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주기도문

주기도문②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06:09)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7. 9. 20.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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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제1 본문. 06:09~13
0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 제2 본문. 11:02~04
0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0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04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주기도문 강론은 지난번 살펴본 첫 시간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을 암송해야 하는지 육하원칙에 따른 자세한 설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모든 사상과 교훈을 먼저 이해하고 본론에 들어가야 주기도문 전체의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구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부분은 하나님을 부름으로 시작하고 둘째 부분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원이며 셋째 부분은 우리와 관련된 청원입니다.

 

성부께 간구하는 ➊ ➋ ➌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 핵심 주제입니다. 원문에 보면 모두 이인칭 속격(συ)을 사용하고, 성자께 간구하는 ➍ ➎은 일용할 양식과 죄 사함이며  ➐은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악에서 구해달라는 주제입니다. 원문은 일인칭 속격(ἡμῶν 헤몬 우리)을 사용합니다.

 

서 론 기도의 대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본 론
(기원)
성부님께
기원(3)

이름
나라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나님을
위하여
성자님께
청원(2)
육의 양식
영의 사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자기를
위하여
성령님께
간구(2)
승리 보호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결 론
(송영)
성 삼위께 찬양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성 삼위께
 

주기도문은 신약성경에 두 가지 형태로 나옵니다. 마태복음 06장 09~13절에는 긴 본문 형태의 주기도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누가복음 11장 02~04절에는 짧은 형태의 주기도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질에서 그 내용의 차이점은 없습니다

마태의 주기도문 본문은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 사역에서 이루어졌고 산상설교 마 05~07장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누가의 주기도문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기간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여행하실 때 있었던 여러 사건 눅 09:5119:10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은 양식(form)에서 몇 가지 상이(相異)점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두 본문을 대조하면서 적절한 조화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상이점의 이유를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기도문을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반복하여 가르치는 과정에서 마태와 누가가 각기 한 경우씩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첫째 부분 세 가지 간구는 접속사가 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 간구의 내용이 하나의 사항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둘째 부분의 세 가지 간구는 연결 접속사(και and)로 이어져 있습니다.

개역 개정에서 이 셋이 [~]로 연결된 것은 적절합니다왜냐하면 [~]는 앞뒤의 말을 내용으로 단절하여 나열시키는 접속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잘 아는 영원한 모범 기도 주기도문이 등장합니다저는 주기도문을 강론하면서 마태가 기록한 본문 마 06:09~13절 중심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강론하겠습니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0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하나님은 하늘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갇혀 계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수식어가 아닙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친히 통치하시는 초월자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원문에서는 하늘들이라는 복수의 형태로 나옵니다. 하늘은 셋째 하늘(3층천)로 조성되어 있다고 믿었던 히브리인의 사상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무한성(왕상 08:27)과 편재성(139:08)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높은 셋째 하늘이 하나님의 거처일 것으로 믿었습니다(33:14, 고후 12:02).

 

따라서 하늘에 계신 이런 기도의 문두(文頭)는 신자들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소망과 깊은 신뢰를 담고 있습니다.

나아가 하늘나라가 진정 자기들의 본향임을 인식하고 기도할 것을 바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으신 뜻이 담겨 있는 문구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땅에 있는 우상과 구별된다는 뜻.

인간의 사색이나 연구 묵상 등으로 만들어 놓은 공상(空想) 속의 신이 아니라는 뜻.

오직 우주에 실재하셔서 모든 만물을 통치하심과 전지전능 및 무소부재 하신다는 뜻.

피조물의 지위로부터 분리되어 계신다는 뜻.

높으신 하나님, 넓으신 하나님, 영광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

 

아버지(πάτερ). 기도의 대상을 부르는 호칭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체 기도문을 좌우하며 또한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기도의 내용이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이렇게 가르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소개된 단어입니다. 외식을 뛰어넘는 친밀함의 표현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더 친근한 아버지를 사용하셨습니다. 아람어의 아빠(Ἀββα)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세 번 나오는데 바울도 두 번 사용했습니다.

 

막 14: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롬 08:15….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갈 04:06 너희가 아들이므로….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구약성경에 아버지 호칭도 있지만 대부분 여호와여, 전능하신 하나님(םי󰕙󰗟󰔤 엘로힘) 이런 호칭으로 더 많이 나타납니다(01:02, 63:1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계속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는 호칭을 쓰자 의아스러움과 상당한 충격에 휩싸입니다. 유대인의 정서상 혁명 같은 선언입니다.

신성 모독죄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하나님을 향해 감히 이런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 호칭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라 마음에 와닿는 분, 사랑이 넘치는 분임을 가르치시려고 이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새 언약의 표시입니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요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지금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누구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좀 더 본문의 의미를 잘 알기 위하여 제1, 2 본문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06:09과 눅 11:02에서 πάτερ(파테르)라는 호칭은 일치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ὑμες ὁ ἐν τος ορανος)가 누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먼저 우리에게 기도의 대상이 뚜렷한 인격을 가지신 절대자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기도의 대상을 찾지 못하여 혼선을 겪고, 하나님 외의 것을 붙잡습니다.

 

양심에 기도하는 이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 양심에 대해 기도한다.

자연에 기도하는 이들. 범신론자들은 인간이 곧 하나님이며 자연이 곧 하나님이다.

귀신에게 기도하는 이들. 무당.

알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이들.

 

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는 알 수 없는 미지(未知)의 신이나 우상을 향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연 신교나 다신교 신봉자들 기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신약성경에서 아버지여 라는 표현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 속에서 한 번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27:46) 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기서 하나님이란 단어만 사용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단순히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대속의 십자가를 지면서 메시아 사역을 완성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2. 우리 아버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0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은 기도의 서두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호칭하셨습니다. 이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존재의 정도가 아니라 인격이시며, 폭군이나 압제자가 아니라 친밀히 자녀를 돌보는 참된 부성을 지니신 아버지이십니다(03:14, 15).

 

우리 아버지(πάτερ ἡμῶν, our father). 우리라는 복수 형태가 주기도문 전체에서 나타납니다. 이는 주기도문이 혼자서 드리는 기도의 모범이 아니라 제자들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면서 드리는 기도의 모범(18:19)입니다.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자들은 한 형제입니다. 교파가 다르고 신학 사상이 달라도 한 형제입니다. 인종이 다르고 방언이 다르고 피부가 달라도 한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 대명사는 나만의 아버지가 아닌 구원받은 모든 신자의 아버지입니다. 선교의 사명이 들어있는 호칭입니다.

우리의 의미는 하늘의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고, 공동체의 친교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친교의 특징은 원망 뚝 불평 뚝입니다. 동시에 오직 사랑입니다.

 

 

3.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까?

 

0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불신자들은 기독교에서의 아버지를 잘 못 이해하는 때도 있습니다. 인간의 계보(系譜)나 촌수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는 계보나 촌수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때의 의미는 창조자, 길러 주는 자, 보호자라는 뜻으로서 성경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옴.

욥 01:0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피조 된 전 인류의 아버지.

사 64:0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전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

출 0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주기를 거절하니….

 

예수님으로 인해 아들이 되는 특권을 얻었기 때문.

요 0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혼을 창조하셨기에.

히 12:0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롬 0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로 이해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03, 26).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시 71:17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습니다.

벧전 05:0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합니다.

롬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합니다.

시 34: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06:33).

하나님께 순종하며 거룩한 생활하여야 합니다(벧전 01:14, 15).

형제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요일 04:20, 21).

위의 것을 생각하며 찾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03:02).

 

John Calvin(1509.7.10~64.5.27). 예수님이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나도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Martin Luther(1483.11.10.~1546.2.18). 이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다.

Andrew Murray(1828.5.9~1917.1.18). 이것은 기도의 모범이며 따라서 이것은 기도의 영감이다.

Thomas Watson(1620~1686). 십계명은 우리의 삶의 규칙이요, 사도신경은 우리의 신앙의 총체이며, 주기도문은 우리의 기도의 모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