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성도는 십자가란 말을 들어도 좋습니다. 십자가 모형만 보아도 왠지 마음이 좋습니다.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교회를 보면 마음이 포근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여러 행적을 기념할 때나 몸에 부착하는 장신구를 만들 때 십자가를 새기는 것은 그만큼 십자가가 좋은 의미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선진 국민으로 자처하는 로마시민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들은 밥을 먹다가도 십자가 소리만 들으면 숟가락을 놓았다고 하며, 심지어는 잠을 자다가도 십자가라는 말이 들리면 두려워서 잠을 깼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예배를 시작하면서 사도신경을 암송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내용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 외에는 그 십자가가 어떤 것이다. 라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이 있는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두려운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오늘 사도신경 강론을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이란 제목으로 전하겠습니다.
1. 본디오 빌라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본디오 빌라도(Ποντίου Πιλάτου 재임 기간 26~36). 로마의 세자누스(Sejanus) 총리의 청으로 디베료 황제(Tiberius, 14~37)의 인준을 받아 유대에 파송 된 제 5대 총독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에 대한 단독 결정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는 로마의 통치지역 가운데 시리아 지역의 한 부분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지역 행정 대리인 격입니다. 이 빌라도에 대해서는 2015년 8월 16일 별도로 설교하였으므로 오늘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재판 과정에서 예수님이 정치범으로 죽을죄를 짓지 않았음을 알았고, 자기 입으로도 세 번이나 무죄라고 인정하였습니다(요 18:38, 19:04,06).
무엇보다 예수님을 체포해 놓고는 집요하게 사형으로 유도하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압력 앞에서도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계속 유대인들의 반발에 부딪치자 예수님을 구명(救命)하는 일에 총독의 자리를 거는 모험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유대인들에게 이 재판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마 27: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마 27:19절에 의하면 그의 현지 부인이지만 숨은 예수님의 제자로 불린 글라우디오 프로클라(Claudia Procla)가 빌라도에게 간밤에 꾼 꿈이 나쁘니 재판을 조심하라고 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사형으로 선고했습니다. 왜 예수님를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까? 유대인들의 반대 여론으로 인해 총독의 직위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빌라도는 일반 자연인이 아니라 그 시대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권세 아래서 유대를 다스리던 총독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로마에 항거한 열심당원도 아니며, 무정부주의자도 아닌 오직 가난한 자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시는 메시야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의 질서를 수호하는 권력자로서 정의의 편에서 백성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그 질서를 지키는 자리에 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의의 세력과 손을 잡고 그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면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면서까지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빌라도가 세상 권세를 오래 동안 누렸습니까? 안타깝게도 그 권력의 수명이 너무나 짧았습니다.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고 질문을 해 놓고 답을 듣지 않았던 빌라도, 세상 권력을 얻기 위해 온갖 악한 일을 자행했던 빌라도의 앞날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뇌물수수, 폭행, 약탈, 학대, 무례함, 잔인성 등의 이유로 36년 경 직속상관 수리아의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에 의해 파면을 당하였습니다. 비텔리우스는 빌라도를 파면시키고 디베료 황제에게 소환하라고 건의하였습니다. 결국 빌라도가 소환을 받고 로마로 가는 중 디베료 황제는 죽고 그 동안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황제 갈리굴라(Caligula 12~41)의 사형 집행을 받기 전 빌라도가 자살했다고 전합니다.
2. 예수님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
롬 05:0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나를 위하여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나의 죄를 대신 속량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최고의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 틀의 명칭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원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지만 이 방법은 유대인들의 관습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죄인을 처형 할 때 네 가지 방법으로 집행하였습니다. 칼로 목을 베는 참수형(출 21:14)과, 목을 매어 죽이는 교수형과(민 25:04),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과(출 20:14), 돌로 쳐 죽이는 투석형(출 20:27)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한 자기들 방법으로 예수님을 처형하면 큰 저항이 올 것을 예상하여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 빌라도를 이용해서 십자가형으로 집행하였습니다.
십자가형이 선언 되면 즉석에서 못을 박는 것이 아니라 먼저 채찍질부터 합니다(마 27:26). 로마의 채찍질은 두 손을 쇠사슬로 높이 매달고 발은 바닥에 겨우 닿을 정도로 해 놓고 뼛조각을 단 가죽 채찍으로 내리 치는 방식입니다.
사람을 거의 실신 상태로 만든 후 자기가 달릴 십자가 틀을 직접 지워서 사형장까지 가게 합니다. 사형장에 도착하면 옷을 벗겨 부끄럽게 한 후 독주를 먹여 술기운으로 부끄러움을 다소 잊게 합니다. 로마식의 아주 작은 아량입니다. 이어 십자가 형틀을 갖추고 큰 못으로 손과 발에 박은 후 수직으로 세웁니다.
이때 십자가의 형태는 X형(안드레 십자가)과 ?형(라틴 십자가) 두 가지가 있는데 ?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게 하는 방법도 십자가에 매달아 굶겨 죽이거나, 기운이 다하여 죽게 하거나, 손과 발에 못을 박아서 죽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마지막 모습은 사형 집행관들이 예수님의 손바닥에 못을 박으면 찢어지기 때문에 손목에 박았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예수님을 안식일 전날임에도 급하게 사형으로 몰아갔지 않습니까? 이내 안식일에 시체를 그대로 두면 불경하니 빌라도에게 시체를 치워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총독의 명을 받은 군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요 19:34).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사람의 눈에는 억울하게 십자가형을 받으신 것처럼 보이지만 이 일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인 것은 십자가의 길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많이 강조합니다. 이는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속량하는데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 02:0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0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정치면이나 사회면에서 죄를 지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후 하나님께서 메시야 보내실 것을(창 03:15)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졌음에 의의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 관심은 영원히 사는 생명에 있습니다. 이 생명 문제 해결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3. 빌라도의 굽은 판결을 왜 사도신경에 넣었습니까? |
사도신경.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빌라도의 잘못된 판결이 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되었으며, 4세기에 이르러 완성 된 사도신경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습니까? 사람의 보기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억울하게 보일지라도 이 일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희생정신을 우리도 따르기를 권합니다.
벧전 0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성도들은 오랜 세월동안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통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세상을 다녀간 사람들 가운데 빌라도만큼 저주를 많이 받은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사도신경 형성과정에서 저주의 자리에 빌라도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도 빌라도 자신이 택한 일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릴 수 있는 권한도, 죽일 수 있는 권한도 있었지만 그 권한을 불의의 재판을 하는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권한을 남용한 결과는 영벌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향하여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막 14:21)는 말씀이 빌라도에게도 해당되었습니다.
영원할 줄 알고 진리를 외면하며 선택한 그 세상 권력이 빌라도 자신을 굳건하게 지켜 주었습니까? 불행하게도 그 권력은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불행한 사람으로 사용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창녀도 있고, 마태와 같은 세리도 있고, 베드로와 같은 어부도 있고, 바울과 같은 박해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조상들 중에 기생 출신 라합도 있고, 부정한 여자 다말도 있고, 모압 여자 룻도 있고, 불륜의 여자 밧세바도 있습니다.
이들은 다 역사의 한 모퉁이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들어왔습니다. 이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유대의 총독 빌라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대면한 자리에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으면서도(요 18:38) 그 진리를 영생으로 가는 길라잡이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자리에 앉았을 때 그의 현지처가 보낸 그 의로운 사람에게 상관하지 마세요. 라는 전갈에 귀만 기울였더라도 역사의 죄인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마 27: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그 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은 죄와 무관하다는 표시로 손을 씻는 의식을 하였습니다(신 21:06,07). 빌라도도 예수님에게 사형판결은 내렸지만 자기의 뜻이 아니라는 의도에서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죄와 상관이 없습니까?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이는 결정을 해 놓고 나는 무죄하니 그 책임을 너희가 지라는 말로 책임이 피해 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빌라도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 반응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제거만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피 값이라도 받겠다고 말합니다.
마 27: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 지어다 하거늘.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결정하고,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결정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택해 주셨으니 나도 ㅇ{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거하여야 합니다.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구원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을 점검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릴 수 있는 신령한 감각을 키워야 합니다. 신령한 감각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을 줄 믿고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확인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 한 구절 읽고 마칩니다.
히 0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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