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미국에서 뉴욕과 파리 사이를 단숨에 난다면 그에게 큰 상금을 걸겠다고 광고하였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도전하였고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실패는 거의 죽음입니다
이에 조종사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 1902, 2, 4~1974, 8, 26) 대위가 프로펠러 하나 달린 단발기에 최대한 연료를 싣고 도전하였습니다.
시속 108마일로 5월 20~21일까지 33시간 39분 동안 밤새 졸음과 맞서 싸우면서 5,810km를 날아 대서양 횡단에 마침내 성공하였습니다.
이 일로 린드버그는 흔히 말하는 전설적인 비행사,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한 번은 린드버그가 파리를 방문하였을 때 일입니다.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렸는데 그때 어느 큰 담배 회사 사장이 이 기회를 이용해 자기 회사의 담배를 광고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린드버그에게 살짝 다가가 담배 한 개비를 주면서 선생님, 이것을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자세 한 번만 취해 주십시오. 그러면 사진 한 장을 찍는 대가로 5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90년 전에 5만 달러라면 대단한 액수입니다.
엄격한 믿음을 가진 린드버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세례 받은 교인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이 파리 신문에 기사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의 말을 들은 신자들이 크게 감동하고 서로 연락하여 성금 10만 달러를 모아서 린드버그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은 세상을 마치는 날까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어야 합니다(고전 10:31).
오늘은 주기도문 마지막 열 번째 시간입니다. 긴 시간이지만 잘 지내왔습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립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할 때 은혜로 주기도문 마무리되기를 원합니다.
1. 본문의 괄호 처리와 대개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
13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의 마지막 본문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를 원하는 영광송(榮光頌)입니다. 이 말씀은 주기도문의 제2 본문 누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 마태복음에는 괄호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영광송에 해당하는 부분이 괄호로 처리되었고 각주에서는 고대 사본에 이 괄호 내 구절이 없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사본 중 런던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사본(5세기에 쓰임)이나 파리의 레기우스 사본(6세기에 쓰임)에는 이 영광송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로마에 있는 바티칸 사본(4세기경)과 베자 사본(6세기경)에는 이 부분이 안 나옵니다.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여기 보면 괄호를 쳐 놓았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당시에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편집하는 분이 여기에다 삽입시켜 놓았습니다. 그래서 괄호로 묶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이 원본에 있는지 없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증명할 원본은 세상에 보존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명한 두 사본에 기록된 이상 원본에도 기록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건전한 해석일 것입니다. 성경 개역판도 이런 원리를 따라 있는 사본을 택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이 영광송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이 이미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에 나오고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사용합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비록 영광송이 원문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기도를 마치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따라서 이 영광송은 거저 주기 도를 끝맺는 형식이 아니라 앞에 나온 모든 간구의 기초를 이루는 근간이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찬송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사용하던 찬송가를 통일 찬송가라 불렀습니다. 거기 표지 앞부분 주기도문을 보면 대개라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21세기 찬송가에는 대개가 빠져 있습니다. 대개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21세기 찬송가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대개를 넣어서 암송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영향을 그대로 받은 중국 조선족교회입니다. 이들은 개역판 성경을 사용합니다.
주기도문을 암송하면 대개를 꼭 넣습니다. 이 부분에서 암송 박자가 좀 안 맞습니다. 그러면 대개를 넣는 것이 좋습니까? 안 넣는 것이 좋습니까?
먼저 대개(ότί, 호티) 뜻부터 살펴봅시다. 대개에 대한 의미를 대충, 대강이라는 뜻으로 아시는 분도 혹 있습니다. 그런 뜻이라면 본문 의미가 이상해집니다. 대충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전혀 안 맞지 않습니까?
주기도문에서 대개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한문으로는 大蓋(큰대, 덮을 개)로서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 라는 뜻입니다. 이 말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어려운 단어를 사용합니까? 이는 1930년대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중국어 성경을 많이 참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옛날 중국 성경에서는 왜냐하면, 이 뜻을 蓋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蓋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蓋 한자만 쓰면 발음의 부조화 때문에 대를 추가하여 大蓋가 되었습니다. 알고 보면 접속사의 옛날식 표현으로서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 라는 뜻의 부사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왜냐하면, 이 접속사는 지금까지 주기도문을 강론한 9시간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유를 의미하는 접속사 for로 번역하였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왜냐하면(for)'이라고 되어있어서 뜻이 좀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사용 안 해도 무방하고 굳이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대개라는 단어를 가지고 괜스레 진리니 비진리니, 잘되었느니 못되었느니 할 필요는 없습니다.
2.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접속사입니다. 접속사는 말 그대로 앞뒤 문장을 연결해주기 때문에 그 뜻이 더욱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나라 권세 영광 세 경우가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 접속사가 연결해주는 찬양의 주제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➀나라(βασιλεια). 왕이 다스리는 나라 곧 왕국으로서 이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출발 첫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이었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까지 사십일 간 주제가 하나님 나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과 정치의 왕국을 의미하는 곳이 아님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을 가지고 영원히 통치하시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의 주권과 통치가 미치는 전 영역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접하는 나라는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세상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 속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세상 나라에 속해 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도 속하여 살아갑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도 현실로는 로마 황제에게 속해 있었고, 로마 황제가 세계 모든 나라의 주인으로서 모든 사람이 그 권세에 복종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가 우리의 나라는 로마 황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면 그 고백은 생명을 내어놓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과 더불어 나타났지만, 세상 끝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이중 구조로 되어있습니다(막 01:15, 눅 21:27, 28, 계 21:01~08).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 스스로 세상 나라에 속해 있는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는지 소속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잘살게 되기를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②권세(δύναμις). 이 δύναμις에서 다이너마이트라는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권세는 국가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당시 세상 사람의 관점에서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천하를 호령하는 로마 황제에게 있다고 여겼습니다. 반면 신자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신자들은 로마의 권력에 의한 핍박과 죽음 앞에 처하면서도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황제는 육신의 목숨은 거두어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한 생명을 심판하시는 권세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현실에서 가장 강력한 권세의 출처는 어디인 것 같습니까? 더러는 돈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공권력도 돈 앞에서는 무기력할 때가 많습니다. 돈을 전능의 신으로 믿기 때문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이 돈이 힘이라고 소리칠지라도 우리는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고백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돈을 벌되 정직하게 벌고, 조금은 손해 보는 듯이 양보하며 살고, 내가 가진 것을 작지만 이웃과 나누는 일에 힘쓰는 것이야말로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모습입니다.
③영광(δόξα). 빛, 광채의 뜻으로서 영광 받으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신다, 찬양받으신다. 이런 뜻입니다. 신자 가운데 더러는 어떤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광경을 종종 연출합니다.
연말에 가요제나 영화나 탤런트 등 여러 분야에서 시상식을 할 때 대상자가 가끔 감격에 겨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라는 고백합니다.
축구 선수가 국제경기에서 골을 넣고서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세리머니를 보기도 합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모습은 참으로 귀합니다.
과연 이런 행위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까? 상을 받지 못한 사람 중에도 신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까? 결국, 이런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세상 영광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로 인해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영광을 받으십니까?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고 그 뜻에 순종할 때 받으십니다. 선한 일에 힘쓰며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때 받으십니다.
빌 0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ἀμήν). 모든 일의 마지막은 아멘이어야 합니다. 아멘(ἀμήν). 기도 후에 아멘을 고백하는 것은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서 예배 의식 때에 사용되었습니다. 아멘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아멘의 의미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아멘은 확신이고, 하나님에 대한 무한신뢰의 표시이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활짝 열린 자세입니다.
첫째 아멘은 수동태 아멘이 있습니다. 기도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나의 한계와 부족을 인정하는 데서 기도가 출발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일은 명백히 교만입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아멘 하는 순간 내가 구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맡기는 것입니다.
둘째 아멘은 능동태 아멘이 있습니다. 아멘은 기도의 마지막에 하지만 시작의 의미도 있습니다. 기도한 후에 그 기도를 따라 살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아멘은 긍정하는 아멘이 있습니다. 아멘은 확신입니다. 내가 기도한 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이고, 기도가 이루어질 것을 믿는 사람이 아멘 합니다.
기도는 코너에 몰리고 몰려서 마지막에 꺼내는 카드가 아닙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불가능도 가능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믿음 생활은 따지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나서 조금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아멘은 이미 이루어진 약속을 믿는 그것과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멘이란 기도가 응답할 것을 확신하는 고백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긍정의 자세가 긍정의 삶으로 이끌어 갑니다.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기도문이 막혀 있지만, 기도의 줄을 놓지 않는 사람은 희망을 붙잡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 아멘이 세 가지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①하늘에 계신 주님의 약속에 대한 응답으로서.
계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②기도할 때 대표 기도자에 대해 동참한 이들의 응답으로서.
고전 14: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③송영으로서.
계 01:0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문자 그대로 암송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내용 하나하나를 우리의 마음을 담고 고백하며 살도록 결단하기 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최후로는 우리의 삶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쓰임 받으며, 주님 모습을 닮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나침반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기도문을 수시로 암송하지만 왜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마음을 담아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권세도 영원합니다.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습니다. 이 기도를 따라 우리의 입술에서도 영원히 주기도문은 고백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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