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분이 아내에게 이끌려 억지로 교회에 왔습니다. 아내를 교회에 데려다주는 기사 노릇을 하다 이제는 뒷자리에 앉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달 정도 나왔는데 하루는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전에는 제가 잘못 알아듣는 설교를 하셨는데 요즘은 좀 알아듣는 설교를 하십니다. 설교가 많이 변했어요.
그때 목사님이 설교가 변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마음이 변화되었습니다. 성령님의 감동이 없으면 말씀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설교를 잘 듣는 길이 무엇입니까?
우선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간절한 기대감도 있어야 합니다. 태도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잘 열려 있어야 말씀이 은혜롭게 들리지, 편견으로 들으면 사람의 말로 들립니다. 심령이 막혀 있는 사람은 설교 듣는 일을 꼬투리 잡는 식으로 듣기 쉽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성령님의 일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마음이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일에는 오직 신령한 분별력이 절대 필요합니다(고전 02:14).
오늘 말씀에는 우리가 자주 듣는 씨뿌리는 비유, 4종류 밭의 비유가 나옵니다. 04~08절은 길가, 바위 위, 가시떨기, 좋은 땅의 구분이고 09~15절은 이 네 밭에 대한 신령한 해석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며 외치신 말씀을 따라 나는 좋은 땅 좋은 심령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신년주일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먼저 길가, 바위 위, 가시떨기 밭을 보겠습니다. |
0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0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0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05절을 보면 씨를 뿌리는 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씨를 뿌리는 자 앞에 정관사 ὁ(호)가 붙어 있습니다. 그, 이 사람, 저 사람 등 남성을 뜻하는데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실 때 주위에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당시 대다수 청중은 농경 문화에 살고 있으므로 예수님의 표면(表面) 의미는 잘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씨앗의 비유를 보겠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입니다. 이 씨는 흙이 단단하여 뿌리를 내릴 수 없어서 농부가 지나다닐 때 그 발에 밟히거나 아니면 새들의 먹이가 됩니다.
바위 위에 떨어진 씨입니다. 마 13:05, 막 04:05에는 돌밭으로 나옵니다. 이 씨는 잠깐 싹이 나오지만, 수분이 부족하고 자양분이 없어서 해가 뜨면 곧 말라 죽습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입니다. 이 씨는 처음에는 싹이 나서 줄기까지 되었으나 가시떨기 기운에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 시들어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저 인근에서 씨를 뿌리는 한 남자의 농사 원리를 설명하시려 함이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은 누구나가 농경사회 기본 원리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실 때는 일상의 원리보다 더 깊은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09~15절에서 그 신령하고 중요한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듣고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비유입니다.
먼저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제하십니다(11). 이어지는 12~15절 사이의 신령한 해석을 보면 굳이 설명이 필요 없지만 그래도 조금 더 부연(敷衍) 설명을 하겠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 말씀을 경청하지 않는 사람,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귀가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말씀을 빼앗아 가도 모르고 지냅니다.
마태와 마가는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생각이 부족해서, 깨닫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관심 때문입니다. 관심이 다른 곳에 있어서 말씀을 듣기는 들었는데 깨닫지를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나중에 깨달을 기회가 오기 전에 마귀가 그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 모든 책임은 결국 자기에게 있습니다.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 이런 사람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지만 믿음의 뿌리가 없어서 고난이 오니 그냥 말라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신앙인은 믿음의 뿌리가 있어야 무너지지 않습니다.
마 13장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곧 넘어지는 자라고 규정합니다(마 13:21). 말씀을 받을 때 기쁨으로 받으나 믿음의 뿌리가 없으므로 예수님 때문에 시련 당하고, 환난이나 박해를 받으면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서비스 업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서비스를 받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생활에 적응하는 곳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불편한 일을 감당하게 하시고, 때로는 언짢은 경험도 하게 하시고, 그걸 통해서 내가 믿음의 가지에 붙어 있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앗. 이런 사람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했는데 마음속에 말씀과 경쟁하는 것이 많아서 자주 시험을 만납니다. 세상 염려거리, 재물, 유혹 같은 것이 말씀과 경쟁해서 믿음의 기운을 빼앗아 버린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결실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는 데 교회 안에 이런 유형이 제일 많습니다.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앗이 어쩌면 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을 햔한 것이 복잡하면 아무래도 올무에 들기 쉽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도 이런 것에서 해방되지 못하면 계속 시험으로부터 찔림을 당할 것입니다.
2.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야 합니다. |
0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오늘 말씀에서 씨뿌리는 비유를 보면 누가는 현재의 시점과 장소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평행 본문 막 04:01~20절에는 자세히 나옵니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각 동네에서 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설교와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본 사람들 또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무리가 모여들자 갈릴리 바다의 배에 올라앉으셨습니다.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다 씨뿌리는 비유에 와서는 특별히 들으라 하십니다(막 04:03).
들으라(ἀκούω). 이 말은 듣는다, 깨닫는다. 의 명령형입니다. 이제까지 가르쳐온 방식과는 다른 특별한 주제이기에 시선을 집중시키려고 들으라 하십니다.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이 들려준 씨 뿌리는 비유는 농경 원리의 의미 외에(05~08) 다른 숨은 뜻이 있습니다. 바로 네 가지의 씨 뿌리는 비유를 08~15절 말씀으로 제가 조금 전 자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인 무리에게 네 가지 비유를 들려주신 후 바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곳에 모인 무리가 제대로 들었을 것 같습니까? 유감스럽게도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 응답을 한 사람이 없었고, 열두 제자도 그 비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습니다(09).
09절을 보면 제자들이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하여 아주 집요하게 그 신령한 의미를 묻습니다. 파종 원리야 기본 상식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려주실 때는 무엇인가 특별한 뜻이 있을 것으로 믿고 묻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신령한 세계와 신령한 말씀은 보는 눈이 있어야 하고 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런 눈과 귀가 없으면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행 02:37 절을 보면 베드로가 설교할 때 찔렸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때 그 말씀을 들은 유대인 삼천 명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반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을 흔들고 찌를 때 어찌할꼬? 라고 반응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심령의 문이 열려 있는 성도에게는 은혜의 길도 열립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무엇을 바라보는가가 중요합니다. 동시에 어떤 소리를 듣는가도 중요합니다. 기독교인은 보고 듣는 것을 통해서 신령한 세계를 보기 때문입니다.
행 0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마지막 삶의 현장에서도 스데반은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며, 신령한 음성만 듣고 있습니다.
09 제자들이 비 비유의 뜻을 물으니(ἐπερωτάω). 구하다, 질문하다 등의 강한 질문입니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어도 그 뜻을 알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사람의 인식 능력으로는 인지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받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진실한 마음으로 사모하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습니다.
사도 요한도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일곱 교회에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02:11).
3. 나는 좋은 땅과 같은 심령입니까? |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씨를 뿌리는 자가 목표한 대로 좋은 땅에 떨어지니 백 배의 결실을 하였습니다(08). 이 열매 맺음이 씨를 뿌리는 자의 목적입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이 저절로 이루어집니까? 밭이 좋아야 합니다. 좋은 땅으로 비유되는 옥토(沃土)의 심령이 단번에 형성됩니까? 두 가지의 조건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첫째 조건은 말씀을 듣기 전에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이 착하고(καλός) 좋은(ἀγαθός) 마음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꼭 좋은 마음 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인간의 부패한 옛 성품이 남아 있어 주님을 실망하게 하는 마음이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좋은 마음은 좋은 선입관(先入觀)을 말합니다. 말씀을 듣는 자에게는 필수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목사를 향하여 좋은 마음을 가지는 일입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은혜받는 일에 지장 됩니다. 부흥회나 외부의 강사를 청해서 설교 들을 때 은혜를 잘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좋은 선입관과 착하고 좋은 마음 때문입니다.
만일 설교자를 향한 좋은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그 사람이 천사일지라도 은혜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를 향한 좋은 마음은 평소에 좋은 관계에서 나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질 때 우리 목사님 설교 좋다며 자랑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착하고 좋은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비난하는 일이 먼저 나옵니다. 좋은 마음을 못 가지면 시험의 원동력이 됩니다. 마귀의 조종을 받게 됩니다. 정말로 조심할 일입니다.
둘째 조건은 말씀을 들은 후에 2단계로 진행하여야 합니다. ①들은 말씀을 잘 지켜야 합니다. 지킨다(κατέχω 카테코)는 의미는 언행일치입니다. 들은 말씀을 온전히 지키기를 원한다면 성령님의 은혜로 자신을 다듬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말씀을 굳게 지키려는 마음이 점점 무너지는 환경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흘려버리는 시대입니다. 말씀대로 살려니 신앙 양심이 괴로워서 흘려버리고 맙니다.
②들은 말씀을 한 두 번 지켰다고 바로 백 배로 결실하는 자리에까지 가지 않습니다. 결실의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 인내(ὑπομονή 휘포모네)가 꼭 필요합니다.
성경에 소개되고 주님께서 인정하신 인물은 모두가 인내라는 믿음의 덕목을 가졌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인내를 앞장세워 복된 자리에 나아갔습니다. 농부는 밭에 씨를 뿌린 후 아무리 바빠도 계절이 바뀌도록 인내합니다. 과수원 지기는 나무를 심고 열매를 딸 때까지 몇 년이고 인내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복음의 씨를 뿌리고 그것이 결실하기까지 인내합니다. 기도하며 인내합니다. 사랑의 수고를 한 후 그 사람이 변하기까지 충분히 인내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말씀을 붙잡고 끝까지 참으라 하십니다.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는 과정에 시련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비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열심을 품고 믿음으로 살아도 때로는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인내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옥토의 심령이 되기 위해서 인내해야 합니다.
약 0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 시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2019년 신령한 농사를 결정짓는 요인은 말씀의 씨앗과 심령과 신앙 환경과 그리고 신령한 농부 우리의 수고입니다. 이 중 하나라도 잘못되면 결실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병들었거나, 죽은 씨앗을 뿌려봐야 싹이 나오지 않고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면 결실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결실하는 요인은 땅입니다. 어떤 땅이냐 입니다. 말씀을 받는 성도의 마음가짐이 어떠하냐? 이런 뜻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 그대로 순종하여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성도, 말씀이 삶이 되고 인격이 되는 성도, 그래서 풍성한 수확의 주인공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2019년에는 풍년 인생을 삽시다.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받고 상 받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좋은 땅 좋은 심령 되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마음 밭은 어떻습니까? 어떤 말씀의 씨가 들어와도 잘 자랄 수 있으며, 어떤 재해와 난관과 시련이 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까? 말씀을 듣기 전에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들은 후에는 그 말씀을 지키면서 인내로 결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풍년 인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호 10:01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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