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9년 말씀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삶(창 24:59, 35:08)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9. 1. 12.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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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드보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둘 나옵니다.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서 첫째 드보라는 사사시대 제4대 사사로 40년간 활약한 선지자 출신 드보라입니다(04:04, 05).

이스라엘 역사에 여자로서 보기 드문 활약을 하였고, 그 시대에 이스라엘의 어머니라는 소리까지 들은 귀한 인물입니다(05:07).

드보라의 뛰어난 활약으로 인하여 오늘날에도 좀 정의감이 있고 열정이 넘치는 여자분 가운데 드보라라는 별명을 즐겨 사용합니다.

 

또 한 사람 드보라는 사사 드보라와는 달리 그저 조용하게 지낸 인물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런 인물이 있었는지조차 모릅니다.

일명 리브가의 유모라고 불립니다. 이 드보라는 성경에 행적이 두 번 나옵니다. 처음에는 이름은 없이 유모로 소개되었고(24:59) 임종 현장에서 이름을 드보라라고 밝힙니다(35:08).

오늘 말씀은 자기 이름을 내걸고 산 것이 아니라 유모라는 직책으로 출발한 드보라의 일생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삶으로 정했습니다.

 

 

1. 드보라는 리브가의 유모로 살았습니다.

 

창 24:59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리브가의 유모가 임종의 현장에서(35:08) 그 이름이 드보라로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리브가와 그의 유모 이렇게 나옵니다.

아무리 유모라도 이름은 있는데 왜 드보라(דְּבוֹרָה)의 이름을 생략합니까? 아브라함 가문의 구속사 이야기 즉 메시아 가문에 드보라가 참여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드보라가 어떤 인물인지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후 그의 형제 나홀도(11:26) 어느 시점엔가 우르를 떠나서 밧단 아람(하란)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여덟 아들을 낳았는데 마지막 아들 이름이 브두엘입니다(22:22).

이 브두엘이 결혼하여 낳은 자녀 중에 딸 이름이 리브가입니다. 성경은 구속사와 직접 관계가 없는 일은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브두엘의 아내이며 리브가의 어머니에 대한 이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리브가가 이삭과 결혼하기 위해 떠나는 과정에서 아들 라반과 함께 그의 어머니라고만 나옵니다리브가가 가나안으로 가는 행렬에 한 여자가 따라갑니다.

몸종이 아니라 나이가 좀 든 여자인데 그 여자를 리브가의 유모로 소개합니다이 유모는 일찍 리브가의 아버지 브두엘의 집에 종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이 여자는 리브가가 태어난 후 유모가 되었습니다. 또 리브가가 이삭을 만나기 위해 가는 과정에서 6km가 넘는 그 먼 가나안으로 리브가를 따라갔습니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리브가를 섬기기 위해 따라가야 할 정도라면 세상 신분으로는 매우 불행한 처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리브가의 유모 출신 드보라가 먼 남쪽 가나안 브엘세바로 옮겨가서 삽니다(24:51, 59, 61). 하란과 브엘세바는 생활환경이 전혀 다른 곳입니다.

 

브엘세바는 가나안에서도 남쪽 지역으로 메마른 광야가 70% 이상을 차지합니다. 드보라는 이런 곳에 리브가를 따라와서 삽니다.

자기가 스스로 이주해 온 것이 아니라 주인 브두엘이 너는 이제부터 내 딸 리브가를 따라가서 잘 돌보고 섬기라는 명령을 따라왔습니다.

드보라의 처지를 생각해 봅시다. 옛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부유층이나 저명인사들은 유아 시절부터 돌보아온 유모를 신부의 시중을 위해 딸려 보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드보라(דְּבֹרָה)의 이름 뜻은 꿀벌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이런 이름을 지어 줄 때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자로 살기를 원한 것 같습니다.

꿀벌 같은 여자, 좋은 이름 아닙니까? 밧단 아람 출신 드보라를 세상의 관점으로만 보지 맙시다. 그렇게만 보면 불행한 여자 중의 하나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삶에서 주인공이 아니어도 그 삶이 목적이 있는 삶, 역사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였다면 그것은 귀한 일입니다.

 

드보라가 그런 역할을 하였습니다. 드보라의 행적을 보십시오. 리브가를 위한 유모의 삶을 살면서 리브가를 착하고 귀한 신부로 키워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 이삭의 신붓감을 찾아 하란에 왔을 때 리브가의 복된 마음을 알아보고 바로 이삭의 아내로 정했습니다. 이들은 성전 문지기 같은 조연의 삶으로 족했습니다.

 

시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2. 드보라는 이삭 가문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창 35:0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창세기 35장에는 세 번의 죽음이 나옵니다. 드보라와 라헬과 이삭인데 그 첫째 죽음이 리브가의 유모입니다. 35:08절은 대단한 가치를 지닙니다.

리브가의 유모 이름을 드보라로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드보라가 벧엘에서 죽어 야곱이 장례를 치러주고 있습니다. 35:08절을 잘 보십시오.

야곱이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를 장사하는 장면에서 슬픔에 겨워 통곡합니다. 얼마나 슬펐으면 상수리나무를 알론바굿(אַלּוֹן בָּכוּת)이라 칭하겠습니까?

 

알론바굿은 상수리나무를 의미하는 알론과 눈물 흘린다. 라는 뜻을 지닌 바쿠트가 합쳐진 말로서 통곡(痛哭)의 상수리나무라는 뜻입니다.

드보라는 리브가를 따라 하란에서 브엘세바로 이주해 온 밧단 아람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드보라가 왜 벧엘에서 죽었으며 야곱이 그 장례를 치릅니까?

 

성경은 이 일에 대해 일절 침묵하지만, 드보라가 죽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이삭은 리브가와 40세에 결혼하였습니다(25:20).

리브가의 결혼 나이를 당시의 풍습으로 보아 13~14세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삭과는 나이 차이가 제법 많이 나는 편입니다. 이삭과 드보라의 나이가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창 35:29절에서 이삭이 180세 되어 나이가 많아 죽었습니다이삭의 죽음도 나오고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도 죽어 야곱이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러줍니다.

리브가의 행적은 일절 나오지 않습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족장 부인이면 그의 죽음에 관해 최소한 행적이라도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행적은 없고 아주 간단하게 조상들이 묻혀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 지냈다고만 전해집니다(49:31).

 

김삼일 가족 여러분, 리브가와 드보라에 대한 행적을 성경은 침묵하지만, 성경 안팎을 따라서 한번 추적해 봅시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을 받아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샀고 이어서 어머니의 세밀한 도움으로 아버지로부터 축복권까지 가로채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야곱에게 속임 당한 것을 알게 된, 에서는 마침내 야곱을 죽이려는 마음을 가슴에 한으로 품었습니다(25:29~34, 27:01~23).

 

창 27:41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는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이를 알아차린 리브가가 야곱을 에서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친정인 밧단 아람으로 결혼식을 핑계로 도피시킵니다(27:41~44).

이후 리브가는 헤어진 야곱과 소식을 주고받기 위해 자기의 유모였던 드보라를 밧단 아람의 야곱에게 보내었습니다(Delitzsch).

 

그러나 안타깝게도 리브가는 곧 만나게 될 줄 알았던 야곱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20년을 지내는 동안 죽었기 때문입니다.

밧단 아람으로 돌아간 드보라, 비록 그곳이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지만 이미 자기는 리브가를 따라 가나안의 이삭 가문에 들어온 리브가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드보라는 손자뻘이 되는 야곱의 밧단 아람 생활 20년을 옛날 리브가를 키우던 그 심정으로 정성껏 뒷바라지하였습니다.

그동안 야곱은 열두 아들과 딸, 디나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할머니 격인 드보라의 많은 도움을 입었습니다.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과 사이에 많은 갈등이 일 때도 드보라로 인해 눈에 안 보이는 일들을 수습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드보라가 야곱을 리브가 대하듯이 도왔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야곱이 밧단 아람 20년 세월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정에서 드보라도 야곱의 귀향에 참여하였습니다.

밧단 아람이 정든 육신의 고향인 것은 맞지만 이미 자기는 리브가를 따라서 이삭 가문의 사람, 야곱 가문의 사람이 되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는 세계에 입문하였기 때문입니다.

 

 

3. 드보라는 삶을 마친 후 기념비가 되었습니다.

 

창 35:0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 밧단 아람에서 야곱의 20년 가까운 세월을 뒷받침한 드보라가 야곱을 따라 야곱의 고향으로 들어오다 벧엘에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60세 이상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야곱은 그렇게도 그리운 어머니 리브가에 대한 기억을 그나마 이어 주던 마지막 끈 드보라의 죽음 앞에서 통곡합니다. 드보라를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는 그 나무를 알론바굿이라 하였습니다.

 

창세기에 기록할 사건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저자가 야곱이 상수리나무를 애절함과 통곡을 표현하는 표지목으로 삼은 일을 왜 기록하였습니까?

나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상수리나무를 알론바굿이라 한 것은 드보라의 삶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야곱의 가족은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의 삶을 살았고, 이삭의 가문에 들어와서 헌신하였고, 자기들에게도 깊은 사랑을 베푼 드보라를 이별하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체험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신중히 생각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현재 나의 삶이 복된 삶으로 잘 나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일입니다.

 

머지않아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육신은 땅에 묻히고 그 앞에 묘비가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묘비에 가족이 내 일생은 어떻게 새겨 줄 것 같습니까?

내 삶을 평가해 줄 그 내용에 대한 궁금증이 안 일어납니까? 저는 삶을 마친 후에 가족이 묘비에 어떤 내용을 기록해 줄 것인지 다소 궁금증이 있습니다.

 

좀 궁금하지만, 이 일은 가족들 몫입니다. 욕심이지만 단지 저는 예수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목사 이일기. 이 문구만 있으면 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부끄럽지 않은 묘비명을 새길 수 있도록 준비합시다. 많이 늦었지만 저는 지금부터 이렇게 준비하겠습니다.

묘비에는 보통 당사자의 이름과 신분 그리고 생년월일 뒷면에는 자녀의 이름을 새기는 정도입니다. 외국인 묘비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영국 극작가, 1856~1950)는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어니스트 헤밍웨이(미국 소설가, 1899~1961)는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 묘지에 있는 어느 성공회 주교의 묘비에 새겨진 아주 인상 깊은 글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좋아서 소개합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의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사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기 위해 자리에 누워 나는 문득 깨닫는다만약 내가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내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내 안의 문제다.

 

드보라는 꼭 필요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리브가뿐만 아니라 리브가의 아들 야곱과 에서도 돌보았습니다. 밧단 아람으로 가서는 리브가의 손자인 야곱의 자녀들도 돌보았습니다. 믿음의 가문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다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구약성경에 열왕기(列王記) 상하가 있습니다. 여러 왕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열왕기서는 왕들에 대해 기록할 때 이 왕은 이러했다. 저러했다고 하며 평가합니다.

그런데 평가 기준이 그가 얼마나 영토를 넓혔느냐, 그가 얼마나 많은 건물을 지었느냐, 그가 얼마나 여러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느냐? 가 아닙니다.

 

평가의 기준은 단 하나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했느냐? 입니다. 드보라의 첫 출발 신분이 유모의 삶이었기에 별 소망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좌절할 수밖에 없고 질식할 것만 같은 삶이었습니다. 자유가 없고, 별 가진 것도 없습니다. 남들처럼 가정을 이루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밝은 미래의 소망을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비관하지 않고 생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한 사람의 생애는 마지막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드보라는 믿음의 가문에 들어와서 구원의 복을 받는 삶,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복된 죽음을 맞았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어떤 환경에 처해 있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곳에 두실 때는 그만한 뜻이 있는 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서 할 일을 찾고, 거기서 보람을 찾고, 거기서 감사의 조건을 찾으면서 환경을 믿음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드보라처럼 잘 쓰임을 받는 복된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