡은 결과입니다. 이런 정서 아래서 전자 정보 산업이 발달하고 워낙 생존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이제는 눈물이 메마르고 말았습니다.
울 수 있는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졌습니다. 정서를 돌보지 못해 감정이 메말랐다고 할까요? 눈물샘이 마르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환경을 따라 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눈물이 필요하고 눈물이 나와야 안구가 건강해집니다. 만일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죠? 안과에서 처방받아 인공 눈물을 사서 눈에 넣어야 합니다.
눈물은 육체에만 유용한 게 아닙니다. 정신 건강에도 필요합니다. 눈물은 마음을 정화하는 효력이 있습니다. 믿음 생활하는 성도는 더욱 눈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눈물이 메마른 사람에게 애통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나는 애통하는 자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함께 우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나는 애통하는 자입니까? |
04 애통(哀痛)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를 놓고 애통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 애통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는 보통의 울음이 아니라 크게 통곡하는 것을 말합니다. 초상집의 상주들이 슬프게 우는 울음과 같은 상태 말입니다.
한 마디로 상한 마음을 의미한다고 할까요? 상한 마음은 산산조각이 난 마음, 여러 갈래로 찢어진 마음으로서 애통이 바로 상한 마음에 속합니다.
우리가 애통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3가지의 애통이 있습니다. 자연 애통, 세상 애통, 거룩한 애통입니다. 예수님은 이 가운데 거룩한 애통이 우리의 몫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명하시는 애통은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그 마음이 산산이 조각날 정도로 찢어지는 아픔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통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관계가 깨지는 데서 오는 실망이나, 일생일대의 사업이 실패하여 겪는 애통, 자기 욕망에 근거한 고통은 주님께서 명하시는 애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면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애통해야만 합니까? 주님께서 명하시는 애통은 자신의 허물을 탄식하고, 자신의 죄를 탄식하는 슬픔입니다.
즉 진한 회개의 슬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크게 울어야 할 주제가 바로 죄에 대한 일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죄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삶을 병들게 하고 함정과 올무에 걸리게 합니다. 인간관계를 깨뜨리게 하고 마음을 불안에 빠뜨리게 하고 기쁨을 송두리째 빼앗아 갑니다.
어떤 사람이 죄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는 당신에게 손님으로 들어오고 다음에는 그 죄가 당신과 친구를 맺고 마침내 서로 좋아하게 된다.
죄는 당신을 섬기고 당신에게 기쁨을 약속한다. 그러나 죄는 종의 위치에서 주인이 되고 폭군이 되어 파괴자가 된다. 죄는 언제나 자유로 시작하여 파괴와 노예로 끝낸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한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한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입니다(눅 18:13). 이 사람은 사람을 속이고 강탈하다시피 하여 재산을 모은 부정한 자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죄인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누가 그 재산을 내놓으라고 한마디 말도 안 했습니다.
이 사람이 성전에 들어서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는, 내가 무슨 면목으로 하나님께 복을 구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감히 앞자리로 가지 못하고 뒷전에 서서 가슴을 치며 애통의 기도를 드립니다.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회개의 울음과 애통하는 모습은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옵니다. 세상 사람은 이 세리와 같은 회개의 울음, 애통의 울음보다는 향락의 웃음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길은 눈물의 골짜기가 될 것입니다. 이에 솔로몬은 우리에게 애통하는 자의 환경에 동참할 것을 권합니다.
전 07:0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0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0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되….
우리가 멀리 보기 위해서 망원경을 사용합니다. 아주 작은 것을 보기 위해서는 현미경을 사용합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몸 안은 내시경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죄의 속한 부분은 볼 수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기 때문에 아무리 깨끗한 것처럼 보여도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죄들을 다 보십니다. 우리도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의 죄를 보아야 하고 보았으면 애통하는 눈물로 정리하여야 합니다.
2.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임합니다. |
0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팔 복에서 참으로 복된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시면서 그 첫 번째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애통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며 우는 사람이 복되다는 말씀은 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애통해야 한다는 이 말씀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애통하게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누가 애통을 좋아하겠습니까?
그저 편하게 사는 게 행복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니 이는 놀라운 반전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떤 복을 구하십니까? 물론 세상도 우리에게 행복을 선물해 줍니다만 세상이 주는 행복은 일시적입니다. 그 수명이 대단히 짧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복인지 알고 살아야 합니다. 재물도, 명예도, 지식도, 권력도 가지면 좋습니다. 이런 것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 속한 이 모든 것은 다 문화의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나쁜 것이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잘 활용하면 아주 유익합니다. 비록 일시적인 것이겠지만 누가 싫다고 하겠습니까?
다시 04절을 읽읍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이 말이 중요합니다.
제가 예수님의 팔 복을 마지막까지 계속 강론할 것인데 이 팔 복을 보면 같은 반복되는 형태의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부분을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친히 복이 있다고 선언하시는 이상 이 말씀을 크게 여기고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 예수님이 행복의 열쇠임을 아는 사람, 천국의 소망으로 사는 사람, 세상의 것이 좀 모자라도 하늘에서 받을 복을 내다보는 사람이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1.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크신 은혜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2.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이 세상의 권세자들 날 부러워해 성령 충만 받은 것을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3.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부귀영화 부럽지 않네. 예수님의 신부 될 것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4.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하늘나라 천군 천사 날 부러워해 영원토록 누릴 영화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세상 사람이 혹 우리를 부러워합니까? 부러워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천국 소망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우리를 진정 복된 사람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왜 울고 있는 사람에게 복되다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 당시에 눈물을 꼭 흘려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애통의 눈물을 외면하였습니다.
애통의 길보다는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에 몰두함으로 눈물이 실종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에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애통해야 할 때 애통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비극입니까? 애통해야 할 때 애통하면 이보다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우리 김삼일 가족의 환경을 진단해 봅시다. 감정을 잃어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형제가 아파해도 그건 나와 상관이 없는 일로 여깁니다.
오히려 상처받고 아파하는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듭니다. 정죄하고 판단해서 더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애통은 진정한 복으로 나아가는 코스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3. 애통하는 자는 위로의 복을 받습니다. |
0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사람이 받는 복은 위로입니다. 위로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수님 곁으로 부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죽음에서 살려주셨고 지금도 각종 병에서 치료로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별명이 위로자입니다(눅 02:25). 성령님의 별명도 위로자입니다(요 14:16).
요즘 사람들 심리 상태가 어떤지 아십니까? 애통을 아예 싫어합니다. 그런데 애통과 눈물이 없으면 위로도 없고 기쁨도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눈물을 조금도 흘리지 않고 기쁨을 얻으려 하니 기쁨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많이 앓고 있는 병 가운데 우울증이 있습니다. 이 병의 증세는 여간해서 울지 않습니다. 눈물의 정서가 없어서 생기는 병입니다. 실컷 울도록 해 주면 고쳐지는 병입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마지막엔 죽음을 택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주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위로의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주님의 위로 이것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풀리고 안심이 됩니다. 때로는 사람의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약간의 위로는 될 수 있어도 안심할 정도의 위로는 못 됩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생긴 분규와 여러 가지 문제로 몹시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문제가 수습되는 복을 체험한 후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고후 01:0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0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 시로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애통은 복으로 나아가는 통로임을 잃지 마십시오. 주님의 위로는 문제가 수습되는 종착역입니다. 우리가 인생길에서 만나는 여러 아픔의 일로 고통을 겪습니까? 결론은 주님의 위로로 마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못하면 애통은 공연한 고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눈물의 애통은 우리의 영혼에 내리는 생명수와 같습니다. 주님의 위로는 평안이고 생명수입니다. 애통과 눈물이 메마르면 기쁨도 위로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요즘 힐링(healing)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본래 힐링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중점으로 하신 일, 세 가지가 있습니다(마 04:23, 09:35).
첫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고, 둘째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고, 셋째는 영의 병과 육의 병을 고치는 일입니다. 이때의 병을 고치는 일이 바로 힐링입니다.
우리 모두 힐링을 받기 위해 애통의 자리로 갑시다. 힘들고 좀 아파도 애통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애통의 자리를 피하지 맙시다. 죄에 대해서 기꺼이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합시다. 그리고 회개의 자리로 갑시다. 이곳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주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 66:0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모원단장(母猿斷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유래는 옛날 중국 진(晉)나라 환온(桓溫)이 촉(蜀)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싣고 가던 때였습니다. 양쯔강 중류의 협곡 삼협을 지날 때 한 병사가 원숭이 새끼를 한 마리 잡아 왔습니다.
그런데 어미 원숭이가 붙잡힌 그 새끼를 따라서 슬피 울며 백 여리를 뒤따라왔습니다. 배가 강어귀가 좁아지는 곳에 이를 즈음 몸을 날려 새끼가 붙잡혀 있는 배 위로 뛰어들었습니다.
어미 원숭이는 자식 구하려는 일념으로 애를 태우며 달려왔습니다. 따라서 배에 오르자마자 안타깝게도 지쳐서 죽고 말았습니다.
배에 있던 병사들이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았더니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창자를 끊고 말았습니다.
배에 있던 군사들이 놀라 환온에게 보고했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환온은 새끼 원숭이를 풀어주고 새끼 원숭이를 잡아 온 병사를 매질한 후에 내쫓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모원단장입니다. 어미 원숭이의 창자가 다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애통하는 자는 주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무작정 슬퍼한다고 복을 받는 게 아닙니다. 죄의 문제도 해결하고, 교회를 위해 충성하겠다는 각오의 아픔도 토해 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애통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히 05:0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지금은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이웃을 위해서도 애통해야 할 때입니다. 전도의 대상자를 놓고 더욱 애통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부터 울보남이 됩시다. 울보녀가 됩시다. 애통의 자리에서 모원단장의 각오로 주님을 만납시다. 그리고 주님의 위로를 받고 새 힘을 공급받아 살아갑시다.
'은혜의 강단 > 예수님의 팔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팔 복 ⑥] 나는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마 05:08). (0) | 2019.01.12 |
---|---|
[팔 복 ⑤] 나는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다(마 05:08). (0) | 2019.01.12 |
[팔 복 ④] 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마 05:07). (0) | 2019.01.12 |
[팔 복 ③] 나는 온유한 자입니다(마 05:05) (0) | 2019.01.12 |
[팔 복 ①] 나는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마 05:01~03). (0) | 2019.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