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주기도문

주기도문 ①이렇게 기도하지 말라(마 06:05~08).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7. 9. 20.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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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마칠 때 암송하는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문(主祈禱文)을 여러분은 어떻게,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십니까?

3세기 변증가 아프리카의 터툴리안은(Tertullian, 150~225) 이 주기도문을 가리켜 전 복음의 요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의미도 모르고 그냥 주문 외우듯 암송하면 오히려 주기도문을 욕되게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주기도문을 삼가 잘 사용합시다.

 

M. 루터[. Luther, 1483.11.10.~1546.2.18]. 주기도문은 최대의 순교자다.

 

주기도문(Lords Prayer)은 주님의 전 인격과 사역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복음 중의 복음으로 알고 사용하여야 믿음 생활에 유익이 됩니다.

신앙인이 모여 올리는 공 예배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 기도문, 또 목사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에서는 주로 예배의 마무리로 사용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주기도문을 단순하게 예배나 모임의 시작이나 마침을 알리는 하나의 절차로 생각하십니까? 주기도문의 그 의미를 알고 그 뜻을 따라 사용하셔야 은혜가 됩니다.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은 믿음의 공동체 일원으로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그 나라를 받들고 섬기겠다는 서약입니다. 내가 어떤 나라와 어떤 주인에게 속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영문으로 66단어, 한글로는 50단어 149자로 되어있는 짧은 기도문입니다. 낭비된 단어가 하나도 없는 간결한 기도문이기에 기도의 표본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기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 내용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라는 기도의 필요성이 예수님께는 해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모범 기도로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기도를 드릴 때 이런 원리를 따라서 기도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예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며, 기도하는 우리의 자세가 잘못되지 않게 하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치며, 우리의 관심을 먼저 쏟아야 할 부분이 어디인가를 알게 하고, 기도의 궁극 목적은 결국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부터 격주로 주기도문을 강론하겠습니다. 먼저 본론인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에 대한 서론으로서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주기도문을 요청하는 배경이 있습니다.

 

눅 11:0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첫째. 기도문을 달라고 요청하는 제자.

 

예수님 당시에는 여러 유형의 기도문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신 06:04~09절에 근거한 쉐마(Shema) 기도문, 회당에서 설교가 끝나면 참석자들이 함께 암송하는 카디쉬(kaddish) 기도문,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 번씩 암송하는 18번 축복기도문(18 Benediction) 등입니다.

이런 기도문들은 유대인들 신앙을 반영하는 기도문으로서 이 기도문을 공유한 집단의 하나님 나라 이해와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유명한 랍비들도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사용하게 하였고, 세례 요한이 이끄는 모임도 역시 자기들의 기도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예수님께 오기 전 요한이나,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때 스승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요 0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6).

 

이때부터 요한과 안드레는 예수님을 찾아가서 제자가 되었고( 01:35, 40),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당연히 그 나라의 정신과 이상을 담을 수 있는 기도문이 필요하였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신 후 한 제자가 나와 기도문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선생님, 그렇게 진지하게 기도하시니 보기에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왜 기도문을 주시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기도문을 주십시오.

기도문을 요청한 제자가 누구입니까? 성경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강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 정도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제자들이 보고 감동과 은혜를 받았을 것 같습니다. 이제 자기들도 기도문을 가질 때가 되었다고 여기고 요청합니다.

 

둘째. 기도문을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 기도를 잘 아셨습니다.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제자들이 이런 외식과 중언부언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깨닫게 하려고 주셨습니다주기도문은 단순히 암송하는 데 의의가 있지 않습니다. 오직 기도의 정신과 기도의 올바른 태도를 배우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기도가 무엇이며, 기도 생활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도의 모범을 보고 배울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주기도문을 암송만 할 뿐 그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혹 느끼지는 않습니까? 예배 때 암송하는 분들을 살펴보십시오.

때로는 누가 빨리 외우는지 대회를 하는 것 같고, 그래서 박자가 잘 안 맞습니다, 또 목소리를 짝 깔아서 거룩한 무게를 잡으려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2. 주기도문을 암송하기 전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가 있습니다.

 

0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예수님은 06:09 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적극적인 교훈에 앞서 먼저 소극적인 면으로서의 교훈 2가지를 주십니다.

 

첫째, 외식하는 자와 같이하지 말라.

외식하는 자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율법사)들로서 이런 외식자들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악하면서도 선을 가장(假裝, pretence)하는 유형. 이런 스타일의 사람은 자기가 남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2:15~18).

자기만족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신과 이웃을 속이는 유형. 이런 스타일은 스스로 경건한 척을 하나 곧 탄로가 나고 맙니다( 2313~16).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던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런 유형에 속합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가장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유형. 이런 스타일의 사람은 가장 완벽한 위선자로서 이웃에게 존경받으며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외식자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05).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대인들은 일정한 기도의 시간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3, 6, 9,  06:10,  03:01, 10:09).

기도의 시간과 함께 기도의 장소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 관념은 회당에서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믿고 회당 기도를 고집하였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정한 시간과 장소를 갖는 것은 굳이 잘못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권장할 만한 일입니다. 저도 여러분이 일정한 기도 시간과 장소를 갖기를 권장합니다.

 

그러나 외식하는 사람들의 기도는 다소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다 보니 기도의 중요성 보다 사람의 인정을 더 의식합니다.

누가 더 기도의 시간을 잘 지키고, 기도하는데도 미사여구를 잘 사용하며, 또 기도의 위엄이 깃들이어 있는가? 하는 자기과시의 모습에 빠집니다.

외식자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이 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회당에 올라가 기도하기를 즐겨 하였습니다, 만일 외출 중에 기도의 시간을 맞으면 그 자리에 서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하는 외식자들은 기도의 본질에서 점점 변질하여 갔습니다. 그 증거를 예수님은 05절에서 밝혀줍니다.

예를 들면 외식자들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큰 거리로 의도성 있는 외출을 합니다. 곧 정해진 기도 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일부러 목 좋은 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먼지를 뒤집어쓰며 기도하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그런 외식자들이 큰 거리 어귀에서 서로가 만나게 되니 최고의 코미디언들 아닙니까?

이렇듯 그들의 기도 행위가 처음에는 순수하였으나 시간이 점차 지남에 따라 외식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기도로 사기 치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목 좋은 장소를 이용하여 자기의 거룩함을 가장하여 과시하려는 바리새인들의 속셈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외식함을 지적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왜 기도의 외식을 부립니까? 외적인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명성도 얻고자 함입니다기도는 하나님과 자기와의 순수한 만남의 장()입니다. 신령한 교제(交際)가 목적이어야 합니다.

 

둘째,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말라.

0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異邦人)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예수님은 앞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 행동을 책망함 같이 이제는 이방인들의 잘못된 종교 관행을 빌어 참된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말라. 중언부언이란 어린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 그 뜻도 모르고 부모님을 따라 할 때의 발음에서부터 유래하였습니다.

잡다할 정도로 말을 길게 끌거나 아무 의미 없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으로서 이방인들은 주문(呪文) 같은 것을 지겹고 공허하게 반복하였습니다(왕상 18:26, 28).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기도가 상달된다고 믿었습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꼭 짧고 간단하게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온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는 기도의 길이와 관계없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며 또한 기쁘게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는 데 있습니다( 65:24,  11:06). 어린아이들이 부모님 하는 말을 아무 의미도 알지 못하고 그대로 반복하는 모습처럼 어쩌면 우리의 기도 생활이 이 같지는 아니합니까?

 

의미 없는 단어의 기계적인 반복처럼 오랜 기간 지내 오면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의 익숙한 기계처럼 언어가 된 것은 아닙니까? 잘 살펴보십시오.

기도 생활에 영혼이 실려 있지 않고 그 기도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여 무의미한 단어나 문장만 반복한다면 나 자신도 중언부언하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중언부언하는 예를 찾아보겠습니다.

 

행 19:34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왕상 08: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불교에서는 승려가 불공을 드릴 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반복합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무는 인도어로 돌아가서 의지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西方淨土) 즉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로서 중생의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자기를 부르는 사람을 구제해 준다고 합니다관세음보살은 사람의 고통을 자비로써 모두 거두어 가는 어머니와 같은 보살입니다.

 

일본에서 건너온 신흥 불교 창가학회(創価学会 SGI)가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 대상의 경전인 나무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주문처럼 반복합니다.

이런 것을 중언부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이렇게 주문을 외우듯이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말속에 진정을 담지 않고, 그 말속에 간절한 마음을 담지 않고, 형식으로만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 보실 때 어떨 것 같습니까?

 

스팸 처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중심에 진정한 열망이 없이 말만을 반복하는 형식적 기도에 대하여 지적하십니다. 중대할 때나 위급할 때 기도의 초보자가 기도에 익숙하지 못하여 반복하는 그런 기도를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숫자를 헤아리지 않으시고 무게를 다시며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길이를 재지 않으시고 깊이를 재십니다. 기도가 스팸 취급이 되지 않도록 진정성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11.13.~430.8.28.). 많은 말을 할 것이 아니라 많은 기도를 하여야 하며, 유창한 말이 아니라 경건한 마음의 열정을 가져야 한다.

 

막 12: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눅 20:47).

 

 

3. 우리에게 골방 기도가 필요합니다.

 

0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네 골방에 들어가. 골방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장소로 사용했던 곳이며, 엘리사의 침실과 비슷한 것처럼 여겨집니다(왕하 04:33).

한편 골방은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 내밀(內密)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골방은 바리새인들이 기도의 장소로 선택하였던 회당과 큰 거리 어귀와는 뚜렷이 대조되는 곳입니다.

 

문을 닫고.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는 것은 잠시나마 오직 자기와 하나님 외에 어떤 제삼자의 개입도 불허(不許)한다는 의미입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 아무런 숨김없이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골방 기도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모든 단절된 상태로 기도에 임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상대로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가 드리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간구가 아닐 때가 있습니다사람을 고발하는 것 같은 넋두리 표현일 때가 있습니다. 조심하여야 합니다.

골방 기도란 장소를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거리에도 골방이 있고, 골방에도 거리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욕망을 차단하는 기도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골방 기도입니다.

 

0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본받지 말라. 이방인들은 기도를 길게 하거나 반복하게 되면 기도의 효력이 강화된다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서 질 것이라는 미신적인 생각입니다(왕상 18:26~28).

구하기 전에  아시느니라. 우리는 기도에 앞서 하나님은 인격이시며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더 잘 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더러는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와 필요를 잘 알고 계시지 아니한가? 그러니 굳이 그렇게 메어 달릴 필요가 있는가? 라고 오해하는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과 영적인 인격 대화를 원하시며,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감을 가지고 그 필요를 따라 간절히 구하기를 원하십니다앞으로 우리가 함께 공부할 주기도문 강론을 들으실 분은 이제부터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의 위치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바로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 안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살전 05:17).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만 살 수 있으며,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보여준 그 원리와 방법을 따라 날마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여행하다가 숲을 지나게 되었는데 길이 두 갈래로 나 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어디로 갈지 몰라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저의 길을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지팡이를 앞에 놓고 쓰러뜨릴 때 지팡이가 왼쪽으로 쓰러지면 왼쪽으로 가겠고, 오른쪽으로 쓰러지면 오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도 할머니 마음에는 이미 왼쪽으로 가겠다고 결정해놓았습니다.

지팡이를 놓고 쓰러뜨리니 오른쪽으로 넘어졌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하나님, 실수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하고는 지팡이를 세워놓고 쓰러뜨리니 또 오른쪽으로 넘어졌습니다.

할머니가 이것은 우연히 오른쪽으로 쓰러진 거야. 아버지 뜻이 나타나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는 세 번째 쓰러뜨리니 왼쪽으로 넘어졌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의 뜻은 왼쪽이야.

 

사람은 자기 탐욕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지팡이를 쓰러뜨립니다. 주기도문은 이런 미신 같은 내용을 타파하고 주님께서 일러주신 기도의 방향으로 안내합니다.

주기도문에는 예수님의 사상과 교훈이 함축되어 있음에도 우리는 너무 경솔히 주기도문을 드린 것 같지는 않습니까? 오늘은 주기도문 강론 첫 시간입니다.

이후부터 주기도문의 진실한 의미를 깨닫고 들은 말씀을 우리의 생활로 옮겨 와야 합니다. 신앙인의 기도의 모델인 주기도문을 잘 이해함으로써 성숙한 기도자가 됩니다.

 

마 07:0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0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